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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초월하는 생각의 힘
본문: 빌립보서 1장 3-6절
< 생각의 힘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
가을이 깊어지면서 옛날에 읽었던 <오 헨리>의 작품 <마지막 잎새>가 생각납니다. 늦은 가을 초라한 3층 지붕 밑 방에서 존지라는 소녀가 폐렴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녀에게 있어서 폐렴보다 큰 문제는 의지를 잃어버린 감상주의였습니다.
존지는 자기 병상에서 보이는 건너편 집 담장에 있는 담쟁이 넝쿨을 바라보면서 그 넝쿨의 잎이 마지막으로 떨어지면 자신의 생명도 끝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언니 수우는 말합니다. "담쟁이 잎이 너의 생명과 무슨 상관이야."
그러나 존지는 대답합니다. "아냐. 언니. 저 잎이 떨어지면 나도 분명히 죽을 거야."
드디어 담쟁이 넝쿨의 마지막 한 잎새가 남았습니다. 존지는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마지막 잎새가 남았던 그날 밤은 유난히 비바람이 심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존지는 떨어진 마지막 잎새의 흔적을 보려고 커튼을 젖혀달라 했는데 놀랍게도 그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지 않고 아침햇살에 더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은 다음날도, 그리고 그 다음날도 마지막 잎새가 붙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그 마지막 잎새는 이미 떨어졌는데, 그 집 1층에 사는 걸작품 하나 그리지 못한
노(老) 화가 베어먼 할아버지가 그 담장에 그 마지막 잎새를 그려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그려진 담쟁이 넝쿨의 마지막 잎새 하나가 결국 존지를 병에서 일으킵니다.
생각의 힘은 우리는 생각을 초월합니다. 죽는다고 생각하면 살 확률이 줄어듭니다. 그러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죽을 확률이 극히 줄어듭니다. 잘 생각해야 합니다.
< 생각할 때마다 감사해야 합니다 >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피땀 흘려 개척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로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우리는 이런 말을 많이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배우자에게 이런 말 많이 하십시오. "여보!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정말 감사해요!"
부모님에게도 "부모님을 생각할 때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많이 하십시오. 자녀들에게도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한단다"라고 말하십시오. 그렇게 생각하면 더 감사가 나오게 되고, 얼마나 행복하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저도 우리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자주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제가 이렇게 건강하게 목회 잘 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기도와 사랑 때문임을 압니다.
그런 식으로 서로 기쁨을 주고 서로 감사하면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일입니까? 믿는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 있습니까?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는 모습에 있습니다.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대개 은혜를 알고 기억하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상처와 원한은 금방 잊어버리되 은혜를 잊는 건망증은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받은 상처는 평생 잊지 못하지만 받은 은혜는 금방 잊어버립니다. 잘되면 자기가 잘 나서 된 것이고, 잘못되면 남을 탓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성숙한 인격의 표시입니다.
여러분! 정말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은혜를 기억하며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얼마나 감사할 일이 많은지 모릅니다. 정말 기가 막힐 정도입니다. 먹는 문제를 걱정하지 않는 것도 감사한 일이고, 전쟁이 없는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때로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찾아와도 자세히 보면 그것이 꼭 불행만은 아닙니다. 어떤 분의 간증입니다. 그분은 최고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일에 매달렸습니다. 그처럼 일에 매달리다보니까 자기도 없고, 가족도 없고, 이웃도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사람 관계가 없으면 스트레스와 짜증이 심해지고 얼굴도 어두워집니다. 그러다 어느 날 쓰러집니다. 이제 건강을 잃었으니 거의 다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바로 그때 그가 찾은 것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중요성'입니다. 병상에 있을 때 사람들이 그를 정성스럽게 돌봐주는 모습을 보고 그는 깨닫습니다. "사랑 받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이제는 저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지."
그렇게 가치관을 일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바꾼다면 그 병은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깊이 생각해보면 나의 삶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계만 보지 말고 신령한 세계를 생각할 줄 알아야합니다. 눈에 보이는 건강은 잃어도 더 소중한 사랑과 믿음을 얻게 되는 경우가 많고, 때로 어떤 일에 실패하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모처럼 겸손하게 되지 않습니까? 이러한 감사의 영성을 가지고 상황을 해석하면 모든 상황이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러면 어려워도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려고 훈련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런 생각이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축복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초석이 됩니다.
< 감사는 생각의 방향을 잘 잡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깊이 생각하면서 생각의 방향을 잘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감사가 나옵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생각을 깊이 하면 감사할 일은 없고 원망할 일만 생겨납니다.
사람에게 원망이 많은 것은 원래 악해서라기보다는 방향을 잘못 잡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감사의 방향으로 조금만 바꾸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우산 없이 비를 맞고 걸어가다가 나직한 소리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비가 와도 빗물이 눈으로 흐르지 않도록 눈썹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가다 생각해보니까 또 감사할 일이 생겨서 그는 또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 콧구멍을 밑으로 뚫어주셔서 비가 와도 숨쉴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도는 그처럼 생각할 때마다 감사거리를 발견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이란 마치 그림과 같아서 밝은 부분도 있고, 어두운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밝은 부분을 보기로 작정하여 감사하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고,
어두운 부분을 보기로 작정하여 불평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사는 자신의 선택이요, 그처럼 감사를 선택하면 삶이 행복해집니다. 그런데 왜 삶이 피곤하고 느껴집니까? 서로 시기하고 원망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교회에 다니는 두 사람이 너무 미워해서 서로의 축복을 갉아먹는 것을 보고 천사가 안타깝게 그들을 보다가 서로를 축복하며 살도록 그들에게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너희 중에 누가 기도하면 그 옆의 사람에게 두 배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옆 사람 때문에 두 배를 받게 되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한 사람이 100억을 달라고 하려는데 옆 사람이 200억 받는 것이 배가 아파서 금방 기도제목을 바꿔 기도했습니다. "천사님! 저에게 100원만 주세요!"
그러자 옆 사람은 겨우 200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200원 들고 너무 화가 나 "정말 아주 나쁜 친구야! 어떻게 저럴 수 있나?"고 하면서 그가 천사에게 기도했습니다.
"천사님! 제 한쪽 눈을 뽑아주세요."
우리가 옆 사람을 감사와 기쁨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시기의 대상으로만 본다면 그런 마음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과 행복이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마음이 인간의 보편적인 마음이기에 우리는 감사를 작정해야 합니다. 오해하기로 작정하면 오해할 일뿐이지만 이해하기로 작정하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해(5해)가 있어도 생각을 세 번 고쳐먹으면(3을 빼면) 이해(2해)할 수 있고, 이해(2해)를 두 번만 할 수 있으면 감사(감4)할 수 있고, 사랑(4랑)할 수 있다."
이처럼 생각을 조금만 고쳐먹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감사거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미국의 한 성도가 기차를 타고 가면서 눈을 감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옆자리에서 쿵 소리가 들렸습니다. 깜짝 놀라 눈을 뜨고 보니까 덩치가 큰 흑인 여자가 아이들 5명을 데리고 자기 옆자리에 앉은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숨이 막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입에서 감사가 나왔습니다.
"하나님! 제 옆에 앉은 이 흑인 여자가 제 아내가 아닌 것에 대해서 정말 감사합니다." 생각을 건설적이고 창조적으로 바꿔보십시오. 그러면 범사에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어느 상황이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좋은 면을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꿔 감사하기 시작하면 그 생각이 상황을 바꾸는 위대한 능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무엇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구하십시오. 바로 그런 분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고, 축복을 받을만한 성도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보기에 누가 가장 훌륭한 성도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도하는 사람, 헌신하는 사람도 훌륭한 성도이지만 무엇보다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고통을 축복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결정적인 태도가 바로 감사입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넘치도록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며 얻은 축복은 오래가지만 불평하며 얻은 것은 금방 사라집니다. 요새 보면 조금 불편한 일이 생기기만 하면 떼를 쓰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동네 주민 모아다가 떼를 쓰면 돈이 나오는 줄 알고 길을 점령하고 데모하고, 결국 수천 만원씩의 보상금을 탑니다. 그러면서 돈이 생겼다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떼를 쓰고 받은 돈이 행복의 조건이 되는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압니다. 나중에 보면 그 돈으로 한눈을 팔아 그때부터 가정의 행복이 깨지고 삶이 타락합니다. 또한 자녀들이 병들어서 떼를 쓰고 받은 보상금 두 배가 아픔을 동반한 채 지출됩니다. 그처럼 불평하며 얻은 돈 때문에 진정한 행복을 놓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아무도 인생을 자신할 수 없습니다. 그저 겸손히 만족하며 감사하며 사는 삶이 행복입니다. 행복은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의 것이 아니라 많이 감사하며 누리며 사는 사람의 것입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불평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 계절을 누리며 살면 얼마나 좋습니까? 믿는 사람에게 모든 세계와 상황은 하나님의 은혜가 곳곳에 미쳐있는 것으로 보여야 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을 통해서 공동체에 평화가 주어지고, 자기에게도 행복과 축복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감사는 축복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인생 성숙의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들에게 철 들어야 한다고 자주 말하는데 철드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구원의 기준은 십자가의 복음이지만, 철이 드는 기준은 감사하는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며 믿는 사람답게 살려고 해야 합니다.
< 감사는 헌신을 아는 겸손한 사람의 몫입니다 >
감사를 아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헌신과 겸손입니다. 사도 바울이 생각할 때마다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있었던 것은 빌립보 교인들의 사도 바울의 선교사역에 최선을 다해 헌신하고 후원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들은 최선을 다해 바울의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려면 어려울 때 찾아와서 도와주는 것은 필수적인 자세입니다. 사실상 어려울 때는 불평이 생기기 쉽고 서로에 대해 손가락질을 하기 쉬운 때입니다. 그때 서로 격려하며 도와주며 서로를 위해 헌신할 때 진정한 감사가 꽃피게 됩니다. 교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인들이 서로에게 헌신하며 감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분위기가 정말 좋아지고, 교회의 분위기가 좋아지면 교인은 행복해집니다. 누가 가장 아름다운 작품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까? 바로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 보기에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여도 헌신하는 사람은 누구보다 걸작 인생입니다.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베어먼 할아버지는 평생 걸작품하나 남기지 못한 화가였지만 그는 존지를 살리려고 추운 밤에 담쟁이 넝쿨의 마지막 잎새를 힘써 그리다가
폐렴을 앓게 되고 결국 존지가 회복된 그날, 베어먼 할아버지는 대신 죽게 됩니다. 그러나 베어먼 할아버지의 <마지막 잎새>야말로 어느 작품보다 훌륭한 작품이었고, 그 할아버지의 인생 자체가 작품 인생입니다. 고귀한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한 목사님으로부터 한 권사님에 대한 감사의 고백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권사님은 성경도 많이 알고 교회 일도 도맡아 하는데도 항상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나이 어린 전도사님에게도 철저히 순종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훌륭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겸손하게 헌신하며 살면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이 되겠습니까? 어떤 분은 셋방살이를 하지만 기쁨으로 살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앞장서서 도와줍니다. 어떤 분은 '선교'라는 말만 들어도 마음이 뜨거워지며 정성을 다해 선교에 동참합니다. 몽고의 김재호 선교사님이 차가 없어서 고생한다는 얘기를 듣고 월세를 내기조차 힘들어 힘들어하던 한 분이 그 월세를 제게 가져왔을 때 그 모습에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요, 그런 신비로운 헌신이 가장 큰 감사제목이 아니겠습니까? 가장 가난한 사람이 가장 남을 돕는 일에 앞장설 수 있다는 것!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가장 배우지 못한 사람이 가장 지혜로울 수 있다는 것도 신앙의 신비가 아니겠습니까? 가장 약해 보이는 사람이 가장 깊은 신앙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신앙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신앙을 소유한 분들을 잊지 않고 반드시 축복을 예비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헌신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헌신할 수 있었을까요? 자세히 보면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모를 때 모두 죄인의 신분이었고, 죽을 수밖에 없는 사형수들이었습니다. 항상 그 사실을 생각하며 겸손한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그처럼 자신의 원래 신분을 생각하며 자기를 작게 생각하는 사람은 감사하게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기를 크게 생각하는 사람은 원망을 하게 됩니다. 부부간에도 아내가 자기를 작게 여기면 남편이 크게 보이고 남편에게 감사하게 됩니다. 거울 볼 때마다 점차 표면적이 넓어지는 자기 모습을 보며 남편에 대한 감사가 깊어집니다.
"이런 나를 찾아 밤마다 집에 와 주는 남편이 고맙다. 사흘에 하루만 들어와도 고맙지." 남편도 자기를 작게 여기면 아내가 크게 보이고 아내에 대한 감사가 나오게 됩니다.
남편은 자기가 고집이 강한 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알기에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 같은 고집스런 남편을 보고도 '남 편' 들지 않고 항상 '내 편' 들어주니까 고맙다. 내가 만약 여자라면 나는 절대로 나 같은 사람과는 살지 못할 거야."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남편에 대해, 아내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높게 보는 사람은 생각할 때마다 감사한 일은 없고 불평뿐입니다.
"내가 어쩌다 저런 사람은 만나서 이런 고생을 하나? 이것은 정말 역사적인 실수야."
그렇게 자기를 높게 생각하니까 결혼이 억울하고 항상 손해본 것 같습니다. 이런 자기에 대한 거품평가를 없애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삶에 IMF가 없게 됩니다. 실속도 없이 자기를 높이면 감사가 없어지고 그때부터 삶이 불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겸손하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감사할 일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감사가 없는 이유는 건방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자신을 높게 평가하지 말고 진실하게 평가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정당한 자기 평가가 없이 자기를 높이면 많은 사람을 괴롭히면서 살게 됩니다. 그러한 삶이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잊지 말고 겸손해야 합니다. 자녀교육 중에서 최고의 자녀교육이 무엇일까요? 겸손한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아빠는 아이들에게 자기 아내를 높여주면서 항상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내가 이제까지 가장 성공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너희 엄마를 만난 거야." 이 가정이 행복할까요? 불행할까요? 아마 최고로 행복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날마다 부부가 아이들을 자기 편 만드는 싸움을 해보십시오.
"너 결혼 잘해야 돼! 앞으로 너의 아빠 같은 사람하고는 절대로 만나면 안돼!"
그 가정과 그 자녀들이 그 말을 듣고 행복하게 될까요? 불행을 자초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겸손하게 평가하면서 "만족한다, 감사한다"는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한 사람은 항상 권리보다 책임을 많이 생각하는 귀한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분은 당연한 권리를 얻어도 "나는 받을만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하고 봉급을 받을 때 당연히 받는 것이지만 "나는 받을만해!"라고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참 감사한다!"라고 생각하면서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삶의 모든 순간이 오직 감사한 것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공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영성이 무엇입니까? 철든 믿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대의 영성은 감사에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물을 보십시오. 그러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보십시오. 그러면 예쁜 구석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 저 사람에게 저렇게 좋은 면이 있었다니!" 하고 감탄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불평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 항상 감사하는 믿음으로 사십시오 >
범사에 감사해보십시오. 감사는 축복을 예비하는 것이고, 원망은 망하는 길입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형제가 있었는데 둘의 가는 길이 전혀 달랐습니다.
형은 열심히 살면서 매사에 헌신하는 삶을 살아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매사에 이기적으로 살다가 결국 친구를 죽여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동생의 사형선고 소식을 듣고 형은 주지사를 찾아가 끈질기게 사면 요청을 했습니다. 몇 년 만에 사면장을 받고, 동생에게 면회를 가서 동생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만약 내가 사면장을 가져와서, 네가 사면되어 감옥에서 나가면 앞으로 어떻게 살겠니?"
그랬더니 동생은 자기를 잡아넣은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형은 동생이 더 큰 죄를 지을 것 같아 그 사면장을 찢어버렸다고 합니다.
불행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며 원망하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습니다. 착하고 선하게 살겠다고 다짐하고 감사하면서 살려고 할 때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원망할 조건이 있을지라도 그 속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과 생각은 꽃밭과 같고, 불평하는 마음과 생각은 가시밭과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생각에 따라 감사의 샘이 될 수도 있고. 원망의 시궁창이 될 수도 있습니다. 헬렌 켈러는 사흘만이라도 보기를 원했는데, 우리는 사흘이 아니라 평생을 눈뜨고 사는데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부터 시작해서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무엇보다 우리의 감사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수많은 곳에서 '감사의 제물'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 어떤 제물보다 더욱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더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처럼 감사한 생각을 가지면 <우리의 생각을 초월한 축복>이 반드시 주어질 것입니다. 항상 범사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예비하며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
예화포커스
목사이자 현직 고등학교 교사인 저자가 엮은 예화 백과사전이다. 추상적인 진리를 구체화하는 데 유용한 예화 중에서도 아주 감동적이고 신선하고 생동감 넘치는 것들을 가려 실었다. 이 예화집은 믿음, 교육, 소망, 사랑, 성공, 용서, 찬송, 행복 등 각 주제별(전 50권)로 되어 있으며, 성경말씀, 명언, 묵상자료 등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한 태 완 목사 편저, 좋은 땅 (전화:386-8660), 각 권 값3,800원
http://truthway.ce.ro, http://allcome.ce.ro
본문: 빌립보서 1장 3-6절
< 생각의 힘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
가을이 깊어지면서 옛날에 읽었던 <오 헨리>의 작품 <마지막 잎새>가 생각납니다. 늦은 가을 초라한 3층 지붕 밑 방에서 존지라는 소녀가 폐렴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녀에게 있어서 폐렴보다 큰 문제는 의지를 잃어버린 감상주의였습니다.
존지는 자기 병상에서 보이는 건너편 집 담장에 있는 담쟁이 넝쿨을 바라보면서 그 넝쿨의 잎이 마지막으로 떨어지면 자신의 생명도 끝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언니 수우는 말합니다. "담쟁이 잎이 너의 생명과 무슨 상관이야."
그러나 존지는 대답합니다. "아냐. 언니. 저 잎이 떨어지면 나도 분명히 죽을 거야."
드디어 담쟁이 넝쿨의 마지막 한 잎새가 남았습니다. 존지는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마지막 잎새가 남았던 그날 밤은 유난히 비바람이 심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존지는 떨어진 마지막 잎새의 흔적을 보려고 커튼을 젖혀달라 했는데 놀랍게도 그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지 않고 아침햇살에 더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은 다음날도, 그리고 그 다음날도 마지막 잎새가 붙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그 마지막 잎새는 이미 떨어졌는데, 그 집 1층에 사는 걸작품 하나 그리지 못한
노(老) 화가 베어먼 할아버지가 그 담장에 그 마지막 잎새를 그려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그려진 담쟁이 넝쿨의 마지막 잎새 하나가 결국 존지를 병에서 일으킵니다.
생각의 힘은 우리는 생각을 초월합니다. 죽는다고 생각하면 살 확률이 줄어듭니다. 그러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죽을 확률이 극히 줄어듭니다. 잘 생각해야 합니다.
< 생각할 때마다 감사해야 합니다 >
우리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피땀 흘려 개척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로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우리는 이런 말을 많이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배우자에게 이런 말 많이 하십시오. "여보!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정말 감사해요!"
부모님에게도 "부모님을 생각할 때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많이 하십시오. 자녀들에게도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한단다"라고 말하십시오. 그렇게 생각하면 더 감사가 나오게 되고, 얼마나 행복하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저도 우리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자주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제가 이렇게 건강하게 목회 잘 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기도와 사랑 때문임을 압니다.
그런 식으로 서로 기쁨을 주고 서로 감사하면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일입니까? 믿는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 있습니까?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는 모습에 있습니다.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대개 은혜를 알고 기억하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상처와 원한은 금방 잊어버리되 은혜를 잊는 건망증은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받은 상처는 평생 잊지 못하지만 받은 은혜는 금방 잊어버립니다. 잘되면 자기가 잘 나서 된 것이고, 잘못되면 남을 탓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성숙한 인격의 표시입니다.
여러분! 정말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은혜를 기억하며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얼마나 감사할 일이 많은지 모릅니다. 정말 기가 막힐 정도입니다. 먹는 문제를 걱정하지 않는 것도 감사한 일이고, 전쟁이 없는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때로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찾아와도 자세히 보면 그것이 꼭 불행만은 아닙니다. 어떤 분의 간증입니다. 그분은 최고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일에 매달렸습니다. 그처럼 일에 매달리다보니까 자기도 없고, 가족도 없고, 이웃도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사람 관계가 없으면 스트레스와 짜증이 심해지고 얼굴도 어두워집니다. 그러다 어느 날 쓰러집니다. 이제 건강을 잃었으니 거의 다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바로 그때 그가 찾은 것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중요성'입니다. 병상에 있을 때 사람들이 그를 정성스럽게 돌봐주는 모습을 보고 그는 깨닫습니다. "사랑 받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이제는 저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지."
그렇게 가치관을 일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바꾼다면 그 병은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깊이 생각해보면 나의 삶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계만 보지 말고 신령한 세계를 생각할 줄 알아야합니다. 눈에 보이는 건강은 잃어도 더 소중한 사랑과 믿음을 얻게 되는 경우가 많고, 때로 어떤 일에 실패하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모처럼 겸손하게 되지 않습니까? 이러한 감사의 영성을 가지고 상황을 해석하면 모든 상황이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러면 어려워도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려고 훈련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런 생각이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축복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초석이 됩니다.
< 감사는 생각의 방향을 잘 잡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깊이 생각하면서 생각의 방향을 잘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감사가 나옵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생각을 깊이 하면 감사할 일은 없고 원망할 일만 생겨납니다.
사람에게 원망이 많은 것은 원래 악해서라기보다는 방향을 잘못 잡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감사의 방향으로 조금만 바꾸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우산 없이 비를 맞고 걸어가다가 나직한 소리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비가 와도 빗물이 눈으로 흐르지 않도록 눈썹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가다 생각해보니까 또 감사할 일이 생겨서 그는 또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 콧구멍을 밑으로 뚫어주셔서 비가 와도 숨쉴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도는 그처럼 생각할 때마다 감사거리를 발견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이란 마치 그림과 같아서 밝은 부분도 있고, 어두운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밝은 부분을 보기로 작정하여 감사하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고,
어두운 부분을 보기로 작정하여 불평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사는 자신의 선택이요, 그처럼 감사를 선택하면 삶이 행복해집니다. 그런데 왜 삶이 피곤하고 느껴집니까? 서로 시기하고 원망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교회에 다니는 두 사람이 너무 미워해서 서로의 축복을 갉아먹는 것을 보고 천사가 안타깝게 그들을 보다가 서로를 축복하며 살도록 그들에게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너희 중에 누가 기도하면 그 옆의 사람에게 두 배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옆 사람 때문에 두 배를 받게 되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한 사람이 100억을 달라고 하려는데 옆 사람이 200억 받는 것이 배가 아파서 금방 기도제목을 바꿔 기도했습니다. "천사님! 저에게 100원만 주세요!"
그러자 옆 사람은 겨우 200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200원 들고 너무 화가 나 "정말 아주 나쁜 친구야! 어떻게 저럴 수 있나?"고 하면서 그가 천사에게 기도했습니다.
"천사님! 제 한쪽 눈을 뽑아주세요."
우리가 옆 사람을 감사와 기쁨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시기의 대상으로만 본다면 그런 마음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의 축복과 행복이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마음이 인간의 보편적인 마음이기에 우리는 감사를 작정해야 합니다. 오해하기로 작정하면 오해할 일뿐이지만 이해하기로 작정하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해(5해)가 있어도 생각을 세 번 고쳐먹으면(3을 빼면) 이해(2해)할 수 있고, 이해(2해)를 두 번만 할 수 있으면 감사(감4)할 수 있고, 사랑(4랑)할 수 있다."
이처럼 생각을 조금만 고쳐먹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감사거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미국의 한 성도가 기차를 타고 가면서 눈을 감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옆자리에서 쿵 소리가 들렸습니다. 깜짝 놀라 눈을 뜨고 보니까 덩치가 큰 흑인 여자가 아이들 5명을 데리고 자기 옆자리에 앉은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숨이 막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입에서 감사가 나왔습니다.
"하나님! 제 옆에 앉은 이 흑인 여자가 제 아내가 아닌 것에 대해서 정말 감사합니다." 생각을 건설적이고 창조적으로 바꿔보십시오. 그러면 범사에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어느 상황이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좋은 면을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꿔 감사하기 시작하면 그 생각이 상황을 바꾸는 위대한 능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무엇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구하십시오. 바로 그런 분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고, 축복을 받을만한 성도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보기에 누가 가장 훌륭한 성도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도하는 사람, 헌신하는 사람도 훌륭한 성도이지만 무엇보다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고통을 축복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결정적인 태도가 바로 감사입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넘치도록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며 얻은 축복은 오래가지만 불평하며 얻은 것은 금방 사라집니다. 요새 보면 조금 불편한 일이 생기기만 하면 떼를 쓰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동네 주민 모아다가 떼를 쓰면 돈이 나오는 줄 알고 길을 점령하고 데모하고, 결국 수천 만원씩의 보상금을 탑니다. 그러면서 돈이 생겼다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떼를 쓰고 받은 돈이 행복의 조건이 되는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압니다. 나중에 보면 그 돈으로 한눈을 팔아 그때부터 가정의 행복이 깨지고 삶이 타락합니다. 또한 자녀들이 병들어서 떼를 쓰고 받은 보상금 두 배가 아픔을 동반한 채 지출됩니다. 그처럼 불평하며 얻은 돈 때문에 진정한 행복을 놓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아무도 인생을 자신할 수 없습니다. 그저 겸손히 만족하며 감사하며 사는 삶이 행복입니다. 행복은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의 것이 아니라 많이 감사하며 누리며 사는 사람의 것입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불평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 계절을 누리며 살면 얼마나 좋습니까? 믿는 사람에게 모든 세계와 상황은 하나님의 은혜가 곳곳에 미쳐있는 것으로 보여야 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을 통해서 공동체에 평화가 주어지고, 자기에게도 행복과 축복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감사는 축복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인생 성숙의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들에게 철 들어야 한다고 자주 말하는데 철드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구원의 기준은 십자가의 복음이지만, 철이 드는 기준은 감사하는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며 믿는 사람답게 살려고 해야 합니다.
< 감사는 헌신을 아는 겸손한 사람의 몫입니다 >
감사를 아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헌신과 겸손입니다. 사도 바울이 생각할 때마다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있었던 것은 빌립보 교인들의 사도 바울의 선교사역에 최선을 다해 헌신하고 후원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들은 최선을 다해 바울의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려면 어려울 때 찾아와서 도와주는 것은 필수적인 자세입니다. 사실상 어려울 때는 불평이 생기기 쉽고 서로에 대해 손가락질을 하기 쉬운 때입니다. 그때 서로 격려하며 도와주며 서로를 위해 헌신할 때 진정한 감사가 꽃피게 됩니다. 교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인들이 서로에게 헌신하며 감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분위기가 정말 좋아지고, 교회의 분위기가 좋아지면 교인은 행복해집니다. 누가 가장 아름다운 작품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까? 바로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 보기에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여도 헌신하는 사람은 누구보다 걸작 인생입니다.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베어먼 할아버지는 평생 걸작품하나 남기지 못한 화가였지만 그는 존지를 살리려고 추운 밤에 담쟁이 넝쿨의 마지막 잎새를 힘써 그리다가
폐렴을 앓게 되고 결국 존지가 회복된 그날, 베어먼 할아버지는 대신 죽게 됩니다. 그러나 베어먼 할아버지의 <마지막 잎새>야말로 어느 작품보다 훌륭한 작품이었고, 그 할아버지의 인생 자체가 작품 인생입니다. 고귀한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한 목사님으로부터 한 권사님에 대한 감사의 고백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권사님은 성경도 많이 알고 교회 일도 도맡아 하는데도 항상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나이 어린 전도사님에게도 철저히 순종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훌륭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겸손하게 헌신하며 살면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이 되겠습니까? 어떤 분은 셋방살이를 하지만 기쁨으로 살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앞장서서 도와줍니다. 어떤 분은 '선교'라는 말만 들어도 마음이 뜨거워지며 정성을 다해 선교에 동참합니다. 몽고의 김재호 선교사님이 차가 없어서 고생한다는 얘기를 듣고 월세를 내기조차 힘들어 힘들어하던 한 분이 그 월세를 제게 가져왔을 때 그 모습에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요, 그런 신비로운 헌신이 가장 큰 감사제목이 아니겠습니까? 가장 가난한 사람이 가장 남을 돕는 일에 앞장설 수 있다는 것!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가장 배우지 못한 사람이 가장 지혜로울 수 있다는 것도 신앙의 신비가 아니겠습니까? 가장 약해 보이는 사람이 가장 깊은 신앙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신앙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신앙을 소유한 분들을 잊지 않고 반드시 축복을 예비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헌신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헌신할 수 있었을까요? 자세히 보면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모를 때 모두 죄인의 신분이었고, 죽을 수밖에 없는 사형수들이었습니다. 항상 그 사실을 생각하며 겸손한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그처럼 자신의 원래 신분을 생각하며 자기를 작게 생각하는 사람은 감사하게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기를 크게 생각하는 사람은 원망을 하게 됩니다. 부부간에도 아내가 자기를 작게 여기면 남편이 크게 보이고 남편에게 감사하게 됩니다. 거울 볼 때마다 점차 표면적이 넓어지는 자기 모습을 보며 남편에 대한 감사가 깊어집니다.
"이런 나를 찾아 밤마다 집에 와 주는 남편이 고맙다. 사흘에 하루만 들어와도 고맙지." 남편도 자기를 작게 여기면 아내가 크게 보이고 아내에 대한 감사가 나오게 됩니다.
남편은 자기가 고집이 강한 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알기에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 같은 고집스런 남편을 보고도 '남 편' 들지 않고 항상 '내 편' 들어주니까 고맙다. 내가 만약 여자라면 나는 절대로 나 같은 사람과는 살지 못할 거야."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남편에 대해, 아내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높게 보는 사람은 생각할 때마다 감사한 일은 없고 불평뿐입니다.
"내가 어쩌다 저런 사람은 만나서 이런 고생을 하나? 이것은 정말 역사적인 실수야."
그렇게 자기를 높게 생각하니까 결혼이 억울하고 항상 손해본 것 같습니다. 이런 자기에 대한 거품평가를 없애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삶에 IMF가 없게 됩니다. 실속도 없이 자기를 높이면 감사가 없어지고 그때부터 삶이 불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겸손하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감사할 일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감사가 없는 이유는 건방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자신을 높게 평가하지 말고 진실하게 평가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정당한 자기 평가가 없이 자기를 높이면 많은 사람을 괴롭히면서 살게 됩니다. 그러한 삶이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잊지 말고 겸손해야 합니다. 자녀교육 중에서 최고의 자녀교육이 무엇일까요? 겸손한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아빠는 아이들에게 자기 아내를 높여주면서 항상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내가 이제까지 가장 성공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너희 엄마를 만난 거야." 이 가정이 행복할까요? 불행할까요? 아마 최고로 행복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날마다 부부가 아이들을 자기 편 만드는 싸움을 해보십시오.
"너 결혼 잘해야 돼! 앞으로 너의 아빠 같은 사람하고는 절대로 만나면 안돼!"
그 가정과 그 자녀들이 그 말을 듣고 행복하게 될까요? 불행을 자초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겸손하게 평가하면서 "만족한다, 감사한다"는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한 사람은 항상 권리보다 책임을 많이 생각하는 귀한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분은 당연한 권리를 얻어도 "나는 받을만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하고 봉급을 받을 때 당연히 받는 것이지만 "나는 받을만해!"라고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참 감사한다!"라고 생각하면서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삶의 모든 순간이 오직 감사한 것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공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영성이 무엇입니까? 철든 믿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대의 영성은 감사에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물을 보십시오. 그러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보십시오. 그러면 예쁜 구석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 저 사람에게 저렇게 좋은 면이 있었다니!" 하고 감탄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불평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 항상 감사하는 믿음으로 사십시오 >
범사에 감사해보십시오. 감사는 축복을 예비하는 것이고, 원망은 망하는 길입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형제가 있었는데 둘의 가는 길이 전혀 달랐습니다.
형은 열심히 살면서 매사에 헌신하는 삶을 살아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매사에 이기적으로 살다가 결국 친구를 죽여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동생의 사형선고 소식을 듣고 형은 주지사를 찾아가 끈질기게 사면 요청을 했습니다. 몇 년 만에 사면장을 받고, 동생에게 면회를 가서 동생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만약 내가 사면장을 가져와서, 네가 사면되어 감옥에서 나가면 앞으로 어떻게 살겠니?"
그랬더니 동생은 자기를 잡아넣은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형은 동생이 더 큰 죄를 지을 것 같아 그 사면장을 찢어버렸다고 합니다.
불행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며 원망하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습니다. 착하고 선하게 살겠다고 다짐하고 감사하면서 살려고 할 때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원망할 조건이 있을지라도 그 속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과 생각은 꽃밭과 같고, 불평하는 마음과 생각은 가시밭과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생각에 따라 감사의 샘이 될 수도 있고. 원망의 시궁창이 될 수도 있습니다. 헬렌 켈러는 사흘만이라도 보기를 원했는데, 우리는 사흘이 아니라 평생을 눈뜨고 사는데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부터 시작해서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무엇보다 우리의 감사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수많은 곳에서 '감사의 제물'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 어떤 제물보다 더욱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을 더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처럼 감사한 생각을 가지면 <우리의 생각을 초월한 축복>이 반드시 주어질 것입니다. 항상 범사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예비하며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
예화포커스
목사이자 현직 고등학교 교사인 저자가 엮은 예화 백과사전이다. 추상적인 진리를 구체화하는 데 유용한 예화 중에서도 아주 감동적이고 신선하고 생동감 넘치는 것들을 가려 실었다. 이 예화집은 믿음, 교육, 소망, 사랑, 성공, 용서, 찬송, 행복 등 각 주제별(전 50권)로 되어 있으며, 성경말씀, 명언, 묵상자료 등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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