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복음............... 조회 수 384 추천 수 0 2005.03.21 15: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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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본문 : 에베소서 5: 1- 14

본문에서 바울은 불신 상태와 예수를 믿은 이후의 변화를 어둠과 빛으로 이야기합니다. 불신상태는 어둠이요, 예수를 믿은 이후의 상태는 빛이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된다는 것은 어둠의 자녀에서 빛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빛 되신 주님을 우리의 마음속에 받고 그 빛을 반사하기에 우리는 빛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러나 빛된 우리가 세상에 존재함에도 세상은 여전히 어둡기만 합니다. 이는 우리가 빛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빛이라는 우리 자신의 신분과 빛으로서의 사명과 그 역할을 일깨워 보겠습니다.
첫째, 빛의 자녀들은 빛 되신 하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1∼2절).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주님과 주님의 사랑을 닮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너희를 위해 희생하셨듯이 너희도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자신을 희생하며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둘째, 빛의 자녀들은 어둠의 일을 버려야 합니다(3∼7절). 빛과 어둠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어둠의 세력이었으나 빛이 들어왔으므로 어둠의 일을 버려야 합니다. 어둠의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본문은 두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부도덕한 삶입니다. 즉, 음행과 더러움과 탐욕의 삶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부적절한 언어생활입니다. 누추한 말,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이제 빛이 들어왔으므로 다 사라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으면 믿지 않았을 때 가졌던 부도덕한 생활이나 더럽고 추한 말들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아직까지도 이런 어둠의 일이 우리의 삶 가운데 공존한다는 데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면 우리는 과거 어둠을 다 버려야 합니다. 이 사회가 어두운 것은 우리가 빛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진정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모든 어둠의 일을 다 물리쳐야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셋째, 빛의 자녀는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8∼14절). 본문에서는 빛의 열매를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입니다. 여기서 ‘착함'은 너그러움, 관용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너무나 각박하며 이기주의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밖에 모르는 세상 속에서 이웃을 향한 착함과 너그러움을 드러내야 합니다. 선행을 통하여 착함을 드러내야 합니다. ‘의로움’은 도덕적으로 악, 부정에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의롭지 못하며, 불법이 성행하며, 도덕적 부패가 극에 달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야 하며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진실’은 허위와 위선의 반대 개념입니다. 우리는 허위와 위선이 가득 찬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 속에서 참됨과 진실함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불신이 팽배한 세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에 믿을 수 있다는 신뢰성과 진실성을 소유해야 합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 이제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어둠의 일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바뀌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혹시 우리는 꺼진 등이 아닌지, 우리의 빛을 밝히 비추고 있는지 생각해보시고 빛의 자녀로 살아갈 것을 다짐합시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빛의 열매(The fruit of light)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부도덕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임할 장래의 심판에 대해서 말한 다음, 과거와 현재의 상황이 엄청나게 달라진 에베소 교인들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8절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죄인들이 행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여기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의 이전의 상태를 추상적으로 어두움이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어두움이란 말과 빛이란 말은 상징적인 말입니다. 어두움은 무지와 과오, 그리고 악을 상징한 것이고, 빛은 진리와 의를 상징한 것입니다. 죄를 범하는 상태는 어두움을 의미합니다. 어두운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죄인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며 알려 하지도 아니하고,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행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한 대로 패역한 세대입니다.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untoward) 세대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운 데 사는 사람은 좌충우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의 영혼에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주안에서 빛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으로 구원의 빛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이 급격한 변화는 주안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마태복음 5장 14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면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5∼7).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 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일 2:9∼11). 요한 사도는 빛을 사랑으로, 어두움을 미움으로 비유해서 말씀했습니다. 본문의 전에는 이란 말을 물론 예수를 믿지 아니할 때의 일을 말하고, 이제는 이란 말은 예수를 믿게 된 지금이란 뜻입니다. 전에는 예수 밖에서 어두움이요, 절망이더니 이제는 예수 안에서 빛으로 소망 중에 살게 된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실 그리스도 밖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변증에 따르면 빛의 자녀들은 빛의 상태 안에 있는 자들이며, 지식과 거룩함을 부여받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제 이러한 사람들이 되었으니 우리의 언행에서 우리의 처지와 특권에 맞도록 살라는 권면입니다. 이제는 주안에서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실제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선으로 그리고 진리로 우리의 삶을 빛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성령의 열매를 말씀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 그 밖의 모든 아름다운 성령을 통한 열매는 다른 말로 말하면 빛의 열매입니다. 햇빛이 비추어야 곡식이 자라고 열매 맺고 그 열매가 익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 심령을 비추어야 선과 진리가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본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한다고 하면서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빛의 자녀 된 사람들은 본문 10절에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본문 11절에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잎은 무성 한데 열매를 맺지 못하면 주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말은 잘 하는데 아무런 행위가 따르지 아니할 때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주님은 믿음 있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믿음에 대해서 말해 내려가다가 에녹에 대해서 말하면서 히브리서 11장 5∼6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기뻐하신 것도 아브라함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믿음 있는 사람은 칭찬하시며 기뻐하시었고, 믿음 없는 사람은 책망하셨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이 우리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딸이 귀신들려 고생하는데 그 여인이 너무 안타까워 예수님께 나아와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대답도 반응도 없으시더니 나중에는 그 여인에게 실망을 안겨 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이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계속 믿음으로 주님을 의지했더니 예수님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흡족해 하시는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입니다. 한 백부장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자기 하인 이 중풍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실을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백부장은 한편으로는 감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송구스러워서 주님, 주님께서 제 집에 오심을 저는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해 주십시오. 그리하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저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제 밑에도 군사 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옵니다.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그러니 그저 말씀만 하시옵소서 했습니다. 이 백부장의 말을 듣고 있던 예수님께서 너무 감격하셔서 같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시면서, 백부장에게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고 말씀하시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 있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반면에 믿음 없는 사람을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 피곤하셔서 배의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노를 저어 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어부 출신인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웬만한 바람이 부는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 갑자 기 바람이 부는 것은 그 날이 처음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익숙한 기술로 배를 저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바람은 보통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세차게 불었습니다. 물결이 일어나고 그 파도가 배 안에까지 들어옵니다.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제자들은 겁이 났습니다. 이러다가 전복되지나 않을까 하는 불길한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저희들의 경험을 가지고 되지 않았습니다. 기술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결국 고물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은 고물에서 일어나 바다를 잔잔케 하신 후 제자들을 꾸짖었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것을 볼 때 섭섭해하십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은 믿음뿐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제사보다도 순종을 기뻐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순종도 믿음이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순종은 한 수레의 두 바퀴 와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함으로써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순종은 우리의 경험과 지식을 초월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이면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지시 할 땅으로 가라고 하실 때, 그저 예 하고 떠났습니다. 100살 나서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 에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실 때 따지지 아니하고 예 하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은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베드로가 밤새 고기를 잡느라고 애썼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고기를 잡았느냐? 밤새 애를 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제가 이 갈릴리 바다에서 하루 이틀 산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서 잔뼈가 굵었습니다. 아마 이 갈릴리 바다에 대해서라면 저만큼 아는 사람도 흔치 않을 겁니다. 하늘나라 진리에 대해서야 선생님이 우리보다 낫기 때문에 가르치시지만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은 일만은 제가 선생님보다 나을 것입니다. 제가 아는 대로 그리고 제 경험으로는 깊은 데는 고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깊은 데 던지겠습니다. 여기 주께서 말씀하시니 한 것은 내 경험이나 상식으로는 맞는 것이 아니지만 주님께서 명령하시니까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말씀대로 깊은 데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습니다. 주님 말씀에 순종할 때, 주님이 기뻐하셔서 축복을 안겨 주십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계시하신 것이 무엇인지 부지런히 찾고 시험하며 우리 자신을 주의 뜻에 적합하게 함으로써, 우리가 주님의 뜻을 받아들였음을 나타내도록 하라는 권면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 보면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믿음이 없이 할 수가 있습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는데, 믿음 아닌 것 가지고 살면서도 믿음으로 산다고 착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다가오는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그리고 너희 스스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말할 생각도 하지 말라.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 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마다 다 찍어 불에 던질 것이라 했습니다. 나뭇잎이 무성하고, 얼른 볼 때 좋은 나무 같아 보이는데, 좋은 열매를 맺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여기 세례 요한의 말에 나쁜 열매 맺는 나무는 찍어 버린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 믿는 사람이 나쁜 열매, 그러니까 적극적인 죄를 범하지는 아니합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것이 죄라고 지적합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는 것이 죄입니다. 믿음으로 행치 않는 것은 다 죄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누구에게 했어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했습니까? 아닙니다. 스스로 잘 믿는다고 자부하고, 스스로 거룩하다고 다른 사람을 천시하던 사람들을 향해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만 생각하고,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도 바로 거기에 속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그 열매가 없는 것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본문 11절에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열매 없는 이란 말은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것을 말합니다. 어두운 세상의 일을 아무리 해보아야 얻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솔로몬이 말한 대로 헛되고 헛된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열매 없는 일들과 상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스스로 죄악된 일을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러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과 상관해서는 안됩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축복 받은 사람은 불경건한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피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숯을 가까이 하면 나도 모르는 동안에 숯가루가 몸에 묻습니다. 먼지 구덩이에 들어가면 자연히 먼지가 묻습니다. 축복 받은 사람, 빛의 자녀는 죄인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죄인들은 쾌락을 위해 생활합니다. 그러나 빛의 자녀는 세상적인 것을 즐거워하지 아니합니다. 세상적인 것이 만족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일까요? 만족의 근원을 세상에서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미가 달라서 그럽니다. 세상 사람들, 어두움에 속한 사람들은 만족의 원천을 세상에서, 죄악된 길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사실 거기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고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주안에 사는 사람은 모든 가치관이 이전과 달라집니다. 주안에 감추인 새 생명 얻으니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하늘의 은혜와 평화를 맛보니 찬송과 기도로 주 함께 살리라 그리고 빛의 자녀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도 앉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욕됨을 들었을 때 그들은 의분을 금치 못합니다. 전에 다윗과 같은 소년은 그 나이 비록 어리고 전쟁의 경험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덤벼드는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볼 때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를 쳐서 물리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교회가 욕을 당할 때 의분을 품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함께 참예하는 것은 마귀와 짝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해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는 어두움의 일을 책망해야 합니다. 왜요? 본문 12절에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너무 더럽기 때문에 꾸짖는 길 외에는 언급하기조차 부끄러운 일이며, 더구나 그런 사람들과 교제한다는 것은 더욱 부끄러운 일만 안겨 줄뿐입니다. 저희들의 죄는 사도 바울이 말씀한 대로 은밀히 행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마 이방인들이 우상 섬기는 것과 그들의 무서운 비밀스런 행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방 사람들, 죄악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이 행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는 그런 일들을 말하는 것조차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일러줍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의 악한 것이 표면으로 드러날 때 선한 사람들은 그것을 책망해야 합니다. 13절에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어두움의 열매 없는 일들을 공개하라. 너희는 이 어두움의 일들을 책망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 어두움의 일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너희의 모범적 생활을 통해서 그들의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을 있는 그대로 보이게 하라는 뜻입니다.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전에 어두움 가운데서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빛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빛인 빛의 자녀들은 다른 사람들로 그들의 죄를 발견하게 하고, 이 세상을 비추는 빛과 같이 다른 사람들이 악함과 위험을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끝으로 14절 말씀을 같이 보십시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구약 이사야서 60장 1 절에서 참고한 말씀입니다. 거기에 보면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 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복음을 전하는 주의 사자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죄인들을 부르시고 계신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어나라. 이 말씀은 죄인들의 비참한 안락과 어리석음을 깨닫게 합니다. 죄인들은 자기들의 위험에 대하여 무감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깨어서 일어나라고 부르실 때 그 말씀의 뜻은 죄인들이 회개함으로 자기의 죄를 벗어버리고 거룩한 순종에 들어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이 말씀은 주께서 우리를 지식과 거룩함과 위로의 자리로 인도하시고, 주의 은혜로 우리를 도우시며 마음에 즐거움과 평안으로 활력을 주시며, 종내는 영원한 영광으로 상을 주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죄인들은 그들의 영적 죽음의 상태에서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영적인 무감각 상태에서 깨어나야만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빛의 자녀의 사명을 바로 감당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먼저 살아야 합니다. 여기 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가리킨 것입니다. 성경말씀 가운데 우리는 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의 근본 되시는 하나님도 모르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은, 육신은 살았지만 그 영혼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심령이 죽지는 않았지만 깊이 잠들어 일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심령이 있습니다. 묵은 밭처럼 되어 열매 없는 심령이 있습니다. 전에 삭개오가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지만 잠들어 있었습니다. 요나 같은 선지자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요, 사명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멋대로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깊이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선장을 시켜서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라고 깨웠습니다. 왜 일어나야 합니까? 우리의 사명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은 옛날 모세를 바로의 궁중에서 불러 깨웠습니다. 그래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게 하셨습니다.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궁에 있을 당시 유대 민족이 멸망 직전에 있을 때, 모르드개를 통해 에스더를 깨웠습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내가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라고 깨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민족을 어둠(죄악)의 자리에서 건지기 위해 일어나야 합니다. 안락한 자리에 도취되어 있는 잠에서 깨어야 합니다. 육신적 향락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할 일은 너무 많습니다. 우리의 사명이 정말 큽니다.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의 책임이 얼마나 중합니까? 일어나 이 시대의 사명을 다하십시다.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빛으로 오신 주여, 빛 되신 주님의 삶을 따르지 못하는 저희의 용기 없음을 용서하소서. 이제라도 우리의 삶이 선한 행실로 세상의 구석구석을 밝히는 희망의 등불이 되게 하소서. 우리의 영혼을 밝게 비추시고 어두움의 세력을 물리쳐 주옵소서. 주님의 불이 당겨져 나의 몸과 마음이 주를 향한 열정으로 타오르게 하시고 우리의 주위에 이 빛을 비출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를 죄악가운데서 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 묵상 및 토의
0 나는 과연 어두운 세상에 빛의 노릇을 하고 있는가?
0 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고 있는가?
0 나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모범을 보이고 있는가?
0 나는 모든 일에 공평한가?
0 나는 공의를 따라 행하기를 힘쓰는가?
0 나는 이웃을 구원할 소돔의 10명의 의인인가?
0 나는 현재 죄악된 세상에서 의의 본체이신 하나님을 본받는 삶을 살고 있는가?
0 나는 주의 의로우심을 본받아 내 생활도 의롭게 되기를 원하는가?
0 나는 잠깐의 이익을 위해 공의를 굽게 하지는 않았는가?
0 바울처럼 내가 본받을 만한 신앙인이 주위에 있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나는 본받을 만한 신앙인입니까?
0 내가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삶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 빛을 발하는 그리스도인

두 농부가 한 동네에 살고 있었습니다. 한 농부는 그리스도인이고 다른 농부는 불신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논은 지형상 항상 물이 고여 있도록 된 논이고, 불신자의 논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는 밤중에 몰래 그리스도인의 논에서 물을 빼서 자기 논에 채웠습니다. 아침에 논에 나갔다가 자기 논의 물이 다 빠지고 옆의 논에 물이 차있는 것을 본 그리스도인은 그 불신자에게 따졌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자기가 물을 끌어간 것이 아니라 저절로 흘러 들어온 거라고 잡아뗐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화가 나서 불신자의 논에서 물을 빼 자기 논에 다시 채웠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당연히 취할 권리를 취했는데도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
기도하는 가운데 이런 질문들이 떠올랐습니다.
"너는 왜 정당한 것만 주장하느냐? 왜 네 논의 물이 필요한 이웃에게 스스로 물을 대주지 못하느냐?"
그리스도인에게 깨우침이 왔습니다. 그날 저녁에 그리스도인은 자진해서 자기 논의 물을 불신자의 논에 대주었습니다. 밤에 자기 논에 물을 대려고 나왔던 불신자는 이미 물이 찬 것을 보고 금방 영문을 알아차렸습니다. 다음날 그는 그리스도인에게 용서를 구하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 찬송: 358장 아침 해가 돋을 때

1. 아침해가 돋을 때 만물 신선하여라 나도 세상 지낼 때 햇빛 되게 하소서
2. 새로 오는 광음을 보람있게 보내고 주의 일을 행할 때 햇빛 되게 하소서
3. 한번 가고 안오는 빠른 광음 지날 때 귀한 시간 바쳐서 햇빛 되게 하소서
4. 밤낮 주를 위하여 몸과 맘을 드리고 주의 사랑 나타내 햇빛 되게 하소서

[후렴]
주여 나를 도우사 세월 허송 않고서 어둔 세상 지낼 때 햇빛 되게 하소서 아멘

* "당신의 수명이 1년밖에 남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미국의 한 신문이 독자들에게 이런 설문을 냈습니다. 응답자들 중 집이나 땅을 사겠다 거나 개인비자금을 만들어 놓겠다는 사람은 전혀 없었습니다. 물질적 희망에 대한 내용보다는 더 많은 도움을 주겠다 거나 더 많은 사랑을 하겠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1년이 인생의 마지막 한 해라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더 많이 갖기 위해 계속 몸부림칠 것인가 아니면 더 고귀한 일을 찾을 것입니까? 당신의 고귀한 삶을 위해 하나교회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교회의 비전
1. 365일 예배드리는 교회(히10: 25, 행17:11)
오늘날 죄악이 만연한 세상에서 매일 말씀을 읽고, 듣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말씀의 거울을 통해 매일 마음을 바르고 깨끗이 하여서 예수와 복음을 위해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막8:35)
2. 더불어 사는 공동체 (행2:42- 47)
하나님은 영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육신까지도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천국에 대한 소망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교회는 예수님이 주인이신 예수공동체이며,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안에서 한 가족이 되고, 교회 직영 사업을 통해 청장년의 일자리 마련, 노후생활 보장 등의 꿈과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3.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교회(롬14: 17)
정의롭고(선행에 힘쓰고), 근심, 걱정, 두려움이 없고(기도에 힘쓰고), 기쁨과 찬송이 넘치는 교회
4. 하나님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마22:37- 39)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이러한 꿈과 비전이 있는 교회를 개척하고자 합니다. 연락바랍니다.

하나 교회 한 태 완 목사
전화: 010-7676-3049, 자택: (02) 959-3049
홈페이지: http://comesee.ce.ro, allcome.wo.to
이메일: jesuskore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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