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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것과 쓴것의 조화
본문: 요한계시록 10장10절, 이사야 45장7절
여러 해 전에 제가 미국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하는데 치과 의사네 집에 숙식하면서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치과 의사가 하는 말이 자기 아이들은 초콜렛을 한 번도 먹이지 않고 사탕은 집안에 들여오지 못하게 한답니다. 그 이유는 이빨을 상하게 하고 썩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단 것만 자꾸 먹으면 이빨도 상하고 당뇨도 생기기 쉽고 건강에 이로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쓴 약이 몸에 이롭다고 하지 않습니까? 옛날에 저는 학질 말라리아를 많이 앓았는데 노란 학질약이 키니네(quinine)를 먹으면 뚝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약이 얼마나 쓴지 곰쓸개 보다 더 씁니다. 대체로 쓴 것이 몸에 좋습니다.
우리의 인격 형성에나 영혼의 건강에도 쓰디쓴 고난과 시련이 몸에 좋습니다. 우리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유익하고 좋은가를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시기 때문에 단 것과 쓴 것을 조화 있게 공급하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달콤한 것만 계속 먹었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쓴 것과 단 것을 조화 있게 골고루 섞어서 먹이시는 분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1. 말씀의 쓴맛과 단맛
다윗은 말씀이 송이 꿀보다 더 달다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있어서 말씀은 꿀처럼 달고 맛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다니면서도 성경만 읽으려고 하면 졸음만 쏟아지고, 광고시간이나 찬송시간에는 눈이 말똥말똥하다가도 설교만 시작했다하면 잠이 오고 눈이 내리 덮이는 사람은 뭔가 영적 상태가 좋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말씀이 꿀처럼 달아야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정상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말씀의 쓴맛도 경험해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0장10절에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고 했습니다. 천사가 사도 요한 에게 두루마리 책을 내밀며 받아 먹으라 했는데 두루마리 책은 옛날 성경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으니까 입에는 꿀같이 단 데, 먹은 후에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고 했습니다. 입에는 단 데 배에 들어가 소화시키려고 하니까 몹시 쓰더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설교를 듣거나 말씀을 읽을 때 달콤한 맛도 느껴야 하지만 그 말씀을 소화시켜서 뼈가 되고 살이 되려면 쓰디쓴 고통과 고민의 쓴맛도 경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귀로 들을 때에는 달콤하고 즐겁지만 그 말씀대로 실천하려면 쓰디쓴 고통과 투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쓴맛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을 건성으로 믿는 것이지 중심으로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 받는 구속의 은총만 기쁘게 받아들이고, 죄로 인한 애통함과 고통을 느껴보지 못하면 좋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투쟁하며 고민하는데 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말씀을 받고 죄를 회개할 때 얼마나 애통했는지 졸도까지 했다고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죄를 회개하고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팔뚝을 피가 나도록 물어뜯으며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자가 된 것입니다.
말씀을 받은 후에 이런 피 흘리는 투쟁과 고통의 쓴맛을 경험해야 말씀을 바로 받아들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통의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시고 잠시 후에 또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하고 결심하신 후 십자가의 쓴잔을 마시고야 말았습니다.
제 일의 아담은 자기 뜻대로 하기 위해서 달콤한 선악과를 따먹었으나, 제 이의 아담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죄악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려 버리기 위해서 십자가의 쓴잔을 받아 마셨습니다. 말씀의 달콤한 맛만 즐기지 말고 말씀의 쓴맛을 경험해야 될 줄 믿습니다.
2. 영광의 단맛과 수욕의 쓴맛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은 우리에게 달콤하고 기분 좋은 영광만 받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쓰디쓴 욕도 먹게 하시고 수모도 당케 하시는 분임을 꼭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특별히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듣기 싫은 욕도 먹게 하시고 자존심 상하는 수모도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존경만 받고 칭찬만 받으면 자기도 모르게 교만에 사로잡히고 고집불통의 사람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또 쓰디쓴 욕도 먹을 줄 알고 수모도 당할 줄 알아야 하나님이 더 큰 영광도 주시고 귀한 그릇으로 쓰임 받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이신데도 강도들의 처형도구인 십자가에 달리셨고, 우리들이 보는 십자가 형틀에는 옷으로 가운데 부분이 가리워져 있지만 실제로는 발가벗은 몸 그대로 못 박히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모욕과 수치입니까? 이런 수욕을 다 참고 견디신 후에 영광의 부활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라도 칭찬만 듣게 하시지 않고 영광만 받게 하시지 않습니다. 억울하고 분해도 수치와 욕도 당하게 하십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잘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에서 예수님 다음 가는 위대한 사도이신데 얼마나 죽을 고생을 많이 하고 멸시천대를 받고 매를 맞았는지, 한 번은 죽은 줄 알고 성밖에 갖다 버리기까지 했고 자기 몸에는 사탄의 찌르는 가시가 있어서 늘 바울을 괴롭혔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제거해 주시지도 않았습니다. 거기에다 비하면 우리가 당하는 수치와 욕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남에게 칭찬을 듣고 영광을 받을 때 자신을 과대 평가 하거나 교만해지지 않도록 기도하고 조심하고 주의해야 됩니다. 도리어 남이 칭찬해주고 존경해 줄 때 그것을 그 액면 그대로 받지 말고 할인(discount)해야 됩니다. "나는 30점도 안되는데 저 사람이 100점이라고 하는구나"하고 70%는 감해 들어야 합니다. 이진숙 전도사님이 지금은 안계시고 미국으로 가셨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마는 그분은 얼굴에 화장도 안하고 옷은 몇 년 입었는지 구질구질하게 입고 다녀도 그분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좋아하지 않는 교인이 없습니다. 저의 아들 김정민 전도사가 두어 달 같이 심방하며 함께 지나 보더니 전도사님의 영권에 눌려서 꼼짝도 못하고 존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전도사님이 대표 기도 한 번만 하면 벌써 분위기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김 전도사가 그러는데 무슨 인사나 감사의 말을 하거나 칭찬의 말을 하려고 들면 아예 돌아서서 들으려고 하지를 않는다고 하면서 그런 분 처음 보았다고 감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칭찬과 영광만 받기 좋아하고 수치와 수모는 당하기 싫어하면 안됩니다. 교만의 큰 병이 듭니다. 영광 받는 큰 사람이 되려면 그만큼 수욕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애가 3장30절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이사야 51장7절∼8절에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나를 듣고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 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그들은 옷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며 그들은 양털같이 벌레에게 먹힐 것이로되 나의 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욕을 먹고 수치와 수모를 당할 때 잘 참아야 하고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의 의를 믿고 자고하거나 교만한 사람은 실족하여 넘어지게 해서라도 수치와 욕을 당하게 하고 수모를 받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단것과 쓴 것을 조화 있게 먹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키워도 늘 칭찬만 듣고 자라게 하면 안됩니다. 때로는 책망도 듣고 또 매도 맞고 욕도 먹어 버릇해야 그 아이의 인격이 원만해집니다. 가령 부잣집 외아들로 자라면서 부족함이 없게 자라고 천 원 짜리 착한 일을 했을 때 만 원 짜리 칭찬만 듣는 버릇이 생긴 아이는 자라서 험악한 세상살이 할 때 적응을 못하고 갈팡질팡하게 되고 절망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위대한 인물 성군 다윗은 얼마나 많은 수치와 수모를 당했는지 모르며 얼마나 많은 비방과 조롱을 받으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시편에 보면 구구절절이 그 고난 속에서 쓴 구절들을 많이 봅니다. 시편 3편에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시편11편에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하고 탄식했습니다. 시편13편에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시편22편에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시편 전체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수치와 욕을 당하여 절규하며 애타게 부르짖는 말씀입니다. 성군 다윗도 수없이 많은 수치와 욕을 당했고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도 침 뱉음을 당하셨고 귀신들린 자라는 수모를 당했는데 우리가 어찌 수욕을 안받겠습니까?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됩니다.
3. 달콤한 평강과 쓰디쓴 환난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아무리 많이 받은 사람이라도 평강만 누리게 하시지 않고 쓰디쓴 고통의 환난을 당하게 하십니다. 일평생 고난이 없이 평안하게만 살게 하면 그는 부패하고 타락하고 맙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외국에서 열대어 같은 물고기를 수입해올 때 아무리 좋은 물에 충분한 산소를 공급해도 도착해보면 대부분이 죽곤 해서 고기를 잡아먹는 문어같은 무서운 어류를 한 두 마리 집어넣었더니 이 물고기들이 잡혀 먹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리느라고 죽지 않더랍니다.
6.25 전쟁 때 미군과 한국군이 함께 포로가 되었는데 미군은 잘 죽더랍니다. 왜냐하면 고생을 안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많이 받은 한국군은 좀처럼 죽지 않고 지금까지도 수백 명이 살아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요사이 일년이면 학생들 100여 명 이상이 자살한다고 하며 군인들이 400여 명씩 자살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 이유는 전쟁의 고통이나 배고픈 고생도 안 해 보았기 때문에 조그마한 고난도 참지 못해서 자살하고 마는 것입니다. 요사이는 한 집에 하나나 둘 낳아서 제멋대로 키우니까 고난을 못 견디는 것입니다. 고난도 환난도 유익하기 때문에 쓰디쓴 환난도 고난도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45장7절에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캄캄한 밤도 환한 대낮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환한 대낮만 계속되면 언제 잠을 자고 쉬겠습니까? 늘 청명한 날씨만 계속되고 구질구질한 궂은 날씨가 없다면 어떻게 식물이 살고 동물이 살겠습니까? 늘 평안하기만 하면 죄를 짓고 부패하다가 결국 다 지옥에 떨어지고 맙니다. 시편 119편67절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하였고, 71절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의 단맛과 쓴맛을 골고루 주시고 달콤한 칭찬과 영광의 단맛도 주시고 쓰디쓴 수치와 욕도 함께 주시고 평안하고 달콤한 평강만이 아니라 환난과 고통의 쓴맛도 함께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달콤한 것만 좋아하지 마십시오. /김홍도 목사
청량고등학교 교사 (등대교회 협동목사) 한 태 완
http://jesusgospel.ce.ro,
http://je333.ce.ro, http://sermonhouse.ce.ro
본문: 요한계시록 10장10절, 이사야 45장7절
여러 해 전에 제가 미국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하는데 치과 의사네 집에 숙식하면서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치과 의사가 하는 말이 자기 아이들은 초콜렛을 한 번도 먹이지 않고 사탕은 집안에 들여오지 못하게 한답니다. 그 이유는 이빨을 상하게 하고 썩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단 것만 자꾸 먹으면 이빨도 상하고 당뇨도 생기기 쉽고 건강에 이로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쓴 약이 몸에 이롭다고 하지 않습니까? 옛날에 저는 학질 말라리아를 많이 앓았는데 노란 학질약이 키니네(quinine)를 먹으면 뚝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약이 얼마나 쓴지 곰쓸개 보다 더 씁니다. 대체로 쓴 것이 몸에 좋습니다.
우리의 인격 형성에나 영혼의 건강에도 쓰디쓴 고난과 시련이 몸에 좋습니다. 우리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유익하고 좋은가를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시기 때문에 단 것과 쓴 것을 조화 있게 공급하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달콤한 것만 계속 먹었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쓴 것과 단 것을 조화 있게 골고루 섞어서 먹이시는 분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1. 말씀의 쓴맛과 단맛
다윗은 말씀이 송이 꿀보다 더 달다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있어서 말씀은 꿀처럼 달고 맛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다니면서도 성경만 읽으려고 하면 졸음만 쏟아지고, 광고시간이나 찬송시간에는 눈이 말똥말똥하다가도 설교만 시작했다하면 잠이 오고 눈이 내리 덮이는 사람은 뭔가 영적 상태가 좋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말씀이 꿀처럼 달아야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정상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말씀의 쓴맛도 경험해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0장10절에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고 했습니다. 천사가 사도 요한 에게 두루마리 책을 내밀며 받아 먹으라 했는데 두루마리 책은 옛날 성경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으니까 입에는 꿀같이 단 데, 먹은 후에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고 했습니다. 입에는 단 데 배에 들어가 소화시키려고 하니까 몹시 쓰더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설교를 듣거나 말씀을 읽을 때 달콤한 맛도 느껴야 하지만 그 말씀을 소화시켜서 뼈가 되고 살이 되려면 쓰디쓴 고통과 고민의 쓴맛도 경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귀로 들을 때에는 달콤하고 즐겁지만 그 말씀대로 실천하려면 쓰디쓴 고통과 투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쓴맛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을 건성으로 믿는 것이지 중심으로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 받는 구속의 은총만 기쁘게 받아들이고, 죄로 인한 애통함과 고통을 느껴보지 못하면 좋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투쟁하며 고민하는데 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말씀을 받고 죄를 회개할 때 얼마나 애통했는지 졸도까지 했다고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죄를 회개하고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팔뚝을 피가 나도록 물어뜯으며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자가 된 것입니다.
말씀을 받은 후에 이런 피 흘리는 투쟁과 고통의 쓴맛을 경험해야 말씀을 바로 받아들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통의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시고 잠시 후에 또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하고 결심하신 후 십자가의 쓴잔을 마시고야 말았습니다.
제 일의 아담은 자기 뜻대로 하기 위해서 달콤한 선악과를 따먹었으나, 제 이의 아담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죄악과 사탄의 권세를 깨트려 버리기 위해서 십자가의 쓴잔을 받아 마셨습니다. 말씀의 달콤한 맛만 즐기지 말고 말씀의 쓴맛을 경험해야 될 줄 믿습니다.
2. 영광의 단맛과 수욕의 쓴맛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은 우리에게 달콤하고 기분 좋은 영광만 받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쓰디쓴 욕도 먹게 하시고 수모도 당케 하시는 분임을 꼭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특별히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듣기 싫은 욕도 먹게 하시고 자존심 상하는 수모도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존경만 받고 칭찬만 받으면 자기도 모르게 교만에 사로잡히고 고집불통의 사람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또 쓰디쓴 욕도 먹을 줄 알고 수모도 당할 줄 알아야 하나님이 더 큰 영광도 주시고 귀한 그릇으로 쓰임 받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이신데도 강도들의 처형도구인 십자가에 달리셨고, 우리들이 보는 십자가 형틀에는 옷으로 가운데 부분이 가리워져 있지만 실제로는 발가벗은 몸 그대로 못 박히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모욕과 수치입니까? 이런 수욕을 다 참고 견디신 후에 영광의 부활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라도 칭찬만 듣게 하시지 않고 영광만 받게 하시지 않습니다. 억울하고 분해도 수치와 욕도 당하게 하십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잘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에서 예수님 다음 가는 위대한 사도이신데 얼마나 죽을 고생을 많이 하고 멸시천대를 받고 매를 맞았는지, 한 번은 죽은 줄 알고 성밖에 갖다 버리기까지 했고 자기 몸에는 사탄의 찌르는 가시가 있어서 늘 바울을 괴롭혔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제거해 주시지도 않았습니다. 거기에다 비하면 우리가 당하는 수치와 욕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남에게 칭찬을 듣고 영광을 받을 때 자신을 과대 평가 하거나 교만해지지 않도록 기도하고 조심하고 주의해야 됩니다. 도리어 남이 칭찬해주고 존경해 줄 때 그것을 그 액면 그대로 받지 말고 할인(discount)해야 됩니다. "나는 30점도 안되는데 저 사람이 100점이라고 하는구나"하고 70%는 감해 들어야 합니다. 이진숙 전도사님이 지금은 안계시고 미국으로 가셨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마는 그분은 얼굴에 화장도 안하고 옷은 몇 년 입었는지 구질구질하게 입고 다녀도 그분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좋아하지 않는 교인이 없습니다. 저의 아들 김정민 전도사가 두어 달 같이 심방하며 함께 지나 보더니 전도사님의 영권에 눌려서 꼼짝도 못하고 존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전도사님이 대표 기도 한 번만 하면 벌써 분위기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김 전도사가 그러는데 무슨 인사나 감사의 말을 하거나 칭찬의 말을 하려고 들면 아예 돌아서서 들으려고 하지를 않는다고 하면서 그런 분 처음 보았다고 감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칭찬과 영광만 받기 좋아하고 수치와 수모는 당하기 싫어하면 안됩니다. 교만의 큰 병이 듭니다. 영광 받는 큰 사람이 되려면 그만큼 수욕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애가 3장30절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이사야 51장7절∼8절에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나를 듣고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 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그들은 옷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며 그들은 양털같이 벌레에게 먹힐 것이로되 나의 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욕을 먹고 수치와 수모를 당할 때 잘 참아야 하고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의 의를 믿고 자고하거나 교만한 사람은 실족하여 넘어지게 해서라도 수치와 욕을 당하게 하고 수모를 받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단것과 쓴 것을 조화 있게 먹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키워도 늘 칭찬만 듣고 자라게 하면 안됩니다. 때로는 책망도 듣고 또 매도 맞고 욕도 먹어 버릇해야 그 아이의 인격이 원만해집니다. 가령 부잣집 외아들로 자라면서 부족함이 없게 자라고 천 원 짜리 착한 일을 했을 때 만 원 짜리 칭찬만 듣는 버릇이 생긴 아이는 자라서 험악한 세상살이 할 때 적응을 못하고 갈팡질팡하게 되고 절망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위대한 인물 성군 다윗은 얼마나 많은 수치와 수모를 당했는지 모르며 얼마나 많은 비방과 조롱을 받으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시편에 보면 구구절절이 그 고난 속에서 쓴 구절들을 많이 봅니다. 시편 3편에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시편11편에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하고 탄식했습니다. 시편13편에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시편22편에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시편 전체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수치와 욕을 당하여 절규하며 애타게 부르짖는 말씀입니다. 성군 다윗도 수없이 많은 수치와 욕을 당했고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도 침 뱉음을 당하셨고 귀신들린 자라는 수모를 당했는데 우리가 어찌 수욕을 안받겠습니까?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됩니다.
3. 달콤한 평강과 쓰디쓴 환난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아무리 많이 받은 사람이라도 평강만 누리게 하시지 않고 쓰디쓴 고통의 환난을 당하게 하십니다. 일평생 고난이 없이 평안하게만 살게 하면 그는 부패하고 타락하고 맙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외국에서 열대어 같은 물고기를 수입해올 때 아무리 좋은 물에 충분한 산소를 공급해도 도착해보면 대부분이 죽곤 해서 고기를 잡아먹는 문어같은 무서운 어류를 한 두 마리 집어넣었더니 이 물고기들이 잡혀 먹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리느라고 죽지 않더랍니다.
6.25 전쟁 때 미군과 한국군이 함께 포로가 되었는데 미군은 잘 죽더랍니다. 왜냐하면 고생을 안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많이 받은 한국군은 좀처럼 죽지 않고 지금까지도 수백 명이 살아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요사이 일년이면 학생들 100여 명 이상이 자살한다고 하며 군인들이 400여 명씩 자살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 이유는 전쟁의 고통이나 배고픈 고생도 안 해 보았기 때문에 조그마한 고난도 참지 못해서 자살하고 마는 것입니다. 요사이는 한 집에 하나나 둘 낳아서 제멋대로 키우니까 고난을 못 견디는 것입니다. 고난도 환난도 유익하기 때문에 쓰디쓴 환난도 고난도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45장7절에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캄캄한 밤도 환한 대낮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환한 대낮만 계속되면 언제 잠을 자고 쉬겠습니까? 늘 청명한 날씨만 계속되고 구질구질한 궂은 날씨가 없다면 어떻게 식물이 살고 동물이 살겠습니까? 늘 평안하기만 하면 죄를 짓고 부패하다가 결국 다 지옥에 떨어지고 맙니다. 시편 119편67절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하였고, 71절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의 단맛과 쓴맛을 골고루 주시고 달콤한 칭찬과 영광의 단맛도 주시고 쓰디쓴 수치와 욕도 함께 주시고 평안하고 달콤한 평강만이 아니라 환난과 고통의 쓴맛도 함께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달콤한 것만 좋아하지 마십시오. /김홍도 목사
청량고등학교 교사 (등대교회 협동목사) 한 태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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