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31,157
믿고 알고 자라자
본문: 에베소서 4:13∼16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생활을 하는 데 대한 구체적인 권면입니다. 이제 생각하게 되는 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세 마디입니다. "바로 믿고, 바로 알고, 바로 자라 가라"는 권면입니다.
첫째로, 바로 믿어야 합니다.
본문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역사를 통해 보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신약 시대에도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면서도 모세의 율법과 의식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해서 그 방면으로 치우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시정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썼습니다.
또 세상의 지식이나 철학 방면에 치우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와 골로새서 같은 것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옛날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도 얼마든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가 크게 부흥하여 전국민의 25퍼센트가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1984년에 한국교회가 이미 100주년이 되었는데 이를 기억하며 계속 성장해서 이 민족 전체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해야겠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때 한국교회가 바로 서고 바로 믿어 건전하게 성장하며, 이 사회에 없어서는 안될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해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바로 믿어야 할 때입니다.
가령 요사이 가만히 보면 예수 믿는 데 너무 감정적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특히 감정이 풍부한 민족입니다. 그래서 찬송을 불러도 흥분하도록 그냥 반복해서 부르거나, 박자와 상관없이 지나치게 빨리 부르며, 손뼉을 치며 불러서 거룩한 집회가 소란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소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드리는 예배가 세상의 속된 디스코 클럽의 수준으로 전락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예수님의 교훈과 모든 일에 질서가 있게 하라는 사도 바울의 교훈에 맞아야 합니다. 신유에 대한 문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나는 것도 믿습니다. 한 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이적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이적을 구한다"고 탄식했습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호기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호기심은 유익한 점이 많습니다. 이 호기심을 통해서 여러 가지 새 것을 발명하여 사회에 공헌을 합니다. 그러나 이 호기심이 타락해서 이적을 구하는 데 급급하게 되면 여러 가지 혼란을 가져오고 우리에게 큰 해가 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이 심리를 이용해서 믿는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성경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도 이적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적을 행한다고 참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열매를 보아서 그 나무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적을 행해서 사리사욕을 채운다면 그것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우리가 이상한 것을 구하고 이상한 것을 찾는 심리를 삼가지 않으면 어떤 거짓 지도자에게 유혹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적을 구하는 심리를 삼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바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바로 믿으려면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사람에겐 본래 지적인 요소, 정적인 요소, 그리고 의지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일에 있어서도 이 세 가지 요소가 꼭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됩니다.
먼저 지적으로 기독교 진리,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모르고 예수를 바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감정적으로 실제적인 체험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종종 드리는 말씀이지만 머리는 차고 가슴은 뜨거워야 합니다. 머리 차고 가슴 차면 송장이고, 머리 뜨겁고 가슴 뜨거우면 미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냉철한 두뇌로 진리를 바로 알고 뜨거운 마음으로 체험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의지적으로 진리를 배워 알고 느낀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억지로 풀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16절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여러 성도들에게 편지할 때 어떤 사람은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자기를 멸망하는 가운데 들어가게 한다고 하는 경고가 있습니다.
바로 믿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바로 배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새로운 진리를 발견했다고 말하면서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억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억지로 풀고 해석하는 데가 있다고 해서 따라가 속아서는 안됩니다. 이 성경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책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그 교훈을 중심해서 성경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성경의 어떤 부분만을 따로 읽고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는 것은 아주 조심해야만 합니다. 기독교는 구속의 복음과 십자가를 믿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외면하고 세상의 물질과 건강 그리고 명예 같은 세속적인 번영만을 강조할 때, 예수님 당시 떡으로 배불린 군중들이 따르듯이 많은 사람이 따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핍박으로 인한 참 믿음의 시련이 올 때 소위 이런 번영의 신학을 따른 사람의 갈 곳은 어디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바로 믿으려면 복음의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16세기 로마 교회가 복음의 변질을 가져왔을 때, 마틴 루터와 종교 개혁가들을 통해 참된 복음을 찾는 말씀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도 무속주의의 영향으로 세상적인 축복을 신령한 축복보다 더 중요시하는 흐름이 이제는 위험 수위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일시적인 방언 체험이나 벼락부자가 되고 큰 감투를 쓰는 것이 축복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영적으로 성숙한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 참된 축복입니다. 사업의 실패로 내 심령이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면, 그 실패는 화가 아니라 분명히 축복입니다. 우리는 방언 한마디로 성령 충만을 내세우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치부와 출세를 성공으로 보는 잘못된 축복 개념을 고쳐야겠습니다. 바로 믿는 것은 바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는 윤리적인 종교이므로 윤리를 벗어난 기독교는 사교입니다. 도둑질해서 돈을 모은 사람은 아무리 재산이 많은 재벌이 되었다고 해도 도둑놈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꼭 믿는 사람 집, 교패가 붙은 집을 골라 다니면서 전도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전도가 아니고 양을 도둑질하는 일입니다. 윤리를 떠난 전도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기억하세요. 예수 믿는 집을 찾아다니면서 전도한다는 사람은 그 누구나를 막론하고 사교입니다. 그리고 자기 교회 식구는 그 교회에서 돌볼 임무가 있습니다. 이 목회 윤리를 벗어나는 일은 상식 밖의 일입니다. 예수를 바로 믿어야 합니다. 잘못 믿으면 오히려 남에게 폐를 끼칠 염려가 있고, 사회에 부담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예수 잘 믿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바로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했습니다.
칼빈 선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식 중에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가 있습니까? 로마서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주 만물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시록을 통해서 아직 이 세상에 나타난 바가 없는 것은 어떻게 나타낼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배웁니다. 전에 지혜와 지식을 자랑하던 헬라의 아덴 사람들 가운데는 많은 신을 섬기는 중에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에게까지 경배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알지 못하고 경배하면 안 됩니다.
물론 우리의 제한된 이성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자기들의 노력을 통해서 자기들이 섬기는 신에게 도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우리가 노력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내 주셨으므로 우리가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도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우주 만물의 창조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일반 계시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사람입니다. 주님은 친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달라 하느냐 아버지와 나는 하나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이것을 특별 계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특별 계시를 통해서 우리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하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십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사실을 모르면 안됩니다. 이미 이루어진 이 구원의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모든 더러운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신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 가운데서 나를 특별히 택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이 사실을 알아야 감격한 가운데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하여 영원한 축복의 자리에 들어갈 것도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구약성경 다니엘서 11장 32절에 보면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했습니다.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란 말에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기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어떤 축복을 받습니까? 강해지고 용기를 주고, 힘을 더하고 승리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다니엘서 3장에 보면 느브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고 모든 사람이 다 이 신상에게 절하라고 하면서, 만일 절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진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청년 사드락과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는 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느브갓네살 왕은 크게 노해서 그들을 불러다 놓고 "이제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데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절하면 좋지만, 만일 절하지 않으면 당장 너희를 풀무 속에 던질 것이니 어떤 신이 내 손에서 너희를 건진단 말이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이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조용히 머리를 들고 침착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일에 왕께서 우리를 풀무 속에 던지시면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거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실 것입니다. 혹시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고 하여도 왕이시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얼마나 담대했습니까? 이런 담대함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자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자기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담대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알 때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따라서 지식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 줍니다. 그 열린 문을 통해서 주님을 분명히 보게 됩니다. 주님을 모르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더욱 잘 알게 되면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아는 사람은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을 어떻게 바랄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분명한 지식이 생길 때 비로소 거기에 소망을 둘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분명히 알 때 그에게 소망을 둡니다. 소망을 가지기 원하십니까? 주님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에게 소망의 닻을 던질 만합니다. 하나님에게 소망을 둔 사람은 결코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아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도 인내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워서 알기 전에 인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욥의 인내를 배우고, 주님의 인내를 생각하게 됩니다. 인내를 아는 사람은 우리가 왜 인내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이 쓰시는 일꾼이 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습니까? 교회 학교 교사나 성가대원이나, 집사나 권찰이나, 권사나 교역자나 하나님을 모르고 어떻게 봉사할 수 있습니까? 세상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의 일꾼으로 봉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성경을 잘 배워야 합니다. 그저 되는 대로 읽거나 생각 없이 읽지 마시고 연구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차례차례 읽어 내려가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생각에 맞추어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말씀을 들으려는 겸손한 마음의 자세로 읽어야 합니다. 얼른 이해가 안 된다고 빼버리지 말고 내 뜻에 맞지 않는다고 던져 버리지 말고 모두 읽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깨달은 부분이 있으면 그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세요. 그러면 그것이 우리에게 더욱 살아 있는 진리로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나 혼자 읽고 공부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같이 공부하다 보면 자기 혼자서는 깨닫지 못하고 받지 못했던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여럿이 모여 배우는 것은 좋으나 아무한테나 배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은 바로 배워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6∼7절 말씀에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되지 않아야 합니다.
1. 예수 더 알기 원함은 크고도 넓은 은혜와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2. 성령이 스승 되셔서 진리를 가르치시고
거룩한 뜻을 깨달아 예수를 알게 하소서
3. 성령의 감화 받아서 하나님 말씀 배우니
그 말씀 한 절 한 절이 내 맘에 교훈 되도다
4. 예수가 계신 보좌는 영광에 둘려 있도다
평화의 왕이 오시니 그 나라 왕성하도다
(후렴) 내 평생의 소원 내 평생의 소원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을 바로 믿고 바로 아는 일에 하나가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바로 자라나야 합니다.
본문에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3∼16) 했습니다. 우리가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어린애도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처럼 일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령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워져서 새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은 것도 확실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심령이 자라나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자라나야 할 구체적인 이유를 밝혔습니다. 본문 4장 14절에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우리 심령이 자라나지 못하고 어린 아이의 상태에 있으면 유혹에 빠지고 요동하기 쉽습니다. 어린애는 자기에게 좋게만 해 주면 좋아합니다. 왜 좋게 대해 주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유혹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잘못된 교훈의 풍조에 요동하기가 쉽습니다. 어린애는 모든 면에 저항력이 약하기 때문에 병균의 침입을 막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그 심령이 병들기 쉽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그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그는 우리의 머리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몸이 알게 모르게 자라는 것처럼 우리 심령도 자라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인내해야 되고, 공부해야 되고,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난 어린애 같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나려고 하면 영양분 섭취를 잘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세요.
성경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어린애가 밥을 먹지 못하고 젖을 먹는다고 걱정할 것 없습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기 전에 꼭 기도하세요. 성령께서 이해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믿으면 알게 됩니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 몸에 어떤 영양이 되는지를 다 알고 나서 먹으려면 그 동안 굶어 죽고 말 것입니다. 믿으면서 알게 됩니다. 그리고 믿은 대로 행하세요. 운동해야 자라납니다. 어린애 때 가장 많이 자랍니다. 운동을 많이 해서 그럽니다.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은 자연히 그 심령이 잘 자라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 하나 하나가 바로 믿고 바로 알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다 자라나시기를 바랍니다.
/박조준 목사
예화포커스
목사이자 현직 고등학교 교사인 저자가 엮은 예화 백과사전이다. 추상적인 진리를 구체화하는 데 유용한 예화 중에서도 아주 감동적이고 신선하고 생동감 넘치는 것들을 가려 실었다. 이 예화집은 믿음, 교육, 소망, 사랑, 성공, 용서, 찬송, 행복 등 각 주제별(전 50권)로 되어 있으며, 성경말씀, 명언, 묵상자료 등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한 태 완 목사 편저, 좋은 땅 전화:386-8660, 각 권 값3,800원
http://truthway.ce.ro,
http://je333.ce.ro
본문: 에베소서 4:13∼16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생활을 하는 데 대한 구체적인 권면입니다. 이제 생각하게 되는 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세 마디입니다. "바로 믿고, 바로 알고, 바로 자라 가라"는 권면입니다.
첫째로, 바로 믿어야 합니다.
본문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역사를 통해 보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신약 시대에도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면서도 모세의 율법과 의식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해서 그 방면으로 치우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시정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썼습니다.
또 세상의 지식이나 철학 방면에 치우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와 골로새서 같은 것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옛날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도 얼마든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가 크게 부흥하여 전국민의 25퍼센트가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1984년에 한국교회가 이미 100주년이 되었는데 이를 기억하며 계속 성장해서 이 민족 전체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해야겠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때 한국교회가 바로 서고 바로 믿어 건전하게 성장하며, 이 사회에 없어서는 안될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해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바로 믿어야 할 때입니다.
가령 요사이 가만히 보면 예수 믿는 데 너무 감정적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특히 감정이 풍부한 민족입니다. 그래서 찬송을 불러도 흥분하도록 그냥 반복해서 부르거나, 박자와 상관없이 지나치게 빨리 부르며, 손뼉을 치며 불러서 거룩한 집회가 소란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소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드리는 예배가 세상의 속된 디스코 클럽의 수준으로 전락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예수님의 교훈과 모든 일에 질서가 있게 하라는 사도 바울의 교훈에 맞아야 합니다. 신유에 대한 문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나는 것도 믿습니다. 한 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이적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이적을 구한다"고 탄식했습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호기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호기심은 유익한 점이 많습니다. 이 호기심을 통해서 여러 가지 새 것을 발명하여 사회에 공헌을 합니다. 그러나 이 호기심이 타락해서 이적을 구하는 데 급급하게 되면 여러 가지 혼란을 가져오고 우리에게 큰 해가 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이 심리를 이용해서 믿는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성경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도 이적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적을 행한다고 참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열매를 보아서 그 나무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적을 행해서 사리사욕을 채운다면 그것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우리가 이상한 것을 구하고 이상한 것을 찾는 심리를 삼가지 않으면 어떤 거짓 지도자에게 유혹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적을 구하는 심리를 삼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바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바로 믿으려면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사람에겐 본래 지적인 요소, 정적인 요소, 그리고 의지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일에 있어서도 이 세 가지 요소가 꼭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됩니다.
먼저 지적으로 기독교 진리,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모르고 예수를 바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감정적으로 실제적인 체험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종종 드리는 말씀이지만 머리는 차고 가슴은 뜨거워야 합니다. 머리 차고 가슴 차면 송장이고, 머리 뜨겁고 가슴 뜨거우면 미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냉철한 두뇌로 진리를 바로 알고 뜨거운 마음으로 체험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의지적으로 진리를 배워 알고 느낀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억지로 풀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16절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여러 성도들에게 편지할 때 어떤 사람은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자기를 멸망하는 가운데 들어가게 한다고 하는 경고가 있습니다.
바로 믿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바로 배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새로운 진리를 발견했다고 말하면서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억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억지로 풀고 해석하는 데가 있다고 해서 따라가 속아서는 안됩니다. 이 성경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책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그 교훈을 중심해서 성경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성경의 어떤 부분만을 따로 읽고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는 것은 아주 조심해야만 합니다. 기독교는 구속의 복음과 십자가를 믿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외면하고 세상의 물질과 건강 그리고 명예 같은 세속적인 번영만을 강조할 때, 예수님 당시 떡으로 배불린 군중들이 따르듯이 많은 사람이 따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핍박으로 인한 참 믿음의 시련이 올 때 소위 이런 번영의 신학을 따른 사람의 갈 곳은 어디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바로 믿으려면 복음의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16세기 로마 교회가 복음의 변질을 가져왔을 때, 마틴 루터와 종교 개혁가들을 통해 참된 복음을 찾는 말씀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도 무속주의의 영향으로 세상적인 축복을 신령한 축복보다 더 중요시하는 흐름이 이제는 위험 수위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일시적인 방언 체험이나 벼락부자가 되고 큰 감투를 쓰는 것이 축복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영적으로 성숙한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 참된 축복입니다. 사업의 실패로 내 심령이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면, 그 실패는 화가 아니라 분명히 축복입니다. 우리는 방언 한마디로 성령 충만을 내세우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치부와 출세를 성공으로 보는 잘못된 축복 개념을 고쳐야겠습니다. 바로 믿는 것은 바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는 윤리적인 종교이므로 윤리를 벗어난 기독교는 사교입니다. 도둑질해서 돈을 모은 사람은 아무리 재산이 많은 재벌이 되었다고 해도 도둑놈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꼭 믿는 사람 집, 교패가 붙은 집을 골라 다니면서 전도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전도가 아니고 양을 도둑질하는 일입니다. 윤리를 떠난 전도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기억하세요. 예수 믿는 집을 찾아다니면서 전도한다는 사람은 그 누구나를 막론하고 사교입니다. 그리고 자기 교회 식구는 그 교회에서 돌볼 임무가 있습니다. 이 목회 윤리를 벗어나는 일은 상식 밖의 일입니다. 예수를 바로 믿어야 합니다. 잘못 믿으면 오히려 남에게 폐를 끼칠 염려가 있고, 사회에 부담스러운 존재가 됩니다. 예수 잘 믿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바로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했습니다.
칼빈 선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식 중에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가 있습니까? 로마서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주 만물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시록을 통해서 아직 이 세상에 나타난 바가 없는 것은 어떻게 나타낼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배웁니다. 전에 지혜와 지식을 자랑하던 헬라의 아덴 사람들 가운데는 많은 신을 섬기는 중에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에게까지 경배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알지 못하고 경배하면 안 됩니다.
물론 우리의 제한된 이성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자기들의 노력을 통해서 자기들이 섬기는 신에게 도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우리가 노력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내 주셨으므로 우리가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도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우주 만물의 창조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일반 계시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사람입니다. 주님은 친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달라 하느냐 아버지와 나는 하나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이것을 특별 계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특별 계시를 통해서 우리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하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십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사실을 모르면 안됩니다. 이미 이루어진 이 구원의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모든 더러운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신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 가운데서 나를 특별히 택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이 사실을 알아야 감격한 가운데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하여 영원한 축복의 자리에 들어갈 것도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구약성경 다니엘서 11장 32절에 보면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했습니다.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란 말에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기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어떤 축복을 받습니까? 강해지고 용기를 주고, 힘을 더하고 승리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다니엘서 3장에 보면 느브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고 모든 사람이 다 이 신상에게 절하라고 하면서, 만일 절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진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청년 사드락과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는 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느브갓네살 왕은 크게 노해서 그들을 불러다 놓고 "이제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데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절하면 좋지만, 만일 절하지 않으면 당장 너희를 풀무 속에 던질 것이니 어떤 신이 내 손에서 너희를 건진단 말이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이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조용히 머리를 들고 침착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일에 왕께서 우리를 풀무 속에 던지시면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거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실 것입니다. 혹시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고 하여도 왕이시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얼마나 담대했습니까? 이런 담대함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자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자기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담대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알 때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따라서 지식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 줍니다. 그 열린 문을 통해서 주님을 분명히 보게 됩니다. 주님을 모르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더욱 잘 알게 되면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아는 사람은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을 어떻게 바랄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분명한 지식이 생길 때 비로소 거기에 소망을 둘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분명히 알 때 그에게 소망을 둡니다. 소망을 가지기 원하십니까? 주님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에게 소망의 닻을 던질 만합니다. 하나님에게 소망을 둔 사람은 결코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아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도 인내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워서 알기 전에 인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욥의 인내를 배우고, 주님의 인내를 생각하게 됩니다. 인내를 아는 사람은 우리가 왜 인내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이 쓰시는 일꾼이 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습니까? 교회 학교 교사나 성가대원이나, 집사나 권찰이나, 권사나 교역자나 하나님을 모르고 어떻게 봉사할 수 있습니까? 세상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의 일꾼으로 봉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성경을 잘 배워야 합니다. 그저 되는 대로 읽거나 생각 없이 읽지 마시고 연구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차례차례 읽어 내려가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생각에 맞추어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말씀을 들으려는 겸손한 마음의 자세로 읽어야 합니다. 얼른 이해가 안 된다고 빼버리지 말고 내 뜻에 맞지 않는다고 던져 버리지 말고 모두 읽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깨달은 부분이 있으면 그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세요. 그러면 그것이 우리에게 더욱 살아 있는 진리로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나 혼자 읽고 공부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같이 공부하다 보면 자기 혼자서는 깨닫지 못하고 받지 못했던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여럿이 모여 배우는 것은 좋으나 아무한테나 배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은 바로 배워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6∼7절 말씀에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되지 않아야 합니다.
1. 예수 더 알기 원함은 크고도 넓은 은혜와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2. 성령이 스승 되셔서 진리를 가르치시고
거룩한 뜻을 깨달아 예수를 알게 하소서
3. 성령의 감화 받아서 하나님 말씀 배우니
그 말씀 한 절 한 절이 내 맘에 교훈 되도다
4. 예수가 계신 보좌는 영광에 둘려 있도다
평화의 왕이 오시니 그 나라 왕성하도다
(후렴) 내 평생의 소원 내 평생의 소원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을 바로 믿고 바로 아는 일에 하나가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바로 자라나야 합니다.
본문에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3∼16) 했습니다. 우리가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어린애도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장성한 사람처럼 일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령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워져서 새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은 것도 확실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심령이 자라나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자라나야 할 구체적인 이유를 밝혔습니다. 본문 4장 14절에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우리 심령이 자라나지 못하고 어린 아이의 상태에 있으면 유혹에 빠지고 요동하기 쉽습니다. 어린애는 자기에게 좋게만 해 주면 좋아합니다. 왜 좋게 대해 주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유혹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잘못된 교훈의 풍조에 요동하기가 쉽습니다. 어린애는 모든 면에 저항력이 약하기 때문에 병균의 침입을 막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그 심령이 병들기 쉽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그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그는 우리의 머리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몸이 알게 모르게 자라는 것처럼 우리 심령도 자라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인내해야 되고, 공부해야 되고,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난 어린애 같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나려고 하면 영양분 섭취를 잘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세요.
성경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어린애가 밥을 먹지 못하고 젖을 먹는다고 걱정할 것 없습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기 전에 꼭 기도하세요. 성령께서 이해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믿으면 알게 됩니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 몸에 어떤 영양이 되는지를 다 알고 나서 먹으려면 그 동안 굶어 죽고 말 것입니다. 믿으면서 알게 됩니다. 그리고 믿은 대로 행하세요. 운동해야 자라납니다. 어린애 때 가장 많이 자랍니다. 운동을 많이 해서 그럽니다.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은 자연히 그 심령이 잘 자라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 하나 하나가 바로 믿고 바로 알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다 자라나시기를 바랍니다.
/박조준 목사
예화포커스
목사이자 현직 고등학교 교사인 저자가 엮은 예화 백과사전이다. 추상적인 진리를 구체화하는 데 유용한 예화 중에서도 아주 감동적이고 신선하고 생동감 넘치는 것들을 가려 실었다. 이 예화집은 믿음, 교육, 소망, 사랑, 성공, 용서, 찬송, 행복 등 각 주제별(전 50권)로 되어 있으며, 성경말씀, 명언, 묵상자료 등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한 태 완 목사 편저, 좋은 땅 전화:386-8660, 각 권 값3,800원
http://truthway.ce.ro,
http://je333.c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