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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맡은 청지기
본 문 : 베드로전서 4 : 7 ∼ 11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되려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히포크라테스 선서' 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의사가 될 때 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다함께 하고 의사가 됩니다. 그 내용 중에 둘째 항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의 은사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의사는, 모름지기 의사라고 하는 직(職)이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직이라고 생각을 하고, 이 환자를 돌보는 일보다 더 고귀한 일은 없다고 생각을 하고, 그 고귀한 일을 내게 맡겨 주신 거에 대하여 내가 맡게 되는 데 대해서 감사하고, 존경과 감사를 항상 지니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의사입니다. 의사의 입장에서는 사람을 돌보고 병을 치료하는 이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나 또한 이런 일에 쓰여진다고 하는 것이 자랑스럽고 고귀하고 영광된 것입니다. 그것이 의사입니다. 만일에 의사가 환자를 돌보고 이거 외에 일을 더 좋게 생각을 하고, 돈 많이 버는 직업을 좋게 생각하고, 권세를 누리는 것을 더 좋게 생각을 하고 여기저기 넘보고 있다면 그건 의사답지 못합니다. 아니, 그건 의사가 아닙니다.
인간은 생일이 둘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생리학적 생일입니다. 여러분이 가지는 생년월일이라고 하는 것,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바로 그날 그 시가 여러분의 생일이 될 것입니다 마는, 두 번째 생일은 나의 존재의 이유와 생이 주어진 목적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나는 왜 세상에 존재하나, 나는 무엇을 위하여 이 땅에 보냄을 받았는가, 그 의미를 깨닫는 바로 그날이 두 번째 생일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두 번째 생일을 맞지 못하고 엄격히 말하면 사람다운 생을 출발도 못하고 끝나는 그러한 유감된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그 섭리를 믿습니다. 그 거룩한 경륜 속에 내가 태어난 것이올시다. 역사와 나의 개인적 관계를 믿습니다. 이 큰 역사 속에 나라고 하는 작은 존재가 꼭 필요합니다.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우리는 태어났습니다. 그런 고로 여기에 사명이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여기까지 살아왔습니다. 뭐 이런 고생도 하고 저런 일도 있었고 실패와 성공, 배신과 저신뢰,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러분 어찌 생각하십니까? 그게 버려진 과거입니까? 잘못된 과거입니까? 적어도 소명을 아는 사람은 바로 이 시간을 위하여 지난날이 있었다는 거예요.
모세가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듣는 순간 그는 지난날의 80년의 생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왜 바로의 궁전에서 40년을 살았는가? 왜 광야에서 40년을 목자생활을 했는가? 이 모든 것이 합쳐서 오늘을 위하여 오늘과 내일을 위해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거기서부터 나라고 하는 존재의 새로운 생이 출발되는 것이올시다.
여러분,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은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생은 주어진 생입니다. 나의 생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나게 해서 내가 태어난 것일 뿐이지 내가 아버지 어머니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 시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는 주어진 생을 철학가의 말대로는 던져진 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각각 주어진 은사가 있습니다. 여기 소명이 있고 사명이 있는 겁니다. 무엇인가 할 수 있도록, 무엇인가를 해야만 되도록 은혜의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위하여 주께서는 많은 은사를 은혜의 선물을 주셨던 겁니다. 오늘 본문에는 은혜를 맡은 청지기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오이코노모스, 청지기라는 말은 옛날 번역에는 집사라고 번역을 합니다. 이 집사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타율성이 있고 자율성이 있습니다. 집사가 하는 모든 일은 다 주인을 위한 겁니다. 주인이 있어서 내가 있고 내가 주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주인이 맡겨 준 것이 있습니다. 요만큼의 영역을. 재산도 심지어는 하인도 혹은 어떤 권력을 맡겨주었습니다. 그 한계 안에서는 자율적입니다. 그는 자유입니다. 자기의 책임을 자율적으로 감당해야됩니다. 이게 청지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었습니다.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가 곧 이제는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고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가 오늘은 소중한 결실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맡은 청지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서로' 라고 하는 말이 세 번 있습니다. 서로! 서로 서로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서로'라고 하는 관계는 이것이 서로 하나의 큰 계약적 관계요 인간적 관계요 행적관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의 수직적 관계의 결과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내가 너희를 사랑했노라. 그런 고로 서로 사랑하라."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엄청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고로 서로 사랑해야 됩니다. 우리의 사랑은 원인이 아닙니다. 결과일 뿐입니다. 그 퍼스트 코잘리티, 첫 번 원인은 그에게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사랑했고 그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나를 구속하셨습니다. 그런고로 그 사랑의 근거해서 우리는 그 결과로 서로 사랑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받았다' 하는 것은 은혜요, '사랑하라' 하는 것은 바로 은사올시다. 서로 사랑하라.
오늘 본문에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 그 '열심히' 라는 말을 헬라 원문대로 좀 소개하고 싶습니다. '엑테네' 라고 하는 말인데요 이 말은 '잡아늘인다' 하는 뜻이에요. 그냥 보통 열심히 아니에요. 잡아늘인다. 고무줄이 있어요.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잡아늘여요. 스프링을 잡아늘여요. 이제 보세요. 경마로 쓰여지는 말, 그 말이 가지고있는 자기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을 극대화하려고 좋은 음식을 먹입니다. 잠을 재우고 훈련을 시키고 운동을 시키고 잘했다가 경마장에 나가는 날 이걸 타고 나갈 때 그 잘 달리는 말을 또 때립니다. 계속 때리면서 그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이에요. 그 능력을 잡아늘이는 것이에요. 여러분, 여러분의 사랑의 영역을 생각해 봅시다. 내가 얼마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까? 사랑의 영역, 사랑의 힘을 잡아 늘여!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구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허다한 죄를 덮어요. 죄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허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랑해야 되요. 여러분, 여러분 생애에 한번 이렇게 화끈하게 사랑해 본 때가 한번 있지 않아요? 한참 뜨겁게 사랑할 때, 정신없이 사랑할 때, 추운 것도 모르고 더운 것도 모르고, 뭐 작으면 작은 대로 좋고 크면 큰 대로 좋고, 실수하면 실수하는 대로 예쁘고, 그냥 무턱대고 마냥 좋기만 한 때가 있었지요? 없었어요? 그러면 불행한 거죠. 그래도 그렇게 한번 미쳐본 때가 있잖아요, 왜. 이게 바로 사랑이 잡아 늘여진 사랑이거든요. 그 순간에는 허물이란 없어요. 실수도 없어요. 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열심으로 사랑하는 거예요. 열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피곤함이 없어요. 허물이 보이질 않아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요. 그저 예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그거예요.
에리히 프롬(Erich Fromm) 이라고 하는 심리학자가 그 유명한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써서 우리 많은 사람들이 다 읽고 읽고 읽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디 아트 오브 러빙(The Art of Loving)'이라는 책인데요 거기서 사랑의 네 단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어린아이 같은 사랑. 어린아이는 사랑 받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사랑 받고 사랑하고, 그게 어린아이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 여러분 잘 위해주다가도요 잘 좋다고 하다가도 조금만 자기 비위에 안 맞으면 "아빠, 미워!" 그러잖아요. 아 그러면 정이 뚝 떨어져요. 어느 순간에 "엄마, 미워!" 막 그런다 말이예요. 왜요? 사랑 받고 사랑해야겠는데 받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이게 유치한 사랑이에요. 어린아이들은 그래요. 유치한 사람은 이렇습니다. 그런가하면 성숙한 사람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자기 사랑으로 상대방을 덮어요. 이유 없어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예요. 또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하는 논리가 있어요. 내게 필요하거든요. 혼자살기 힘드니깐 저거 하나 필요하거든요. 내가 혼자 살 수 없으니깐 저거하나 필요하거든요. 내가 필요해서 남을 사랑하는, 극히 율법적이고 계약적 이고 이렇죠. 아주 실리적이에요. 이런 사랑이 이젠 문제가 되죠. 이 에로스라는 거죠. 그런가 하면 성숙한 사람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가 내게 필요하다. 사랑의 대상으로 필요해요. 그가 나에게 어떻게 대하느냐는 상관이 없어요. 나는 너를 사랑함으로만 내 삶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 고로 네가 필요해요. 사랑의 대상이 없으면 내가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내가 아니니까 그래서 사랑합니다. 이게 성숙한 사랑이요.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
두 번째는 "서로 대접하라" 그랬어요. 대접한다는 말, '필록스세노이'라고 하는 헬라말을 조금 설명하고 싶습니다. 여기 '필로' 라는 말은 사랑이라고 하는 말이고, 여기 '세노이'라는 말은 행동을 말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것을 번역할 때 호스피탈리티(Hospotality) 라고 번역합니다. 말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대접하는 거예요. 음식도 대접하고 여러 가지로 잘, 내가 사랑하는 자가 필요한 부분을 내가 채워주는 거예요.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거죠. 이게 바로 대접이라는 것이죠. 행동적 사랑을 말합니다. 12세기의 수도사였던 꼴레르보 버나드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의 책 가운데 더 러브 오브 갓(The Love of God) 라고 하는 책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우리가 시험에 빠지고 유혹에 빠지는 수가 있다.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 첫째는 실망입니다. 여러분, 참사랑에는 실망이 없습니다. 어느 순간에라도 실망했다면 당신의 사랑은 거짓말이요 그건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에는 실망이 없습니다. 무한하게 무한한 미래를 바라봅니다. '대통령의 어머니들'이라고 하는 책이 있어요. 미국의 11대 대통령의 그를 대통령 되게 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어머니다 그거죠. 그 어머니들은 누구들이냐? 그 어머니 특징이 뭐냐? 그 세 가지로 말하는 중에 그런 말을 합니다. 그 어머니들은 낙심한 일이 없어요. 자식의 실수를 보면서도 절대로 실망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현실로 보여주었어요. 손님을 대접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고 자선사업을 하고, 그런 것들을 보여주었어요. 실천했어요. 그게 다른 점이에요. 사랑은 말이 아니에요. 절대로 사랑에는 실망이 없어요. 그런데 쉽게 실망하는 것, 그것은 바로 참사랑이 아니기 때문이요. 사랑에는 절대로 절망이나 실망이 없는 것이요. 또한 그 사랑은 사람들의 칭찬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 없어요. 누가 뭐라고 하든 말든 알아주든 말든 칭찬과는 상관이 없어요. 그 칭찬 받고자 하는 마음, 그게 병든 사랑이요. 사랑의 시험이요. 또 하나는 위선이에요. 사람의 형식만 남고 내용은 없어요. 명예를 좋아하고 야망을 가졌을 때 사랑은 위선으로 빠집니다. 또 하는 핑계올시다. 사랑에는 핑계가 없어요. 참사랑에는 핑계가 없어요. 하지 말아야 될 이유, 사랑할 수 없는 이유만 생각을 해요. 벌써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할 수 없는 이유는 없어요. 어떤 핑계도 없어요. 전적으로 바치는 것이에요. 그게 행동으로 나타나는 거야. 그래서 서로 대접하라. 특별히 오늘 본문에 원망 없이. 사랑의 행동에 무슨 원망이 있어요. 대접하는 일에 무슨 원망이 있어요. 원망 없이 서로 대접하라.
요새 유행어가 있습니다. 요새는 모든 것을 이렇게 전부 과학적으로 한다해서 소위 지수라는 말을 많이 써요. 평가지수, 여러분 한번 스스로 생각해봅시다. I.Q.라고 하는 지능지수, E.Q.라고 하는 감성지수, H.Q.라고 하는 유머지수라는 것이 있어요. 요새 유머가 좋아야 출세합니다. H.Q.라고 합니다. 그것보다 J.Q.라고요 잔재주 지수, 이거 좋은 거 아니에요. 그런가하면 O.Q., 오버커밍 쿼션트(Overcoming Quotient) 아주 중요한 얘기예요. 극복하는 지수, 어려운 일들을 넉넉히 극복하는 극복력 지수가 높아야 되요. 여기 까진데요. 제가 하나 더 생각해 보았어요. 그것은 S.Q. 봉사지수. 당신은 얼마나 봉사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얼마나 봉사하는 수준을 가지고 있습니까? 봉사하는 사람의 수준에 있느냐 그 말이에요. 봉사지수. 그래요 서로 대접하라. 여러분, 요새 우리는 이 대접하는 일이 점점 없어져가요. 자기밖에 몰라요. 정성을 다하여서 손님을 대접하고 낯선 분들을 대접하고 환자를 방문하고 하는 행동적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서로 봉사하라. 봉사하라 이거 디아코니아, 서비스를 말하는 거요. 요한복음 13장 14절에 보면,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겼다. 그런 고로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마땅하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어요. 그는 세상에 오실 때부터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섬기려하고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고 말씀하셨어요. 철저하게 그는 섬기는 자로 오셨고 섬김으로 끝을 냈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섬김을 받은 자로서 섬기는 자세로 살아갈 것이에요. 크라잉 벨이라고 하는 상담학자의 웰빙(Well Being) 이라고 하는 책에 보면 네 가지 힘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파워 오버(Power Over), 지배력! 파워 어겐스트(Power Against), 공격력! 파워 포(Power For), 베푸는 능력! 그리고 파워 위드(Power With), 협력하는 능력. 협력하는 능력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는 섬기는 마음이 있어야 돼요.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잔잔한 감동을 일으킨 책 중에 '눈물이 나올 만큼 좋은 이야기'라고 하는 작은 책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의 한 민간단체가 30년 동안 작은 친절 운동을 일으킨 이야기들을 써놓은 책입니다.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그 중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중소기업사장으로 있던 분이 사업에 실패했어요. 그래가지고 막막하게 되어서 57세나 된 사람이 이젠 맞벌이를 하게 되고 막노동을 하게 됩니다. 집 가까이서 할 수도 없어서 타향에 가서 저 막노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일하던 중에 점심시간이 되어서 점심을 먹으려고 골목을 골목으로 돌아서 좀 작은 집에 가서 싼 음식을 먹어야겠다 하고 갔는데 문을 딱 들어서고 보니까 안에는 그게 아니에요. '아차! 잘못 왔다. 이거 비싼 집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만큼 좋은 집이었어요. 그러나 왕년에 사장을 지내던 양반이라 다시 문닫고 돌아가기는 자존심이 허락지를 않아요. 그래 그냥 들어서 보니깐 점잖은 양반들이 넥타이를 메고 앉았는데 자기 옷이 초라하고 그 분위기에 도저히 어울리질 않아요. 너무 창피하고. 그래 저 구석에 가서 앉았어요. 그리고 몸 둘 바를 몰랐어요. 그런데 어떤 회사 여직원 같은 예쁜 아가씨 하나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물주전자를 가지고 와서 물 한 컵을 따라 주면서 "물 마시세요" 하고 빙그레 웃었어요. 이 사람은 그 시간 눈물이 솟아오르는 거예요. 그 고마움에 복 받쳐서 울었다는 거 아닙니까? 눈물이 나올 만큼 좋은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보니까 울지 않는데요 보니깐. 그 처지에서 생각해 보세요. 기가 막힌 것입니다.
우리의 선한 일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봉사를 우리의 섬김을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 우리가 살아갑니다. 인간의 성공은 은혜를 아는데 있고 은혜를 베푸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를 아는데 있고 은사를 따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고 대접하고 섬기는 삶이 최상의 가치를 사는 길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얼마를 가졌느냐가 아니에요. 얼마를 베풀었느냐. 당신은 얼마를 섬기며 살았느냐. 이걸 묻고 싶어요. 오늘 본문에는 특별히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 열심으로 사랑하라' 그랬어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습니다. 이제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열심으로 사랑하고 구체적으로 대접하고 서로서로 봉사하면 돼요. 거기서 우리의 삶의 마지막을 가장 아름답게 의미 있게 꽃피워가야 할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확실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주여, 열심으로 사랑하고 서로 대접하고 원망 없이 대접하고 또한 서로 봉사하는 그런 생으로 보다 더 높은 의미의 생을 이제는 살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곽선희 목사
예화포커스
목사이자 현직 고등학교 교사인 저자가 엮은 예화 백과사전이다. 추상적인 진리를 구체화하는 데 유용한 예화 중에서도 아주 감동적이고 신선하고 생동감 넘치는 것들을 가려 실었다. 이 예화집은 가정, 감사, 건강, 교육, 교회, 믿음, 소망, 사랑, 성공, 용서, 찬송, 효도, 행복 등 각 주제별(전 50권)로 되어 있으며, 성경말씀, 명언, 묵상자료 등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한 태 완 목사 편저, 좋은 땅 (전화:386-8660), 각 권 값3,800원
http://je333.ce.ro, http://truth.ye.ro
http://sermonhouse.ce.ro
본 문 : 베드로전서 4 : 7 ∼ 11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되려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히포크라테스 선서' 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의사가 될 때 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다함께 하고 의사가 됩니다. 그 내용 중에 둘째 항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의 은사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의사는, 모름지기 의사라고 하는 직(職)이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직이라고 생각을 하고, 이 환자를 돌보는 일보다 더 고귀한 일은 없다고 생각을 하고, 그 고귀한 일을 내게 맡겨 주신 거에 대하여 내가 맡게 되는 데 대해서 감사하고, 존경과 감사를 항상 지니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의사입니다. 의사의 입장에서는 사람을 돌보고 병을 치료하는 이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나 또한 이런 일에 쓰여진다고 하는 것이 자랑스럽고 고귀하고 영광된 것입니다. 그것이 의사입니다. 만일에 의사가 환자를 돌보고 이거 외에 일을 더 좋게 생각을 하고, 돈 많이 버는 직업을 좋게 생각하고, 권세를 누리는 것을 더 좋게 생각을 하고 여기저기 넘보고 있다면 그건 의사답지 못합니다. 아니, 그건 의사가 아닙니다.
인간은 생일이 둘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생리학적 생일입니다. 여러분이 가지는 생년월일이라고 하는 것,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바로 그날 그 시가 여러분의 생일이 될 것입니다 마는, 두 번째 생일은 나의 존재의 이유와 생이 주어진 목적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나는 왜 세상에 존재하나, 나는 무엇을 위하여 이 땅에 보냄을 받았는가, 그 의미를 깨닫는 바로 그날이 두 번째 생일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두 번째 생일을 맞지 못하고 엄격히 말하면 사람다운 생을 출발도 못하고 끝나는 그러한 유감된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그 섭리를 믿습니다. 그 거룩한 경륜 속에 내가 태어난 것이올시다. 역사와 나의 개인적 관계를 믿습니다. 이 큰 역사 속에 나라고 하는 작은 존재가 꼭 필요합니다.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우리는 태어났습니다. 그런 고로 여기에 사명이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여기까지 살아왔습니다. 뭐 이런 고생도 하고 저런 일도 있었고 실패와 성공, 배신과 저신뢰,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러분 어찌 생각하십니까? 그게 버려진 과거입니까? 잘못된 과거입니까? 적어도 소명을 아는 사람은 바로 이 시간을 위하여 지난날이 있었다는 거예요.
모세가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듣는 순간 그는 지난날의 80년의 생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왜 바로의 궁전에서 40년을 살았는가? 왜 광야에서 40년을 목자생활을 했는가? 이 모든 것이 합쳐서 오늘을 위하여 오늘과 내일을 위해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거기서부터 나라고 하는 존재의 새로운 생이 출발되는 것이올시다.
여러분,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은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생은 주어진 생입니다. 나의 생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나게 해서 내가 태어난 것일 뿐이지 내가 아버지 어머니를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 시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는 주어진 생을 철학가의 말대로는 던져진 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각각 주어진 은사가 있습니다. 여기 소명이 있고 사명이 있는 겁니다. 무엇인가 할 수 있도록, 무엇인가를 해야만 되도록 은혜의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위하여 주께서는 많은 은사를 은혜의 선물을 주셨던 겁니다. 오늘 본문에는 은혜를 맡은 청지기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오이코노모스, 청지기라는 말은 옛날 번역에는 집사라고 번역을 합니다. 이 집사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타율성이 있고 자율성이 있습니다. 집사가 하는 모든 일은 다 주인을 위한 겁니다. 주인이 있어서 내가 있고 내가 주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주인이 맡겨 준 것이 있습니다. 요만큼의 영역을. 재산도 심지어는 하인도 혹은 어떤 권력을 맡겨주었습니다. 그 한계 안에서는 자율적입니다. 그는 자유입니다. 자기의 책임을 자율적으로 감당해야됩니다. 이게 청지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었습니다.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가 곧 이제는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고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가 오늘은 소중한 결실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맡은 청지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서로' 라고 하는 말이 세 번 있습니다. 서로! 서로 서로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서로'라고 하는 관계는 이것이 서로 하나의 큰 계약적 관계요 인간적 관계요 행적관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의 수직적 관계의 결과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내가 너희를 사랑했노라. 그런 고로 서로 사랑하라."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엄청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고로 서로 사랑해야 됩니다. 우리의 사랑은 원인이 아닙니다. 결과일 뿐입니다. 그 퍼스트 코잘리티, 첫 번 원인은 그에게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사랑했고 그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나를 구속하셨습니다. 그런고로 그 사랑의 근거해서 우리는 그 결과로 서로 사랑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받았다' 하는 것은 은혜요, '사랑하라' 하는 것은 바로 은사올시다. 서로 사랑하라.
오늘 본문에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 그 '열심히' 라는 말을 헬라 원문대로 좀 소개하고 싶습니다. '엑테네' 라고 하는 말인데요 이 말은 '잡아늘인다' 하는 뜻이에요. 그냥 보통 열심히 아니에요. 잡아늘인다. 고무줄이 있어요.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잡아늘여요. 스프링을 잡아늘여요. 이제 보세요. 경마로 쓰여지는 말, 그 말이 가지고있는 자기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을 극대화하려고 좋은 음식을 먹입니다. 잠을 재우고 훈련을 시키고 운동을 시키고 잘했다가 경마장에 나가는 날 이걸 타고 나갈 때 그 잘 달리는 말을 또 때립니다. 계속 때리면서 그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이에요. 그 능력을 잡아늘이는 것이에요. 여러분, 여러분의 사랑의 영역을 생각해 봅시다. 내가 얼마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까? 사랑의 영역, 사랑의 힘을 잡아 늘여!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구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허다한 죄를 덮어요. 죄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허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랑해야 되요. 여러분, 여러분 생애에 한번 이렇게 화끈하게 사랑해 본 때가 한번 있지 않아요? 한참 뜨겁게 사랑할 때, 정신없이 사랑할 때, 추운 것도 모르고 더운 것도 모르고, 뭐 작으면 작은 대로 좋고 크면 큰 대로 좋고, 실수하면 실수하는 대로 예쁘고, 그냥 무턱대고 마냥 좋기만 한 때가 있었지요? 없었어요? 그러면 불행한 거죠. 그래도 그렇게 한번 미쳐본 때가 있잖아요, 왜. 이게 바로 사랑이 잡아 늘여진 사랑이거든요. 그 순간에는 허물이란 없어요. 실수도 없어요. 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열심으로 사랑하는 거예요. 열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피곤함이 없어요. 허물이 보이질 않아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요. 그저 예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그거예요.
에리히 프롬(Erich Fromm) 이라고 하는 심리학자가 그 유명한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을 써서 우리 많은 사람들이 다 읽고 읽고 읽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디 아트 오브 러빙(The Art of Loving)'이라는 책인데요 거기서 사랑의 네 단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어린아이 같은 사랑. 어린아이는 사랑 받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사랑 받고 사랑하고, 그게 어린아이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 여러분 잘 위해주다가도요 잘 좋다고 하다가도 조금만 자기 비위에 안 맞으면 "아빠, 미워!" 그러잖아요. 아 그러면 정이 뚝 떨어져요. 어느 순간에 "엄마, 미워!" 막 그런다 말이예요. 왜요? 사랑 받고 사랑해야겠는데 받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이게 유치한 사랑이에요. 어린아이들은 그래요. 유치한 사람은 이렇습니다. 그런가하면 성숙한 사람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자기 사랑으로 상대방을 덮어요. 이유 없어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예요. 또 성숙하지 못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하는 논리가 있어요. 내게 필요하거든요. 혼자살기 힘드니깐 저거 하나 필요하거든요. 내가 혼자 살 수 없으니깐 저거하나 필요하거든요. 내가 필요해서 남을 사랑하는, 극히 율법적이고 계약적 이고 이렇죠. 아주 실리적이에요. 이런 사랑이 이젠 문제가 되죠. 이 에로스라는 거죠. 그런가 하면 성숙한 사람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가 내게 필요하다. 사랑의 대상으로 필요해요. 그가 나에게 어떻게 대하느냐는 상관이 없어요. 나는 너를 사랑함으로만 내 삶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 고로 네가 필요해요. 사랑의 대상이 없으면 내가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내가 아니니까 그래서 사랑합니다. 이게 성숙한 사랑이요.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
두 번째는 "서로 대접하라" 그랬어요. 대접한다는 말, '필록스세노이'라고 하는 헬라말을 조금 설명하고 싶습니다. 여기 '필로' 라는 말은 사랑이라고 하는 말이고, 여기 '세노이'라는 말은 행동을 말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것을 번역할 때 호스피탈리티(Hospotality) 라고 번역합니다. 말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대접하는 거예요. 음식도 대접하고 여러 가지로 잘, 내가 사랑하는 자가 필요한 부분을 내가 채워주는 거예요.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거죠. 이게 바로 대접이라는 것이죠. 행동적 사랑을 말합니다. 12세기의 수도사였던 꼴레르보 버나드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의 책 가운데 더 러브 오브 갓(The Love of God) 라고 하는 책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우리가 시험에 빠지고 유혹에 빠지는 수가 있다.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 첫째는 실망입니다. 여러분, 참사랑에는 실망이 없습니다. 어느 순간에라도 실망했다면 당신의 사랑은 거짓말이요 그건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에는 실망이 없습니다. 무한하게 무한한 미래를 바라봅니다. '대통령의 어머니들'이라고 하는 책이 있어요. 미국의 11대 대통령의 그를 대통령 되게 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어머니다 그거죠. 그 어머니들은 누구들이냐? 그 어머니 특징이 뭐냐? 그 세 가지로 말하는 중에 그런 말을 합니다. 그 어머니들은 낙심한 일이 없어요. 자식의 실수를 보면서도 절대로 실망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현실로 보여주었어요. 손님을 대접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고 자선사업을 하고, 그런 것들을 보여주었어요. 실천했어요. 그게 다른 점이에요. 사랑은 말이 아니에요. 절대로 사랑에는 실망이 없어요. 그런데 쉽게 실망하는 것, 그것은 바로 참사랑이 아니기 때문이요. 사랑에는 절대로 절망이나 실망이 없는 것이요. 또한 그 사랑은 사람들의 칭찬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 없어요. 누가 뭐라고 하든 말든 알아주든 말든 칭찬과는 상관이 없어요. 그 칭찬 받고자 하는 마음, 그게 병든 사랑이요. 사랑의 시험이요. 또 하나는 위선이에요. 사람의 형식만 남고 내용은 없어요. 명예를 좋아하고 야망을 가졌을 때 사랑은 위선으로 빠집니다. 또 하는 핑계올시다. 사랑에는 핑계가 없어요. 참사랑에는 핑계가 없어요. 하지 말아야 될 이유, 사랑할 수 없는 이유만 생각을 해요. 벌써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할 수 없는 이유는 없어요. 어떤 핑계도 없어요. 전적으로 바치는 것이에요. 그게 행동으로 나타나는 거야. 그래서 서로 대접하라. 특별히 오늘 본문에 원망 없이. 사랑의 행동에 무슨 원망이 있어요. 대접하는 일에 무슨 원망이 있어요. 원망 없이 서로 대접하라.
요새 유행어가 있습니다. 요새는 모든 것을 이렇게 전부 과학적으로 한다해서 소위 지수라는 말을 많이 써요. 평가지수, 여러분 한번 스스로 생각해봅시다. I.Q.라고 하는 지능지수, E.Q.라고 하는 감성지수, H.Q.라고 하는 유머지수라는 것이 있어요. 요새 유머가 좋아야 출세합니다. H.Q.라고 합니다. 그것보다 J.Q.라고요 잔재주 지수, 이거 좋은 거 아니에요. 그런가하면 O.Q., 오버커밍 쿼션트(Overcoming Quotient) 아주 중요한 얘기예요. 극복하는 지수, 어려운 일들을 넉넉히 극복하는 극복력 지수가 높아야 되요. 여기 까진데요. 제가 하나 더 생각해 보았어요. 그것은 S.Q. 봉사지수. 당신은 얼마나 봉사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얼마나 봉사하는 수준을 가지고 있습니까? 봉사하는 사람의 수준에 있느냐 그 말이에요. 봉사지수. 그래요 서로 대접하라. 여러분, 요새 우리는 이 대접하는 일이 점점 없어져가요. 자기밖에 몰라요. 정성을 다하여서 손님을 대접하고 낯선 분들을 대접하고 환자를 방문하고 하는 행동적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서로 봉사하라. 봉사하라 이거 디아코니아, 서비스를 말하는 거요. 요한복음 13장 14절에 보면,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겼다. 그런 고로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마땅하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어요. 그는 세상에 오실 때부터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섬기려하고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고 말씀하셨어요. 철저하게 그는 섬기는 자로 오셨고 섬김으로 끝을 냈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섬김을 받은 자로서 섬기는 자세로 살아갈 것이에요. 크라잉 벨이라고 하는 상담학자의 웰빙(Well Being) 이라고 하는 책에 보면 네 가지 힘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파워 오버(Power Over), 지배력! 파워 어겐스트(Power Against), 공격력! 파워 포(Power For), 베푸는 능력! 그리고 파워 위드(Power With), 협력하는 능력. 협력하는 능력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는 섬기는 마음이 있어야 돼요.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잔잔한 감동을 일으킨 책 중에 '눈물이 나올 만큼 좋은 이야기'라고 하는 작은 책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의 한 민간단체가 30년 동안 작은 친절 운동을 일으킨 이야기들을 써놓은 책입니다.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그 중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중소기업사장으로 있던 분이 사업에 실패했어요. 그래가지고 막막하게 되어서 57세나 된 사람이 이젠 맞벌이를 하게 되고 막노동을 하게 됩니다. 집 가까이서 할 수도 없어서 타향에 가서 저 막노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일하던 중에 점심시간이 되어서 점심을 먹으려고 골목을 골목으로 돌아서 좀 작은 집에 가서 싼 음식을 먹어야겠다 하고 갔는데 문을 딱 들어서고 보니까 안에는 그게 아니에요. '아차! 잘못 왔다. 이거 비싼 집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만큼 좋은 집이었어요. 그러나 왕년에 사장을 지내던 양반이라 다시 문닫고 돌아가기는 자존심이 허락지를 않아요. 그래 그냥 들어서 보니깐 점잖은 양반들이 넥타이를 메고 앉았는데 자기 옷이 초라하고 그 분위기에 도저히 어울리질 않아요. 너무 창피하고. 그래 저 구석에 가서 앉았어요. 그리고 몸 둘 바를 몰랐어요. 그런데 어떤 회사 여직원 같은 예쁜 아가씨 하나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물주전자를 가지고 와서 물 한 컵을 따라 주면서 "물 마시세요" 하고 빙그레 웃었어요. 이 사람은 그 시간 눈물이 솟아오르는 거예요. 그 고마움에 복 받쳐서 울었다는 거 아닙니까? 눈물이 나올 만큼 좋은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보니까 울지 않는데요 보니깐. 그 처지에서 생각해 보세요. 기가 막힌 것입니다.
우리의 선한 일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봉사를 우리의 섬김을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 우리가 살아갑니다. 인간의 성공은 은혜를 아는데 있고 은혜를 베푸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를 아는데 있고 은사를 따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고 대접하고 섬기는 삶이 최상의 가치를 사는 길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얼마를 가졌느냐가 아니에요. 얼마를 베풀었느냐. 당신은 얼마를 섬기며 살았느냐. 이걸 묻고 싶어요. 오늘 본문에는 특별히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 열심으로 사랑하라' 그랬어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습니다. 이제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열심으로 사랑하고 구체적으로 대접하고 서로서로 봉사하면 돼요. 거기서 우리의 삶의 마지막을 가장 아름답게 의미 있게 꽃피워가야 할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확실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주여, 열심으로 사랑하고 서로 대접하고 원망 없이 대접하고 또한 서로 봉사하는 그런 생으로 보다 더 높은 의미의 생을 이제는 살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곽선희 목사
예화포커스
목사이자 현직 고등학교 교사인 저자가 엮은 예화 백과사전이다. 추상적인 진리를 구체화하는 데 유용한 예화 중에서도 아주 감동적이고 신선하고 생동감 넘치는 것들을 가려 실었다. 이 예화집은 가정, 감사, 건강, 교육, 교회, 믿음, 소망, 사랑, 성공, 용서, 찬송, 효도, 행복 등 각 주제별(전 50권)로 되어 있으며, 성경말씀, 명언, 묵상자료 등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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