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복음............... 조회 수 801 추천 수 0 2005.12.01 17:2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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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한때 유명한 미국의 교수였던 아담스 박사가 학교를 은퇴하고 늙어서 쓸쓸한 인생의 여생을 지낼때 였읍니다.
하루는 이른 아침에 그가 산책하려 길거리에 나왔을때, 제자들을 만났읍니다. 제자들이 다정하게 인사하며 "아담스 박사님, 어떠하십니까?"하고 인사했을 때 "아담스는 안전하지만 아담스의 집이 말이 아니다."라고 대답했읍니다. 제자들은 소스라쳐 놀라서 그와 같이 유명한 박사님이 만년에 집조차 하나 없어서 어떻게 하겠읍니까? 그렇게 물을 때 아담스박사는 말하기를 "우리집은 기둥이 흔들리고 기와가 떨어지 2고 벽이 파벽풍창이 되었다"고 말했읍니다. 제자들이 놀라서 자기들이 어떻게 하든지 기금을 모아서 박사님집을 새로 지어 드리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럴때 박사님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박사는 아무 상관이없지만 너희들이 보는바와 같이 박사님의 집의 기둥인 두 다리가 흔들리며, 박사의 지붕인 머리털이 다 빠져 나갔으며, 박사의 벽인 이 몸은 살점없이 앙상하게 되고 말았으니 이제 박사의 집은 무너지게 되었다. 그런데 너희들이 나의 집을 지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읍니다. 이럴때 제자들은 박사님의 말을 듣고 웃4고서 박사님께서 농담한 줄 알았읍니다. 그러나 아담스 박사는 말하기를 "사람이 세상에 한번 태어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고 난 다음에는 이 세상을 떠나야된다."고 말했읍니다.


죽음

에드워드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교회 옆에 아주 방탕한 주정뱅이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이 사람이 얼굴이 하얗게 되어 달려왔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자기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네가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내년 오늘에 너를 데려갈 것이다'라고 알려주더라는 것이었다. 목사님께서 이 모든 말을 들으시고는 '그러면 이젠부터 술과 도박을 끊고 교회에 나오시오'라고 했다. 주정뱅이는 결심을 하고 술과 도박을 끊고 열심히 교회에 출석했다. 그러나, 얼마쯤 나오다보니 열심이 식어졌다. 그래서 목사님이 어쩌자고 열심을 잃어버렸느냐고 묻자 그 주정뱅이는 '목사님 그 꿈을 믿으십니까? 그 꿈은 개꿈이지요. 그것을 믿는 사람이 어리석지요'라고 하며 교회출석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이 주정뱅이는 계단에서 구르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그날이 바로 1년전 꿈을 꾼 바로 그날이었다.


죽음 앞의 초탈한 삶

영국의 정치가 체스터필드 경은 말년에 매일 집근처 호젓한 가로수 길을 산책했다. 그 모습은 진지했으며 엄숙했고 무엇인가 초탈한 듯해 보였다.
이런 모습을 본 한 마을 사람이 어느날 아침 "신선한 공기를 마시러 나오셨군요. 건강하게 사셔야죠"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체스터필드는 "고맙습니다. 그러나 맑은 공기를 마시러 나온 것이 아니라 장례식 연습을 하고 있는 중이랍니다"라고 대답했다.
'임종의식'은 진지하고 초탈한 삶을 살게 한다.


죽음저편

크리스챤인 한 의사가 중병에 걸린 어떤 환자를 찾아 갔습니다. 그 환자가 "의 선생님, 제가 회복할 수 있을까요?"하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글쎄요, 아마 어려울 겁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환자는 "나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무덤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선생님은 아세요?"하고 물었습니다. 의사는 솔직히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죽음 저 건너편에 있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열리더니 의사가 기르는 개가 뛰어들어와 주인에게 뛰어올라 꼬리를 치면서 좋아했습니다.
그때 의사는 환자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셨지요. 이개가 이 방안에 들어와 본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자기 주인이 여기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아무 두려움 없이 뛰어들어온 것입니다. 죽음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는 말씀드릴 수가 없지만 한 가지 사실, 곧 우리 주님께서 그곳에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족합니다. 아무 생각마시고 그를 믿기만 하십시오. 문이 열릴 때 두려움 없이 들어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도 손든 루터의 기도

지금으로부터 4백년전의 일이다. 독일의 신학자 마틴 루터가 당시 로마 카톨릭에 대항하여 종교 개혁을 할 때,그에게 오른팔과 같이 힘을 합께 하돈 동역자 프레드릭 니코니우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갑자기 심한 병이 들어 도저희 소생할 가망이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느낀 니코니우스는 떨리는 손으로 친구요 주의 일을 합께 하는 동역자인 마틴 루터에게 편지를 보냈다. 멀리서 그의 편지를 받아들은 루터는 깜짝 놀랐다. 도저희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곧 바로 루터는 병석에 누운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친구여 나는 자네가 더 살것을 하나님 이름으로 명령하네. 나에게 있있어서 교회를 개혁하는데 자네가 필요하니 주님은 자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나로 하여금 듣도록 하지 않을 걸세. 자네가 살아야 한다는 것은 나의 뜻이네. 하지만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영화롭게 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네."
임종을 앞둔 니코니우스는 루터의편지 내용을 전해 듣고 얼마후 다시 소생했다.루터의 확신에 찬 기도와 신념에서 죽음 조차도 이길 수 있는 힘을 하나님으로 부터 받았기 때문이다. 그 후 그는 6년동안 루터와 더 일을 하다가 주님품으로 돌아 갔다. 우리가 생의 목표를 하나님께 일치시켜 놓고 그것을 위해 살아 간다면 우리도 루터처럼 그런 자신있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옥한옴 목사 제공--


죽음도 하나님 사업일부

"우리들은 일이 끝나기까지 죽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아프리카의 선교사 리빙스턴이 남긴 말이다. 그는 아프리카의 내지, 밀림 속에서 숱한 어려움과 역경, 위험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 아래서 무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남긴 말이었다. 그러나 제 3차 여행에서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리빙스턴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충분히 충실하게 성취하고 이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그의 죽음을 듣고 그 죽음의 순간을 전해들은 경건한 청년들이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 가졌던 애정과 토인들에 대한 자애를 본받고 열심을 일으켜 속속히 아프리카의 내지로 들어가 전도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리빙스턴은 살아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쳤거니와 죽어서도 하나님의 뜻을 무언으로 대변하여 성취시켰던 것이다. 죽음도 하나님 사업 일부이다.


죽음 앞에서

스위스의 한 순교자가 장작더미 위에 맨발로 올라섰다. 이제 막 불을 질러 화형을 집행하려는 순간 자기의 화형집행 형리를 감독하던 치안판사를 가까이 오라고 했다.
“죄송하오나 판사님의 손을 내 가슴에 얹어 보십시오. 저는 이제 곧 화형을 당하는 몸이옵니다. 만약 저의 심장이 평상시보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뛴다면 저의 종교를 믿지 마시고 저의 하나님을 부인하셔도 좋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순교자의 표정이 너무 담담하여 의아했던 그는 떨리는 손으로 순교자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 순교자의 가슴은 화형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침대에 잠자러 가는 사람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치안판사는 너무나 놀랐다. 이 비범한 힘이 어디서 왔단 말인가. 죽음이 불신자들에게는 불안한 것이요. 두려운 것이며 고통스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으나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주님을 만나는 순간이요. 주님이 예비하신 아름다운 영원한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니 어찌 불안하며 두려우랴. 무디 선생은 “세상이 점점 멀어지니 천국문이 열린 것이 보이는구나” 라고 하며 기쁘게 세상을 마쳤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천국문이 보이지 않는다면 기쁘게 죽어갈 수 없을 것이요. 기쁘게 죽어가지 않을 자가 어찌 천국에 가겠는가. 마지막 모습이 그의 행방을 말해 줄 것이다.


죽음 앞에서 담대한 신앙

스위스의 한 순교자가 맨발로 장작더미 위에 올랐다. 끔찍한 장면을 앞두고 모두 다 긴장되어 있는데 막상 순교할 당사자는 얼굴에 평화가있고 여유가 있었다. “판사님 저의 가슴에 손을 한번 얹어 보세요.
만약 저의 심장의 맥박이 평상시보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뛴다면 제가 믿는 종교를 불신하시고 하나님을 저주하셔도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순교자의 표정이 너무 담담하여 의아했던 판사는 떨리는 손으로 순교자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 순교자는 화형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침대에 잠자러 가는 사람인양 평온하기만 했다. 죽음이 불신자들에게는 마지막이요 무섭고 고통스럽고 두려운 것이지만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는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며 주님이 예비하신 아름다운 영원한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니 어찌 불안하며 두려우랴. 무디 선생은 임종을 앞두고 “세상이 점점 멀어지니 천국문이 열리도다”라고 유언했으며 그는 평상시 말하기를 “그 어느 날 무디가 죽었다고 신문지상에 발표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디는 죽은 것이 아니라 새 하늘 새 땅의 시민이 된 것이다”라고 외쳤다. 육체의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영원한 죽음이다. 구원 받은 감격과 감사보다 현실적이고 시각적인 것에만 몰두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자. “시련이 아무리 크다 하여도 구원 받은 죄인들은 감사할 이유를 언제나 발견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해 다시 깨닫자

죽음에 진지하게 직면하는 것은 당신의 인생을 변화시킬 것이다. 나는 수 년간 매우 비만했던 고등학교 선생님을 기억한다. 그는 심한심장 마비로 고생한 적이 있었다. 심장마비를 일으킨 후 그는 생활 양식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먹는 습관도 바꾸었다. 그래서 과도한 체중을 줄였다. 그는 새 사람처럼 보였고 그렇게 행동했다.
죽음에 대한 진지한 생각은 당신의 인생을 변화시킬 것이다. 당신이 죽음의 심각성과 그 결말을 깨닫는다면 매일 당신이 마지막 날을 살듯이 살아갈 것이다.
지금 당신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만일 당신이 인생을 새롭게 이해하길 원한다면 우선 죽음에 대해 다시 깨달아야 합니다.

죽음에 이르는 길

늑대들에게 성가심을 당하던 에스키모인들이 그 약탈자들을 막을 묘안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긴 칼을 골라 양쪽에 칼날을 세웠다. 그리고 나서 그 양날을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숫돌로 갈았다. 다음으로 막도살한 동물의 피속에 그 날을 담구었다. 피가 북극의 찬 공기에서 금방 칼에 얼어붙었고, 그들은 그 과정을 반복하였다. 마침내 그 날은 두껍게 얼음피로 덮여졌고, 거기에서는 피냄새만 났다. 그리고는 그 칼을 늑대들이 자주 나타나는 지점의 얼음에 날을 세워서 박아두었다.
배회하던 늑대가 마침내 그 피냄새를 맡는다. 늑대의 코가 감지한것을 그 눈이 확인한다. 거기에 먹을 피가 있다. 그것은 매우 맛있어 보인다. 그 늑대의 거친 혀가 여러 겹으로 되어있는 냉동 음식을 핥아들어간다. 그러다가 그 늑대는 적은 양의 신선한 피를 맛보고는 식욕이 자극된다. 그 늑대는 열이 나서 그 칼을 공격하는데, 그 입에서는 피가 - 자기자신의 피가 - 점점 더 많이 흘러나온다. 그 늑대는 자기 자신의 피를 먹으면서 미치광이가 된다. 그 다음날 에스키모인은 칼을 두었던 곳으로 가서 죽어 얼어있는 늑대의 시체를 발견한다.
참 으시시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는 죄의 결과를 묘사해주는 그림이다. 거기에도 이와같은 무시무시한 결과들이 있지 않는가? 쇠약해진 건강, 산산이 부숴진 결혼, 매맞는 아이들.... 아니면 겉으로 보기에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은 결과들이있다. 불면으로 고생하거나 크게 웃지 못하거나 사람들과 나눌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 따위이다. 죄에는 그 댓가가 있다. 덧없는 몇 차례의 호기심 충족이 미친 집착으로 변한다. 그것은 생명을 유인하는 유혹이다.

죽음에 이르는 절망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 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잠 18:14)
쿠쉬너 소령은 미국인 군의관이었다. 그의 포로생활 회고담은 [절망]과 [죽음]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는 1967년 월맹군의 포로가 되었다. 지독한 학대와 영양실조로 체중은 절반으로 줄었다. 그가 수용소에 있는 동안 27명의 미군중 10명이 죽어갔다. 죽은 병사중 로버트라는 하사관이 있었다. 그는 해병특공대 출신으로 억세고 이지적인 사람이었다. 소령이 로버트 하사를 처음 보았을때 비사상태의 다른 포로들에 비해 그는 유난히도 생기가 넘쳐흘렀다. 체중은 40킬로 이라로 떨어져 수수깡처럼 말라있었지만 눈은 빛나고 중노동을 잘 곁뎌냈다. 그것은 자유에 대한 희망때문이었다.
교활한 월맹군측은 포로들을 마음대로 부리기 위하여 말 잘 듣는 미군 포로 몇명을 석방시켜 주었다. 그리고 다음번 석방자는 로버트가 될 것이라고 했다. 석방에 대한 의망이 로버트 하사로 하여금 모든 고통을 극복할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희망은 육체적,생물학적 한계마저 극복하게 하였다. 그러나 약속한 6개월이 되었지만 월맹군측은 그를 석방시켜 주지 않았다. 1개월을 더 기다렸으나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게다가 월맹군 장교의 태도는 더욱 냉담해졌다. "다 틀렸구나!" 생각한 그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후 군의관에 품에 안겨 죽었다. "어머님, 아버님. 정말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바바라 당신을 용서하오." 이것이 병사의 마지막 남긴 말이었다. 로버트는 질병때문이 아니고 절망때문에 죽었다고 군의관은 말하고 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으며 앞으로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을때 그는 마침내 죽고 말았다."고 쿠쉬너 소령은 회고하고있다.
빅터 플랭클은 유명한 유대인 정신과 의사이다. 나치스에 의해 체포되어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 갇히게 되었다. 중노동과 영양실조로 사람들은 죽어갔다. 몸에 상처가 있거나 노동력이 없어진 유대인들은 모두 가스실로 보내졌다. 이가 득실거리고 이로인한 발진티푸스로 또많은 유대인들이 죽어갔다. 자살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끝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몸이 건강해서가 아니고 살아남아야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중 어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개처럼 살았고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인간의 존업성을 지키며 살았다. 공통적인 것은 살고자하는 의지를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수용된 이들 유대인들 가운데 닥터 라는 되가 외과의사가 있었다. 하루는 그가 밝은 얼굴로 프랭클 박사를 찾아와 간밤에 꿈을 꾸었다고 했다. 너무나 생생한 꿈이었다. 추수감사절에 연합군이 진격해와 석방되는 꿈이었다. 이꿈을 꾼 후로 그는 마치 충실한 식사를 한 사람처럼 원기왕성하고 명랑해졌다. 수개월이 지나고 추수감사절이 되었으나 연합군의 소식은 감감했다. 어느날 밤 그 닥터는 프랭클 박사에게 "다 틀린거야... 헛된 꿈이었어." 라고 힘없이 말했다. 다음날부터 그는 심하게 열이 오르더니 수일만에 죽고 말았다. 자유를 향한 애타는 그리움과 희망은 닥터로 하여금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원기왕성한 삶을 살게 해 주었지만 기다렸던 그날이 훨씬 뒤로 물러가 버리자 그를 유지시켜 주었던 정신적 기둥이 무너져 버렸다. 이처럼 절망감은 인간을 병들거나 죽게 한다. 정신의학자들은 이에 대한 많은 근거를 갖고 있다.
불의를 행하는 자가 우리를 짖밟고 개가를 부를때 절망감에 빠질 수가 있다. 그러나 성경은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저희는 풀과 같이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이이로다}라고 하시고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라고 하신다. 유한한 우리에게 하나님만이 변치않은 소망을 주신다. 불치의 병이라는 선고를 받았을때 인간은 절망하며 이 절망감 때문에 병을 극복할 힘을 잃게 된다. 그러나 어떤 절망적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는 주안에서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 복음은 우주 최대의 희망이다.


죽음으로 맺는열매

제임스 헌팅톤이 아프리카 선교사로 떠나기 전에 식사 초대를 받았읍니다. 그와 한방을 쓰던 사람이 간단한 의식을 집례하며 “우리가 당신을 위해서할 수 있는 일이 없읍니까.”하고 물었읍니다. 그러자 헌팅톤이 대답하였읍니다. “나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외국 선교지에서 죽으면 내 무덤에 묘비 하나만 세워 주십시오.” “비문을 어떻게 쓸까요.”하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묻자 그는 “이렇게 써 주시오. .천 번을 망하여도 아프리카는 버림받지 않게 하소서.”하고 대답하였읍니다. 그는 아프리카로 가서 8개월 만에 일단의 식인종들에게 죽임을 당했읍니다. 그때 추장이 그 선교사의 피를 손에 받으면서 그의 집단에게 “이 사람은 자기 피로 우리에게 예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샀다”고 말하였읍니다. 후에 무역업자가 그곳으로 갔을 때 그 추장이 그를 보고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하였읍니다. 그 결과 무역업자 자신이 회심하게 되었고 그의 아들은 아프리카 흑인들의 전도자가 되었읍니다.


죽음으로 맺은 열매

중앙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던 죠지 아틀레이라고 하는 젊은 선교사는 원주민들의 창과 몽둥이게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영국제 윈체스트 연발총의 방아쇠를 끝까지 당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대로 쏘면 저들을 죽이고 자기는 살 수가 있읍니다. 그러나 이 젊은 선교사는 자기를 죽이러 오는 사람들인 줄을 알면서도 끝까지 총을 쏘지 않았읍니다. 손가락 하나로 방아쇠 한번 잡아당기면 끝날 일이겠으나 그는 결코 그 일을 하지 않았읍니다. 왜냐하면 이제 내가 저 사람들을 죽이게 되면 이 마을에서의 하나님의 선교는 영영 끝이 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을 죽인자가 전하는 예수를 누구인들 믿고자 하겠느냐 말입니다. 그 때문에 그는 끝까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총을 든 그대로 개처럼 끌려가서 사지를 찢기며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 이렇게 죽은 다음에 보니 그에게는 그런 놀라운 총이 있었고 탄환도 열발이나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된 그 원주민들은 뒤늦게나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죽음으로 연결된 분노

엡 4:26; 고전 1:10; 마 12:25, 26

남편과 아내가 의견이 분분해서 싸우게 되었다. 남편은 화가난채 뾰로통해져서 말을 하지 않았다. 아내는 가정의 평화를 회복하려고 남편에게 달래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여보, 아침 식사는 무엇으로 준비할까요?" 그러자 남편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아무 것도 준비할 필요가 없어! 전혀 생각이 없어. 난 출근도중에 먹겠어."
남편은 분노와 실망과 짜증을 그대로 품은 채 출근길을 재촉했다. 침울하게 길을 건너던 그는 달려오는 차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만 차에 치었고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가정불화가 비극적인 참사를 부른 것이다. 의견의 불일치는 정감있는 태도로 조정해 나가면 모든 것이 그 해결점을 찾을 수 있는데.(랄프 M. 스미스)

죽음은 영생의 시작

무디 선생은 죽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 어떤 날 신문에서 D.L.Moody가 죽었다는 기사를 읽으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그 말을 믿지 마시요.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 더 좋은 곳에서 잘 살게 되었다는 것 뿐이니까요."

죽음을 뛰어넘은 여인의 비련

백학산 밑 갯마을에는 금슬이 좋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남편은 고기잡이를 다녔고 새댁은 해초를 따며 행복하게 살았다. 이렇듯 행복한 가정에 비운이 닥쳤다. 남편이 병명조차 알수없는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남편의 병을 고치기 위해 부인은 백학산을 오르내리며 갖가지 약초를 캐다 달여 먹이고 인근에서 영험하다는 의원은 다 찾아다녔으나 아무런 효험없이 남편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부인이 시름에 잠겨 수평선을 바라보 있던 어느날 이곳 갯마을에 사는 이웃노파가 환자의 문병을 와서'옛부터 저섬에 선약이 있긴 있다네만'하고 중얼거리자 이말에 귀가 번쩍 띤 새댁은 '할머니 정말인가요? 그 약이 어떻게 생겼던 가요?'라며 가르쳐줄 것을 애원했다. 그러나 그 노파는 얼른 입을 떼지않으며 난처한 표정을짓더니 그애원이 너무나 간절했던지 '이 사람아, 저 섬에 갔다 살아온 사람이 없다네. 그래도 가르쳐 달라고 할텐가'라고 반문했다. 새댁은 오직 사랑하는 남편을 구하고자 하는 일념뿐이었다. '내 정성을 하늘이 안다면 내가 죽지않을 것아요 정성이 부족하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죽은들 남편을 위해서라면 여한이 없습니다'고 하며 졸랐다. 노파는 '자네의 소원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러나 나를 원망하지는 마소'하며 만병에 닿는다는 마을앞섬의 선약초를 설명해 주었다.
남편을 살릴 수 있다는 희망에 부푼 이 새각씨는 미음을 쑤어 남편의 머리 맡에놓고 곧장 불귀도라는 마을앞 섬을 향해떠났다. 이 섬에 도착한 새댁은 노파가 설명해 준 선약을 찾아 헤매던 끝에 벼랑에 있는 약초 한 뿌리를 발견했다. 하늘에 감사하며 이 약초에 손을 댄 순간 사방에서 사르르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이게 웬일인가 수십마리의 뱀떼가 눈깜짝할 사이에 달려들어 그녀의 하체를 물고 말았다. 무인도에서 독뱀에 물린 그녀는 비명을 지르고 까무러쳤지만 구원의 손길이 있을 리 없었다. 얼마뒤 그녀의 의식은 회복됐으나 뱀에게 물린 하체는 그녀 자신이 보아도 징그러운 구렁이로 변해 있었다.
몸은 비록 구렁이로 변했지만 남편을 살리고자 하는 그녀의 일념은 변함이 없었다.
그녀가 마을앞섬 불귀도로 선약을 구하러 떠나 며칠이 지나자 남편은 머리맡에 놓고간 미음도 채 먹지 못하고 불귀도를 바라보며 부인을 목놓아 부르다 죽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먹구름이 일고 바다엔 안개가 깔렸다. 그리고 불귀도를 바라보니 마치 생전의 새댁 얼굴마냥 변해보였다. 사람들이 나와 이상야릇한 그 정경을 바라보니 섬에서 무엇인가 헤엄쳐 오고 있었다. 가까이 오자 그것이 구렁이임을 안 마을사람들은 혼비백산해 숨어버렸다. 구렁이는 입에 이름모를 풀 한포기를 물고 그의 남편이 있는 백학산 산마루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 집으로 들어갔다. 이날밤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이틋날 날이 밝자 마을 사람들은 뒤늦게사 앓아 누운 백학산 산마루 젊은이를 생각해냈다. 마을사람들이 뛰어가 보니 남자는 죽어있고 그의 곁에는 어제 구렁이가 물고 온 풀잎이 놓여 있었다. 이를 본 노파가 그 구렁이는 필시 불귀도에 건너간 색시였을 거라며 자신이 그 섬에 선약이 있음을 가르쳐 주었노라고 털어놓았다. 사람들은 이 남자를 산마루에 고이 묻어 주엇다. 장사를 지내주자 멀리 바라다보이는 불귀도가 너울너울 춤을 추는듯이 보였다. 슬픈여인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후부터 불귀도를 각씨섬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죽음을 보았습니다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큰 세도가(勢道家)가 죽자, 스승은 제자들을 데리고 장례식에를 가게 되었다.
뒤따라가던 제자 하나가 여쭈었다.
"선생님,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맡기고 나를 따라라 하시더니, 오늘은 무슨 까닭에 그런 자리에 가시는 겁니까?"
스승은 대답이 없었다.
그후 상가에서 돌아온 스승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보았는가 하고 물었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문상객이 몰린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학식과 덕망의 위대한 힘을 보았습니다."
"저는 권력의 힘을 보았습니다. 권력 때문에 그토록 많은 이들이 몰렸겠지요."
"황금 빛 관과 몰약의 향기는 커다란 위로가 되더군요."
"장례식 절차가 그토록 장중하고 경건한 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보았습니다."
스승의 얼굴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그런데 침묵에 잠겼던 한 제자의 말에, 스승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일어섰다.
"저는 단 한 가지, '죽음'을 보았습니다. 저의 죽음과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의 죽음을…."
사람은 누구나 한 개의 심장을 지닌 한 개의 목·숨일 뿐이다. 심장이 멎고 숨기 끊길 목숨이다.
인간은 인간이며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흙이 흙으로 돌아가기 전 자기를 지은 창조주를 기억하며 겸비(謙卑)함에 이르는 것이 영원한 진실, 생명의 길.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까닭

그리스도인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말한 대로 나그네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무런 고통이나 미련도 없이 제 고장을 떠나가는 나그네와도 같으니, 그들은 지금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망명가는 사람처럼 슬픈 마음으로 이 세상을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고국으로 돌아온 망명객이나 자기가 태어난 나라로 돌아오는 갈 곳 없던 사람들처럼 커다란 기쁨을 안고 이 세상을 떠나간다.
하늘나라에 대한 기대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기쁨과즐거움이 한결같이 슬프게 느껴지느니, 그 기쁨 그 즐거움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나라에 대한 기대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이지상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으니, 그들은 그 즐거움 속에서 자기들이 기다리고 있는 앞날의 즐거움을 발견하고 자신들의 나그네길이 곧 끝날 것을 기뻐하는 나그네들인 까닭이다. 곧 닥쳐올 앞날에 대한 기대 가운데 그들의 마음은 즐겁기 마련이다.


죽음을 이기는 책임감

제게 사촌 형님이 계셨는데, 이 분은 장로교의 목사님으로 평양의 고종교회라고 하는 교회를 담임하고 계셨습니다.
원래 이 교회는 나중에 공산당원이 된 강양욱이라는 사람이 담임하고 있다가 우리 청년들이 그가 거하는 주택에 수류탄을 던짐으로 말미암아 그 온 가족을 잃고, 그만 겨우 살아남아 김일성의 휘하에 들어가면서 고종교회를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임으로 저의 사촌 형님이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장도식 목사님이라면 장로교 목사님 중에 모르는 분이 없었습니다. 김일성이 저의 형님께 기독교 연맹에 들라고 했지만 반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기에서 고생하다가 순교당하지 말고 어서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도피해 가라고 했습니다. 그 형님은 몇번이나 38선까지 나와서 남한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남한 땅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는 다시 평양으로 돌아갔습니다.
얼마 후 다시 나와 보고는 평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심방하시던 중 결국은 정치보위부원에게 잡혀 순교를 당하고 마셨습니다.
그 분은 남한 땅으로 남들처럼 피난할 수 있었고 38선을 넘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종교회에 남아 있는 양떼를 버리고, 자기 책임을 도피해서 어디로 갈 것인가?'하고 결심하고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맡겨진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의 책임감은 죽음마저도 극복하는 힘이었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

해리 림머 박사가 이집트를 여행할 때였다. 그는 세련되고 문화적인 혜택을 많이 받은 그곳 주지사와 종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 자신과 교제하는 방법을 세 가지고 주셨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림머가 말했다. 우리도 역시 그렇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슬람교도인 주지사에 응수하였다.
하나님은 당신이 친히 창조하신 피조물 가운데서 자신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림머가 말을 이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고 계시기도 하지요. 우리도 코란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신다고 생각해요. 하나님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그 섭리를 나타내셨지요. 하나님은 예언자 모하메드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우리도 믿고 있어요.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다고 우리는 생각해요.
모하메드 역시 인류를 위해서 죽으셨어요. 림머는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자신이 살아날 것이라는 말을 입증하실 수 있었어요. 여기에 이르자 이슬람교도는 머뭇거리면서 눈을 아래로 떨구고는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 예언자 모하메드가 죽은 이후에 관한 어떤 자료도 갖고 있지 않아요.
예수 그리스도는 최상의 분이시다. 예수님이야말로 죽음을 정복하고 무덤에서 승리하신 유일한 분인 것이다. 그가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께 속해 있는 한 우리도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죽음을 자청

본문: 시 116:15; 고후 4:11

1839년 5월 26일 순교하여 103위 성인 가운데 오른 장성집 이란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평소에 순교를 소원하였다. 그런 중에 열병을 앓게 되자 장성집은 "아이고! 이러다가 순교할 기회를 놓치는것이 아닌가"하고 크게 걱정하였다. 그러던 중에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를 체포하였는데 그는 매우 기뻐하였다. 포졸들이 그를 가마에 태워 끌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장성집은 "나 같은 죄인이 감히교군을 타고 가다니"하며 가마를 마다하고 스스로 걸어가는 겸손을 보였다.
장성집은 옥에 갇혀서도 밤새도록 형벌 받기를 고대했으나 포청에 끌고와 며칠이나 감옥 한 구석진 곳에 내팽개쳐 두고 문초도 없고 형벌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형에 처하려고 잡아온 사람을 어째서 형벌도 하지 않고 이렇게 내버려두는 거요"하며 순교를 자청하였다.
얼마 뒤에 포장이 그를 문초하여 배교하기를 거듭 강권했으나 대답대신에 천주교 교리를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곤장 25대를 맞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아니하였다. 결국 그의 소원대로 감옥으로 돌아와 절명하였는데, 그의 나이 54세였다.

죽음을 환영하노라

두려움의 최고봉은 죽음이다. 인간이 병을 두려워하고 가난을 두려워하고 폭행을 두려워하지만 그 배후에는 죽음이 깔려있기 때문에 결국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인생은 평생 동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심리적으로 안고 살아간다"고 지적했다. 신학자인 성 어거스틴도 친구가 죽은 뒤에 이런 고백을 썼다. "착잡한 생각이 나를 둘러쌌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무겁게 나를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참회록 중에서)
성경은 죽음에 대하여 긍정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1. 나사로의 죽음 기사에서 예수는 이 사건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정의하였다. (요11:4) 죽음이란 한 인간의 생애를 청산하는 사건이다.
그 말은 곧 그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된 영광의 순간인 것이다. 고 김환란씨가 자기가 죽으면 기쁨의 개선가를 합창해달라고 유언한 뜻도 여기에 있다.
2. 나사로의 죽음 기사에서 예수는 죽음을 "잔다"고 표현하였다. (요11:11) 잔다는 말 속에는 깨어남이 들어있다. 죽음이 최후가 아니다. 부활의 소망이 곧 죽음이다.
3. 에스겔서는 마른 뼈의 골짜기에서 죽음을 변화의 힘으로 보고있다. 마른 뼈에 하나님의 생기가 합쳐질 때 군대가 되었다.

죽음의 가치

평생을 고결한 성품을 유지하며 교육에 몸바친 스승이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맞았다. 크게 슬퍼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스승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슬러하지 말아라. 가치있는 죽음은 삶에 의미와 사랑을 부여한다는 것을 모르느냐?"
"그러나 저희는 선생님께서 언제나 살아 계셔서 저희를 지켜 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침통한 어조로 말하자 스승은 대답했다.
"참으로 살아 있는 것은 죽어야 한다. 그래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 꽃들을 보아라. 플라스틱 꽃은 죽는 법이 없다."


죽음의 계곡

인디언들이 아메리카 서부의 대평원을 거침없이 누비던 때 '죽음의 계곡'이라는 골짜기가 있었다. 용감한 개척자들. 탐험가들이 말을 달려 이 계곡으로 가기만 하면 돌아오지 못했다. 어느 날 날센 젊은이가 그 이유를 알아보기로 굳은 결심을 했다. 인디언들은 그를 말렸다. 그러나 조금도 약해지지 않고 어느 화창한 여름날 계곡을 향하여 말을 달렸다. '죽음의 계곡'근처까지 왔으나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젊은이가 계곡의 굽이까지 왔을 때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한 길은 사람이 지나기에 편한 길이고 다른 한 길은 나무가시와 덩쿨로 무성하게 얽혀진 길이었다. 양편 길 모두 계곡 아래 강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이 젊은 탐험가의 첫번째 유혹은 넓고 쉬운 통로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조심성 있는 젊은이는 나뭇가지를 꺾어 넓은 길 끝 강을 만나는 지점에 던져보았다. 놀랍고 두려운 사실이 일어났다. 나뭇가지는 땅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모래펄이었다. 마침내 젊은이는 많은 사람이 돌아올 수 없었던 이유를 알았다. 그 넓은 길은 보기에는 쉽지만 죽음의 계곡으로 직통하는 길이었다. 그는 칼을 꺼내어 좁은 길을 막고 있는 가시덩쿨을 헤치고 강으로 통하는 길을 만들었다. 길의 마지막끝에 통나무가 모래펄 위에 놓여진 것을 발견하고 이 통나무를 타고 계곡 건너편으로 안전하게 건널 수 있었다. 당신은 세상으로 통하는 넓고 쉬운 길을 택하려는가. 좁은 길로 방향을 돌려라. 그 길은 예수께서 안전하게 만드셔서 영생의 길로 이끈다.

죽음의 골짜기

본문: 벧후 3:17; 시 95:10; 사 44:20

미극 애리조나 주에서 캘리포니아로 가는 중간에 `죽음의 골짜기'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동양 사람들이 금을 캐기 위하여 마차를타고 그 골짜기를 통과하다가 죽은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그 골짜기에는 물이 없지만 신기루 현상이 생겨서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여 미궁으로 인도하엿다. 신기루는 푸른 바다와 푸른 물결같이 보였지만 사실은 모래와 돌뿐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영국의 한 노인이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 예수도 믿지 않다가 60이 넘어서 죽을 병에 걸리고 말았다. 평생 죄만 짓고 살아 온 것이 두렵고 무서웠던지 죽은 후의 운명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이웃에 사는 손녀를 불러다가 성경을 읽어 달라고 했더니 손녀는 성경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점점 어두워지고 죄책감이 더 깊어만 갔다.
어느날 이 손녀가 성경을 읽어 가다가 요한일서 1장 7절을 읽게 되었는데"....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하는 성구를 읽자 노인이 깜짝 놀라면서 "그런 말씀이 거기 있어?" "예 할아버지" "다시 읽어라" 다시 읽었다. "그런 말씀이 정말 있니?" "예 여기 있어요" "다시 읽어라" 그 소녀는 다시 읽었다.
"그 아들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애야 내 손가락을 그 성경 구절에 짚어 다오" 손녀가 짚어 드렸더니 "내가 이 말씀을 믿고 죽었다" 고 모든 사람에게 일러 달라고 부탁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죽음의 사자와 프란시스

프란시스에게 죽음의 사자가 찾아왔다.
"너를 데려가려고 왔으니 가자!"
프란시스는,
"내가 한일도 없는데 어찌 이대로 갑니까?"하며, 1년만 여유를 달라고 하니 안된다는 것이다.
"그럼 한 달간만이라도 여유를 주십시오."
"안된다. 너는 이 땅위에서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하면서 다가올 때에, 프란시스는 놀래어 깨어났다.
전신에 땀이 났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가 나왔다. 그리고 그는 헌신의 생활로 후에 성 프란시스가 되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4:8)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2:10)


죽음의 섬을 생명의 섬으로

본문: 요 12:24; 마 13:33; 딛 2:11-14

존 페이튼의 남태평양에서의 선교활동은 눈부신 것이었다. 여러 차례의 위기를 넘긴 후 일부 원주민들의 참여와 협조로 선교사업은 순조를 띠었다. 그는 한 개의 섬에 만족하지 않고 선교선을 마련하여 여러 개의 섬을 돌며 말씀을 전하고 의료, 교육 등 계몽활동도 벌였다. 원시적 세계에서의 선교활동 중에는 예기치 않은 곤경과 시험이 늘 있었고, 그 때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그를 도왔다.
한번을 섬의 반대편에 주재하던 다른 선교사 부인이 급병을 얻어 그를 구제하러 갔다가 큰 풍랑을 만났다. 배가 올바른 항로를 찾기 힘든 상황이었으나 예상밖에 간조상태가 되어 갯벌을 걸어서 살아돌아올 수 있었다. 그의 열심과 여러 가지 이적 등으로 원주민들은 그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인근 원주민 다수가 그를 찾아와 지금껏 그들이 섬기던 우상의 표적, 제의, 기구 등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고 집단개종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헌신에 힘입어 19세기가 끝날 무렵, 죽음의 섬이라 불린 남양군도에 크리스천이 30만 명에 달했다.


죽음의 수용소를 이긴 비결

나치 독일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붐 (Corrie ten Boom) 은 이런 말을 수기에 썼다. "기차가 터널 속으로 들어가 어두워졌다고 해서 당신은 기차표를 찢어 버리거나 기차에서 뛰어 내리지는 않겠지요. 조용히 앉아 기관수를 믿고 있는 것이 최선책일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터널 속으로 들어간다. 답답해지고 어두워진다. 그러나 터널은 임시적이며 통과하게끔 되어 있다. 붐씨는 기관수를 하나님으로 말했다. 침착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고통을 통과하는 좋은 방법이라는 뜻이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도 못한 헬렌 켈러는 이렇게 말했다. "소위 안전이란 막연한 것입니다. 그런 것은 자연계나 인간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긴 일생을 두고 생각할 때 위험을 피한다는 것은 과감하게 자기를 노출시키는 것보다 더 안전하지는 않습니다. 삶이란 모험을 감행하든지 혹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든지 둘 중 하나 뿐입니다."


죽음의 순간

스탈린의 딸이 뉴스위크지에 기고한 스탈린 운명의 장면은 이러했다. "
아버지는 최후의 순간이 가까왔을 때 눈을 갑자기 뜨고 방안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노한 눈이었다. 그 눈을 보는 것은 무서웠다. 그리고 나서 왼손을 들고 무엇을 가리키는 듯 하였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빛이었다. 그 팔이 떨어진 후 그는 영면하였다." 영원한 생명도 하나님의 나라도 믿지 않을 때 누구나 이런 고통스러운 최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요한 웨슬레의 동생이며 찬송가 작가인 찰즈 웨슬레는 운명 직전에 이런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니 기쁩니다. 아 만족하다. 만족하다." 얼마나 평화스럽고 행복한 죽음인가. 자기를 천국에 맞이해 주시는 하나님의 기쁜 낯을 그는 보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마음 속에는 죽음의 시간이 모든 것이 끝나는 시간으로 생각되지 않고 새로운 시작으로 믿어진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죽음은 피리어드가 아니라 콤마이다.


죽음의 이유

프랑스의 억만 장자인 자케풍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재계의 변동으로 막대한 재산의 피해를 입어서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그의 전 재산이 약 10만달러 남아 있다는 통고를 은행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10만 달러가 적은 돈은 아니지만, 자케풍은 그 충격으로 죽었습니다. 한편, 자케풍의 가난한 조카 한 사람은 바로 그의 아저씨 재산의 상속자라는 소식을 듣고서 갑자기 10만 달러 라는 거액이 생겼다는 소식에 충격으로 죽었습니다.
같은 돈을 가지고 한 사람은 적다고 죽고, 한 사람은 너무 많아서 충격 받아서 죽었습니다.


죽음의 장벽을넘어서

시인으로 잘 알려진 80살된 테니스 경이 영국에 있는 피서지에서 겨울을 지내려고 섬에 있는 별장으로 배를 타고 가고 있었읍니다. 배가 해협을 지나자 큰 물결이 항구 입구에 있는 방파제를 치는 우렁찬 소리가 들려 왔읍니다. 그는 폭풍이 오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이 항해를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읍니다. 며칠 뒤에 테니스경의 건강이 나빠져서 간호원 한 사람이 그 섬에 와서 같이 있게 되었읍니다. 간호원은 그와 이야기를 하다가 “선생님, 시는 많이 지으셨는데 찬송가 가사는 별로 쓰지 않으셨더군요. 지금 이 병상에서 찬송가를 한 편 쓰시면 병으로 고통받는 다른 사람들이 큰 도움과 위로를 받게 될 텐데요”하고 조심스럽게 말했읍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지난 밤에 몇 구절을 적어보았지”하면서 종이 한장을 간호원에게 전해 주었읍니다. 그 시에는 죽음을 연상케 하는 울부짖는 바다가 풍부한 감정으로 그려져 있었읍니다. 방파제에서 들려 오는 구슬픈 소리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나 시적인 표현이 훌륭했다기 보다는 인생의 여로가 끝날 때에 예수님을 만나뵈는 영광스런 소망을 잘 표현하고 있었읍니다. 그 시의 한 대목을 여기에 소개합니다.
“저녁 노을, 밤 하늘 별들 속에, 나를 부르는 분명한 소리 들리네. 삶을 떠난 죽음의 소리일까? 암흑을 몰고 땅거미가 내리고 밤을 알리는 종소리 들리네. 폭풍이 나를 밀어 내어, 인생의 끝날까지 밀려 났을지라도, 죽음의 장벽 넘었을 때에, 나의 안내자,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만나리.” 죽는다는 것은 불길하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갈망하던 천국에 안전하게 인도될 것입니다.


죽음의 종국

한 어머니가 데이빗 B.영 목사를 찾아와서 제발 제 아이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어린 아이가 농장에서 사고로 죽었다는 전화를 받은 것은 새벽 4시 경이었습니다. 병원에 달려가자 그 아이의 어머니는 자기 아이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를 안고 있었는데 저는 그 아이가 심하게 다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니였습니다. 그녀는 죽은 아이를 안고 기도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순간 해답만 있다면 그녀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린 소년을 다시 살아나게 해달라는 기도는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녀와 그 가족을 위한 기도는 했지만 이미 죽은 아이를 위한 기도를 하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모두가 어찌할 수 없는 죽음의 종국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에 대해 무기력하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 가운데 살아나신 예수님 안에서 희망을 가집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그가 자기와 함께 우리를 살리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기 전에 그에게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죽음의 준비

시골에 있는 어느 가난한 집 어린아이가 중병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죽음은 이미 결정적이었으나 부모들은 좀체로 단념하지 않았다. 어린 소녀는 슬퍼하는 부모를 쳐다보면서 "엄마, 나는 곧 하늘의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될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아"
부모들은 그래도 미련이 있어서 딸아이가 죽지 않는다고 격려하였다.
그런데 이 아이는 "엄마 너무 슬퍼하지마.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영원한 곳에서 같이 살텐데.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터인데요" 곧 내일을 믿고 사는 짤막한 이 소녀의 생애가 기독교의 기본적인 신앙을 잘 간증해 주고 있다.


죽음의 준비

미국의 어느 부자가 죽었을 때 그의 노예 중에 독실한 신자가 주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그 노예에게 "당신의 주인이 하늘나라에 갔으니 울지 말라"고 사람들이 격려를 했다.
그랬더니 그 노예의 대답이 "아마 그렇지 못할 것이다.
우리 주인은 여행을 가시든지 놀러 가든지 농사일을 할 때에 언제나 준비를 철저히 하는 사람이었는데, 죽음을 위해선 아무런 준비도 없었고, 예수 그리스도도 믿지 않고 죽었다" 고 대답했다.

참 신앙은 죽음 앞에서 빛을 발한다


‘제2차 세계대전’ ‘가장 긴 밤’ 등을 집필한 작가 코넬리어스 라이언은 5년간 암으로 투병하다가 사망했다. 그는 투병 중에도 매일 아침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오늘도 좋은 날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라이언은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한결같은 기도를 올렸다.
하루는 아내가 무엇이 그렇게 감사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라이언이 대답했다.
“새 날을 맞는 다섯 가지 기쁨이 있어요.
첫째, 사랑하는 당신을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가족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셋째, 병들어 눕기 전에 작품을 탈고한 것이 감사하지요.
넷쩨, 병마와 싸울 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주님이 지금 저와 가까운 곳에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참 신앙은 죽음 앞에서 빛을 발한다. 평온할 때는 모두가 참 신앙인처럼 보인다. 인생의 위기를 만날 때 비로소 신앙의 진위가 가려진다.
- 모퉁이돌

예화포커스(1- 50권)
목사이자 현직 고등학교 교사인 저자가 엮은 예화 백과사전이다. 추상적인 진리를 구체화하는 데 유용한 예화 중에서도 아주 감동적이고 신선하고 생동감 넘치는 것들을 가려 실었다. 이 예화집은 가정, 감사, 건강, 교회, 믿음, 교육, 소망, 사랑, 성공, 용서, 찬송, 행복, 등 각 주제별(전 50권)로 되어 있으며, 성경말씀, 명언, 묵상자료 등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본서를 통해 목회자들은 은혜로운 설교를 하게 되고, 성도들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새사람이 되어 늘 샘물같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한태완 목사 지음, 좋은땅, 각 권 값4,3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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