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교회로 돌아갑시다(3)

복음............... 조회 수 391 추천 수 0 2005.07.04 13:2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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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교회로 돌아갑시다(3)

본문: 행2:42- 47

초대교회 당시 설교자였던 베드로는 '교제'라는 주제조차 언급하지 아니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한 형제 자매라는 메시지였습니다. 하지만 그 설교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워졌습니다. 그의 설교는 그들로 하여금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지게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진정한 회심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복음 안에서 스스로 새 삶을 발견했고,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교제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져갔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의 뜨거운 성도의 교제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계속되어 갔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의 교제의 특징이 어떠했나를 먼저 살펴봅시다.

1. 말씀으로 된 교제였습니다.
스펄젼 목사는 초대교회의 목회자 베드로의 설교에 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결코 웅변적인 것이 아니었다. 또한 감정적인 호소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하고 평범한 진술이며, 진실하고 열정적인 호소였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영적 힘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담대한 복음증거는 예루살렘 청중들의 심령을 깨뜨렸고, 마음을 찔러 쪼개기까지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교제의 특징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증인된 사도들의 생생한 말씀의 가르침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사도들이 주님께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그들은 그대로 믿었습니다. 참 믿음 위에 그들의 교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바른 교제는 오직 바른 믿음 위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레몬에게 편지하기를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때에 너를 말함은 주예수와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몬 1:4-6)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확실한 믿음의 기초위에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되신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분이 진리가 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다시 살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길이요, 빛이 된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참된 만족과 기쁨을 주는 유일한 것은 오직 진리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주는 유일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참된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씀이 없으면 어떠한 깨달음도 변화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에 기초하지 않는 믿음은 외형적으로 아무리 열정적이고 뛰어날지라도 결국 뿌리가 없는 믿음이요, 물거품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에 기초한 뜨거운 신앙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2. 기도로 불붙은 교제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무엇보다 기도에 전심전력했습니다. 이 간곡한 기도운동은 교회의 부흥을 가속화 시켰습니다. 그들은 외적인 핍박 때문에 하나가 되어 모이기를 힘쓰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기도하러 모였을 때 교제가 이루어졌고, 서로 기도 제목을 나누면서 서로를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본문의 기도라는 말은 Hela어로 복수형입니다. 그것은 여러 형태의 기도와 많은 기도가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곧 개인기도를 비롯하여 합심기도, 금식기도, 철야기도 같은 것입니다. 사실 초대교회의 탄생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문도의 뜨거운 기도의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기도로 성장해갔습니다.
오늘의 현대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은 이러한 기도의 모임이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열심이 식어버린 곳에서 뜨거운 교제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나눔이 있고, 행복이 있어 보이는 모임과 교제라 할지라도 기도 없는 교제는 죽은 교제, 죽음의 교제라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실존의 문제를 도외시한 쾌락의 교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세상과 같이 먹고 마시는 모임이 아닐지라도 성도간에 뜨거운 기도를 위한 모임을 가질 때 거기에 생명이 있고,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고, 피를 나눈 형제애를 능가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병이 들고 가정에 문제가 생겼을 때 심방해서 기도해주고, 교회에 함께 모여 간절히 문제해결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성도들이 사랑을 느끼고 감사와 감격을 주는 교제가 아닐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물질에 취해 기도의 소중함을 잊고 살아오지 아니했습니까? 성도간의 진정한 교제와 만남을 위해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외면하고 살아왔는가? 우리는 지금이라도 기도의 전통을 회복하자. 기도로써 성도들의 사랑의 교제에 불을 붙입시다.

3. 사랑으로 하나된 교제였습니다.
톨스토이는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 그시간부터 우리 생활의 본원이 되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구체적으로 역사하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랑으로 교제했습니다. 그들의 교제는 단순히 사교적인 교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재물을 아끼지 않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자기 희생적인 사랑의 교제를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불신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초대교회는 한마디로 사랑으로 교제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에게는 형제애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교회는 참된 교제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교제의 방법은 주님의 명령을 따라 서로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성찬이 기본이었습니다. 아울러 함께 식사를 나누며 애찬도 종종 곁들여졌습니다. 또한 교회의 일에 대한 공동사역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교인을 위해 부조헌금도 있었습니다. 참으로 세상의 그 어느 집단이나 단체에서 찾아볼 수 없는 영육간의 뜨거운 교제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한 형제자매라는 '가족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되게 하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내것과 네것의 구별이 없이 상호 필요에 따라 물건을 나누어 가지는 이른바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이같은 현상은 천국에서 이루어질 성도들의 이상적인 삶을 보여준 그림자였습니다. 이같은 유무상통의 삶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어난 한시적인 현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이러한 삶은 오늘날에도 부분적으로 또는 다른 형태로 이루어져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이 말과 혀로만 한 형제자매라고 외칠것이 아니라, 사랑과 행함과 나눔의 실천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렇게 나눔의 교제를 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안에서 그 사랑을 확증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한이 없고, 진실합니다.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희생해 주시는 놀라운 사랑입니다.
요한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요일 3:16)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사랑까지도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교회에 나와서 사랑을 받기만 원하기 때문에 교회가 사랑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진정한 성도의 교제는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면서 믿음의 기초 위에서 교제가 이루어졌습니다. 열심히 기도에 전념함으로 그들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 가슴으로 교제했습니다. 자기 희생적인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때 진정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이웃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에는 초대교회는 어떠했는가를 설펴봅시다.
1. 사람마다 두려워하였습니다.
당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초대 교회 성도들을 얕잡아 보거나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이제까지 비방과 조롱을 일삼던 자들이 오히려 성도들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43절) 두려워하였다는 것은 무섭다는 의미의 두려움이 아닌 경외심에서 나오는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은 그들이 보거나 듣지도 못했던 일들이 자기들의 눈앞에서 일어나는 실질적인 현상들로 인하여 생겨진 것입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내용은 그 다음 구절들의 모든 것을 다 포함한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특히 사도들을 통하여 일어나는 기사와 표적은 능히 그들에게 놀라움과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2.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43절).
사도들에게서 나타나는 기사와 표적은 그들의 사도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서 일어나는 표증입니다. 이 표증들은 성령의 역사로 주어지는 것으로 세상의 그릇된 사단의 세력의 영에 사로잡혀 나타나는 그것들과 전혀 다른 것으로, 사도들에게서 나타나는 기사와 이적은 성령에 사로잡힌 사도들에게 부활의 주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보여주기 위하여 일어나는 특별한 현상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 곧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당대의 사도들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12절에서 말하기를,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함이라."라고 했습니다.

3. 그들은 주안에서의 ‘한 몸 사상’을 가지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44-47절)
(1)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 이것은 초대교회의 하나됨, 곧 통일성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귀중한 것입니다. 이들은 가정을 버리거나 만사를 제쳐두고 모여서 공동체 생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서로를 세워주면서 하나가 되어 주님의 일을 위하여 모인 것입니다.
(2)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습니다.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3) 각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 "각 사람의 재산을 팔아서"라는 구절이 주는 의미는 그들의 영적 일체감이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한 몸을 이루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이미 주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영적인 깊은 이해와 자기 발전적 신앙사상에서 나온 것이며, 자기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한 몸을 이루는 모든 지체들을 돌보고자 하는 공동체적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 기독교인들이 깨닫고 배워야 할 너무나 귀중한 본보기입니다. 우리는 주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지체인지라, 영적으로 하나면 육적인 필요도 채워주기 위하여 주변의 성도를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부유한 성도는 가난한 성도를 찾아 섬기고, 경제적으로 조금이라도 안정적이고 여력이 있는 교회는 교단이나 교파와 관계없이 이웃의 작은 개척교회들을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4) 성찬과 애찬을 했습니다. - 이들은 어느 한 집을 선택하여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며 음식을 먹으며 교제를 나누었으며, 이 애찬에는 주님을 기억하여 기념하는 성찬이 따랐습니다.

4. 그들은 말씀을 사모하고 예배에 힘썼습니다.(46절)
초대교회는 성전에 모여서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찬미하는 예배가 매일 있었습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17:11)
(1)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 이들이 모임의 장소가 없어서 성전에 모인 것이 아닙니다. 또한 유대인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성전에 모인 것도 아닙니다. 전통적인 유대인들과 논쟁하기 위하여 모이는 것도 아닙니다. 이들은 성전에 나오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으며, 찬양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관습에 따라 습관적으로 모였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에 감동되고 이끌리어 자발적으로 모였습니다.
(2) 성도가 모여 기도에 힘썼습니다. - 초대교회 성도들은 무엇보다 기도에 전심전력했습니다. 이 간곡한 기도운동은 교회의 부흥을 가속화 시켰습니다. 그들은 외적인 핍박 때문에 하나가 되어 모이기를 힘쓰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기도하러 모였을 때 교제가 이루어졌고, 서로 기도 제목을 나누면서 서로를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본문의 기도라는 말은 헬라어로 복수형입니다. 그것은 여러 형태의 기도와 많은 기도가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곧 개인기도를 비롯하여 합심기도, 금식기도, 철야기도 같은 것입니다. 사실 초대교회의 탄생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문도의 뜨거운 기도의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기도로 성장해갔습니다. 오늘의 현대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은 이러한 기도의 모임이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열심이 식어버린 곳에서 뜨거운 교제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나눔이 있고, 행복이 있어 보이는 모임과 교제라 할지라도 기도 없는 교제는 죽은 교제, 죽음의 교제라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실존의 문제를 도외시한 쾌락의 교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세상과 같이 먹고 마시는 모임이 아닐지라도 성도간에 뜨거운 기도를 위한 모임을 가질 때 거기에 생명이 있고,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고, 피를 나눈 형제애를 능가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병이 들고 가정에 문제가 생겼을 때 심방해서 기도해주고, 교회에 함께 모여 간절히 문제해결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성도들이 사랑을 느끼고 감사와 감격을 주는 교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물질에 취해 기도의 소중함을 잊고 살아오지 아니했습니까? 성도간의 진정한 교제와 만남을 위해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외면하고 살아왔는가? 우리는 지금이라도 기도의 전통을 회복하자. 기도로써 성도들의 사랑의 교제에 불을 붙입시다.
(3)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 하나님을 찬미함은 구원받은 자의 감격스런 기쁨에서 나오는 당연한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성경에 보면, 다윗의 삶 자체가 찬양이었고, 마리아(눅1:46-56)도, 사가랴(눅1:67-79)도, 시므온(눅2:29-32)도, 심지어는 최후의 만찬까지도 찬양으로 마침을 볼 수 있습니다.(마26:17-29,30) 하나님에 대한 은혜와 사랑에 대하여 찬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함께 하며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은혜를 더욱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 찬송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보통 주어진 시간에 하루 세끼를 먹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물질로 이루어진 우리 신체에 생물학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야 만이 인간이 살아갈 수 있고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시도 때도 없이 먹어대는 사람도 있습니다. 찬송은 언제 하는가요? 시도 때도 없이 해야 한다면 넌센스일까요? 사도바울은 옥중에서도 찬미하였다고 하는데 시간을 정해서 했겠습니까? 유대교는 제사를 정해진 시간에 드린다고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제사는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가 아니라 어느 때든지 드려야 합니다. 항상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인하는 성도들은 항상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찬미의 제사를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장 15절에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시146:1,2)

5.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이 부분이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성도가 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부분입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 살라는 주님의 명령과 같은 분부는 도무지 우리의 가슴에서 흐려진지 오래고, 지금은 오히려 세상사람의 비난의 대상이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요. 저는 목사로서 저 자신부터 자성하는 마음으로,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을 잠시 살펴보려 합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결코 적지 않은 교회들에서 목회자와 성도간의 갈등으로 서로가 너무나 많은 마음에 상처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의 원인에 대하여 단적으로 이것이다 말하기는 어려운 복합적인 요인들이 많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목회자의 바르지 못한 목회관과 그릇된 세속적인 욕심과 왜곡된 교회관 등으로 인하여 발생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이런 모습은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며 성도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신실한 목회자들과 이제 막 개척을 하면서 영적인 투쟁을 하는 초년 목회자들에게 힘을 잃게 만들고, 목회자를 존경하던 성도들의 가슴에 가시를 꽂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엄청난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을 성토하며 교회 밖에까지 알리며 떠드는 일도 또한 부끄러운 일입니다. 소리를 높여 외치는 자들의 심정은 이해가 되나, 그들 또한 자칫 옳은 것을 주장한다는 명목 아래 자기도 모르게 자기 의를 내세우게 되고 상대를 정죄하는 죄를 범하게 되며, 교계를 더욱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는 것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자신이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는 일에 참으로 자기의 모든 정열을 다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큰 교회로 성장시켰다고 자기 스스로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에 그가 그렇게 자기 공로를 생각한다면 그는 아주 큰 착각을 한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것이며, 주께서 부흥시킨 것입니다. 다만 그 목사는 주님의 도구로 성도를 섬기도록 보냄 받은 자에 불과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교회가 부흥되기까지는 성령의 역사가 있었으며, 성도들의 눈물과 피흘림이 있었음을 그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것은 사실상 그들 목사들도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향하여 성토해도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도 사랑한다고 강단에서 수 십 년 동안 외쳐대던 바로 그 성도들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가엾은 그 목회자와 그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그저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성도들 앞에서 자기의 허물을 스스로 들추어 용서를 비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를 존중히 여기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설교를 잘하고 심방을 잘하는 목회자보다 자기의 잘못을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쳐나가는 그런 목회자를 우리 주님과 성도들은 지금 필요로 여깁니다.
20세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전 세계적인 규모로 그리고 생활의 각 분야에 걸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혁명적 변화의 밑바탕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기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에 배반되는 어려운 문제가 많이 생기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자면 결국 신자는 신앙과 생활 두 가지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딜레머에 빠지게 됩니다. 즉 자기 직장과 가정에 충실하자면 하나님의 진정한 뜻 즉 전심의 신앙생활은 버려야 되고, 진정한 신앙 생활을 하자면 사회 속에서 부 적응증을 일으키게 되어 소외를 당하고 맙니다. 특히 직업적인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현대는 점점 고도화되고 분업화됨에 따라 자기 직분에 대한 전문가가 되지 않으면 생존 경쟁의 사회에서 살아나가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즉 전문가가 되어야 하며 전문가가 되려면 남보다 곱절 수고하고 노력하며 전심을 기울여야 하는 세대가 된 것입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의 계율을 버려야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적당히 수양 삼아 일주일에 한두 번 교회에 얼굴이나 비치고 헌금이나 몇 푼 하면 다 되는 줄로 생각해서는 결코 바른 신앙생활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런 행위는 외식자의 행위입니다. 몸과 마음을 다해 전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되겠습니까?
일부교회에서는 하나님께 충성을 강요하면서 아울러 세상일도 충성을 다 하라는 이율배반적인 모순된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떻게 두 가지 다 충성할 수 있겠습니까? 두 마음을 품는 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이 있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살아야만 될까요? 그래서 전 세계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하고 연구하였으나 올바른 해답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그 해답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듣고 눈 있는 자는 보라고 지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히10:24) 하셨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에서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이러므로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루아침에 모든 믿는 자가 다 이와 같이 행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외로운 나그네 같은 독신으로 믿는 자가 먼저 주님의 장막 가운데로 들어가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족과 생활에 얽매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주님께서 부르실 때 응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딤후2:4)
오래 전에 다윗은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는 자를 복 있다 했으며,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노래하였습니다.(시133:1)
"우는 자들과 같이 울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마가의 다락방의 오순절 역사 등은 함께 모여 같이 사는 공동생활의 기초적 삶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초대교회가 마음을 같이 하고 열심히 모여 떡을 떼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오늘의 한국 교회가 우리의 현실에서 배워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봅니다. 우리는 주안에서 한 형제입니다. 남남이 아닙니다. 한 형제는 부모의 보호 아래서 지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아래 함께 동거동락하며 살아야 할 줄 압니다. 이스라엘의 기브츠나 김용기 장로의 가나안 농군학교, 김진홍 목사의 두레마을 그리고 대천덕 신부의 예수원 등은 하나님 중심의 생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힘은 연합에 있습니다. 제각기 분리된 몸은 시체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즉 몸의 지체가 각자 자기를 주장한다면 어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공동체를 이루여 연합하여 동거하는 길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방인일지라도 하나님께 열심 있는 자에게는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성도가 하나님께 전심하며 살 수 있는 방법이 연합하여 동거하지 않더라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전심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이 또한 바람직한 것입니다. 여하튼 우리는 오순절 다락방 초대교회에서 처럼 성령의 불길이 일어나도록 모든 믿는 형제가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을 향한 전심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모든 방법과 강구를 다해야 하겠습니다. 인간이 모든 지혜 또 힘을 모아서 주님의 교회를 하나로 만들지 못하나, 주 예수님 말씀 따라 주안에 있으면 우리 다 하나 되어서 한 몸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강대국의 압제와 전쟁의 고난을 기도로 극복해 가면서 성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 가보아도 한국이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 지금에 와서 한국교회는 말로만 사랑하는 자기기만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지막 시대의 제사장 나라보다는 오히려 선한 사마리아인의 나라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실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
초대교회와 같이 예배와 기도에 힘쓰고, 나눔과 교제가 풍성한 교회, 주님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교회 (마22:37-39, 신6:5, 요15:12, 롬13:10)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과연 초대 교회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그저 주일마다 교회 문턱을 밟고 다닌다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를 초대 교회와 같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또한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교회로 만들 때, 진정 교회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배워 믿음의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합니다. 둘째, 항상 열심히 기도에 전념해야 합니다. 셋째 자기 희생적인 뜨거운 사랑과 교제를 나눠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초대 교회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초대 교회와 같은 교회 및 성도가 되어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누리게 되길 축원합니다.
* 기도: 사랑하는 하나님, 오늘날 많은 교회가 세속화되고 타락하였습니다. 한국 교회가 초대교회와 같이 칭찬 받는 교회, 성령충만한 교회로 돌아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죽도록 충성, 헌신, 봉사하게 하옵소서. 존귀하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 2부: 분반(구역)공부 자료

1. 말씀: 초대교회의 고난과 승리

AD 313년 로마의 코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이후 천주교가 부패하고 타락하여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듯이 오늘날 개신교도 세월이 흘러 세속화되고 부패하였습니다. 따라서 옛날 초대교회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많은 환난과 고난을 겪었지만 오늘날 교회가 배워야 할 모범적인 교회입니다. No cross, No crown 이란 말이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왕관도 없다는 말입니다. 고난이 없이는 영광도 없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생활에 가장 필수적인 과정은 고난이라는 터널입니다. 고난을 격지 않고는 신앙의 성숙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 사건은 분명히 축복의 사건이지만 축복의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고난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진행하는 교회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면 항상 그러하듯이 사탄의 방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사탄의 방해 앞에서도 굴복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기도로 성령의 사건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사탄의 방해 앞에 초대교회가 어떻게 승리했는가를 배워 나의 신앙의 삶과 우리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하여야 하겠습니다.

2. 묵상 및 토의
0 우리 교회는 초대 교회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가?
0 나의 교회는 구원의 방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0 우리 교회의 자랑은 무엇인가 이야기 해보세요.
0 우리 교회가 초대교회와 같거나 닮을 점이 무엇인지 이야기해보세요.
0 우리 교회가 앞으로 초대교회의 어떤 점을 배우고 본받아야 하는지 말해보세요.
0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느낀 점이나 앞으로의 나의 결심, 각오, 다짐 등을 이야기 해보세요

3. 예화: 물 (H2O)

물은 거의 생명의 대명사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를 생명의 물이라고 표현한 것은 가장 적절한 표현입니다. 피의 90%. 뇌의 80%, 살의 75%, 뼈의 25%는 물입니다. 물은 체온을 조절하고 비타민과 금속류를 운반하고 배설물을 처리합니다. 굶어서는 여러 날 살 수 있지만 물을 안마시면 죽습니다. 화학부문에서 노벨상을 받은 데비 (Peter Debye)박사는 "인류는 백년 이상 물을 H2O라고 불러왔지만, 이 신비한 물에 대하여 지금 겨우 알기를 시작한 것뿐이다"로 말하였습니다. 지구 표면의 4분의 3이 물로 덮여 있고 생명의 기원이 물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진화학설도 있지만, 실제로 인간이 거의 물로 형성된 어머니의 태 속에서 9개월을 성장하다가 세상에 태어나 평균 수명을 살 경우 약 6천5백 갤론의 물을 마시다가 죽는 것이므로, 인간은 물에서 태어나 물의 덕분으로 살다가 죽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활동한 2천년전의 팔레스틴 지방은 몹시 물이 귀했던 곳으로서 "나는 영원히 솟아나는 물이다"고 예수님이 말한 것은 당시 사람들이 들을 때는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비유였습니다. 기원 200년대의 초대 신학자인 터툴리안(Tertullian)은 이렇게 신앙생활을 설명하였습니다.
"우리는 물고기와 같다. 물고기는 언제나 물 속에 있어야 살 수 있으며 활동도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물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다"
초대교회는 기독교의 심볼(상징)로서 물고기의 상징을 썼다. 희랍어로 물고기를 익투스(Ichthus) 라고 하는 데, 그것은 Iesous Christos Theou Uios Soter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시다"의 머릿말들을 모은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란 바로 이 말을 고백하는 자라는 뜻에서 Ichthus(생선)을 교회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4. 찬송: (242장) 교회의 참된 터는

1. 교회의 참된 터는 우리 주 예수라 그 귀한 말씀 위에 이 교회 세웠네 주 예수 강림하사 피흘려 샀으니 땅위의 모든 교회 주님의 신부라
2. 온세계 모든 교회 한몸을 이루어 한 주님 섬기면서 한 믿음 가지네 한 이름 찬송하고 한 성경 읽으며 다 같은 소망 품고 늘 은혜 받도다
3. 땅 위의 모든 교회 주 안에 있어서 하늘의 성도들과 한몸을 이루네 오 주여 복을 주사 저 성도들같이 우리도 주와 함께 늘 살게 합소서 아멘

5. 성경연구:

가. 초대 교회에서 매일 일어난 일
1) 교인들의 증가(행2:47)
2) 교회들의 증가(행16:5)
3) 성경을 묵상하는 자들의 수의 증가(행17:11)

나. 초대 교회의 특성
1) 그리스도께서 분부하신 것을 지키게 함(마28:20)
2) 성도의 교제에 힘씀(행2:42, 요일1:3, 요일1:6,7)
3) 공동생활을 함(행2:44, 행2:46, 행20:7)
4) 재산의 공동소유(행2:45, 행4:32)
5) 사도회의를 함(행15:1,2, 행15:6)
6) 사도들이 강론함(행20:7)
7) 직제를 둠(행11:30,빌1:1, 딤전3:10)
8) 자발적 공동체(행5:4)
9) 박해가 가해짐(눅21:12, 행9:29, 계2:10)
10) 이단 사상이 침투함(행15:24, 고후11:4, 골2:8)

* 오늘날 타락하고 훼파된 교회를 다시 재건합시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 성전재건(교회개혁)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학개는 성전재건을 미루면 무서운 삶의 시련이 닥칠 것을 예언했습니다.(학1:2-11) 주의 일에 전심코자 하는 형제여 함께 모입시다. 내가 하는 일을 당신은 할 수 없고, 당신이 하는 일을 나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힘을 합하면 하나님을 위해 아름다운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은 물방울처럼 모여 예수의 큰 강을 이룹시다. 새 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합니다.(마9:17, 눅5:37-38)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을 따라 기드온의 300명 용사(삿7장)처럼 교회개혁의 횃불을 높이들 성도여 모입시다.

하나교회의 비전
1. 365일 예배드리는 교회(히10: 25, 행17:11)
오늘날 죄악이 만연한 세상에서 매일 말씀을 읽고, 듣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말씀의 거울을 통해 매일 마음을 바르고 깨끗이 하여서 예수와 복음을 위해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막8:35)
2. 더불어 사는 공동체 (행2:42- 47)
하나님은 영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육신까지도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천국에 대한 소망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교회는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안에서 한 가족이 되고, 교회 직영 사업을 통해 청장년의 일자리 마련, 노후생활 보장 등의 꿈과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3.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교회(롬14: 17)
정의롭고(선행에 힘쓰고), 근심, 걱정, 두려움이 없고(기도에 힘쓰고), 기쁨과 찬송이 넘치는 교회
4. 하나님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마22:37- 39)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이러한 꿈과 비전이 있는 교회를 개척하고자 합니다. 연락바랍니다.

하나 교회 한 태 완 목사
전화: 010-7676-3049, 자택: (02) 959-3049
홈페이지: http://je333.ce.ro, comesee.ce.ro
이메일: jesuskore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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