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절대긍정

운영자............... 조회 수 462 추천 수 0 2003.12.08 11:04:24
.........
영원한 절대긍정

본문: 시23:4-6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죄와 유혹, 질병과 고통, 가난과 미움, 절망, 죽음과 같은 수많은 부정적인 환경 가운데 성장하면서 자연적으로 부정적인 인격을 갖게 됩니다. 부정적인 사람이 되는 데는 노력이 필요 없지만 긍정적인 사람이 되는 데는 마음의 결단과 부단한 노력을 해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 말씀으로 매일 살아가면 영원한 절대 긍정적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1.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체험
생명에는 기쁨과 희망, 꿈과 행복이 따르지만 사망에는 슬픔과 무기력, 절망과 좌절, 불행과 고독이 따르게 됩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서 바울 선생은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사망 아래 살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이 세상은 슬픔으로 꽉 들어차 무기력과 절망, 좌절과 불행 등이 횡횡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2장 22∼23절에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삶은 넓은 들판의 평탄한 길만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음침한 골짜기란 사단의 습격이 있는 곳으로 공포스럽고 버림받아 피할 곳이 없으며 벗어날 힘과 도리가 없는 곳입니다. 오늘날 경제적인 고통 속에서 파산하여 생활고에 허덕이며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부인이 만삭인데 직장을 잃어 먹을 것이 없어 강도 짓을 하다가 붙잡혔다고 탄식하였습니다. 이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버림받아 피할 곳도, 벗어날 힘과 방책도 없는 절망 상태에서 강도로 변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일입니다. 인간의 삶 가운데 체험하는 최악의 어두운 곳은 바로 이러한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그 곳에서 사람들은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타락하거나 자살을 합니다. 시편 107편 10∼11절에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난 해 한 여론조사에서 우리나라 성인 가운데 다섯 명 중 한 명이 자살충동을 느껴 본 적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자살 이유로는 경제적인 이유가 34%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고부갈등, 부부문제이며 미혼자의 경우는 애인, 친구 문제와 직장 문제의 순서입니다. 우리나라 주부들의 절반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생활고나 성적비관 등으로 자살하는 것에 대해 그 심정이 이해된다고 하는 사람이 전체 국민 중에 70%나 된다고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는 40초에 한 명꼴로 자살을 합니다. 복지시설이 잘된 선진국에서는 주로 알코올 중독, 가정 불화, 무력감 등으로 자살을 합니다. 스위스는 매년 1300여 건, 홍콩은 1100명, 일본에서는 90년대 이후 장기침체로 대량실업이 발생하면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하는 사람이 하루 평균 100명 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입니다. 성경은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사람들은 희망을 잃고, 큰 상처를 입어 다시 일어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으므로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처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를 이길 수 있습니다. 사망보다 더 크시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두려움보다 더 위대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확실히 알고 모시고 있으면 어떠한 두려움이 올지라도 두려움보다 크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은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4절에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보다 더 크고 위대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8절에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가 가슴에 받아들이고 하나님 은혜의 날개 밑에 들어가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는 1930년대에 건설된 세계에서 가장 높고 긴 교각을 가진 아름다운 다리입니다. 금문교는 다리 위에서 아래쪽 바다를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높습니다. 미국은 이 금문교를 지을 때 많은 중국 노동자들을 불러 지었습니다. 그런데 다리를 건설하는 동안 많은 사람이 다리 난간에서 떨어져 바다에 빠져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 시에서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금문교 다리를 짓는 밑에 철망을 둘렀습니다. 마치 공중에서 서커스 하는 사람 밑에 망을 쳐 놓고 서커스 하는 사람이 떨어지더라도 다치지 않게 받아주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철망을 둘러친 다음에는 한 사람도 다리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공사를 하는데 철망을 치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리에서 떨어졌으나 철망을 친 이후에는 사람들이 다리 난간을 걸어다니면서도 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의 마음이 안심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망이 없을 때는 ‘떨어지면 죽을텐데’하는 불안과 공포로 인해 헛발을 디뎌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철망이 있으니까 ‘떨어져도 죽지 않는다’는 마음의 확신과 안심으로 인해 난간을 걸어다녀도 헛발을 딛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주님 능력의 날개 아래 있다는 것을 믿고 알게 되면 마음속에 안심을 하게 됩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이 앞길이 칠흑같이 어두워도 주께서 나와 동행하신다는 확신을 하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모든 좌절과 절망을 이길 힘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어떤 사망도 극복하시는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죽음조차도 예수님을 막아 놓을 수 없습니다. 이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예수님의 부활로 광명한 천지가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께서 우리와 동행하고 계십니다. 빛이 어두움을 이기듯 예수님은 사망을 물리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요한일서 5장 5절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가 되십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우리들은 사망의 세력을 모두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수정교회 목사인 로버트 슐러 목사님의 절대긍정의 신조는 ‘산이 앞에 가로막힌다 해도 나는 단념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리라. 나는 산에 오르리라. 그것이 힘들면 산 밑에 터널을 뚫고 통과하리라. 그래도 안되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대로 산을 변화시켜 금광으로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은 절대긍정의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예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우리는 어떠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능히 지나갈 수 있고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편 91편 2∼12절에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람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 인이 네 곁에서, 만 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이 나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이 되시면 그가 우리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그냥 같이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는 언제나 그 손에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팡이와 막대기가 없는 목자는 목자가 아닙니다. 목자는 양을 인도할 때 그 손에 항상 지팡이와 막대기가 있습니다. 주님의 지팡이는 우리를 건지는 도구입니다. 양이 올무에 걸렸거나 빠지면 주께서 그 지팡이로 건져내십니다.
시편 5편 8절에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시편 43편 3절에는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시편 107편 14절에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지팡이를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며 우리가 수렁에 빠졌을 때 건져내십니다. 또한 주님의 막대기는 원수를 물리치는 도구입니다. 주님은 막대기를 가지고 원수가 오면 물리치십니다. 시편 121편 5∼7절에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고 앞장서서 인도하여 가십니다. 양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목자이신 예수께서 지팡이로 우리가 잘못 가면 당겨 주시고, 건져주십니다. 또한 원수가 있으면 앞장서 막대기로 치면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섬기는 종으로 살 때 주님은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모든 환경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5∼39절에서 사도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어떤 세력이 와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사랑을 가지고 우리와 함께 계시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건지시고 싸워 주셔서 우리가 해를 받지 않게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속에 모시고 있으니 우리는 긍정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부정적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시고 또한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으므로 어떠한 환경이 다가와도 긍정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2.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심
원수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원수가 집안 식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그의 사위인 다윗과 싸웠습니다. 다윗의 원수는 바로 장인인 사울이었습니다. 가인은 그 형제 아벨과 싸웠습니다. 스승과 제자간이 원수가 됩니다. 예수님은 스승이고 가룟 유다는 제자인데 그가 스승 예수님을 죽는 데 내놓았습니다.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 등 어느 곳에 가든지 원수는 있습니다. 원수가 없이 살려면 이 땅을 떠나야만 가능합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이상 가장 가까운 내 혈족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웃, 친족, 친지 간에 원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 어느 사람에게나 들어가 우리를 죽이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우리의 힘으로 원수와 싸우려해서는 안됩니다. 바울 선생은 ‘내가 산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내 안에 사시면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집이요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으로 우리 몸에 계시기 때문에 주인인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인을 섬기는 종으로 살면 주인이 우리의 모든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살고 있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가 그 집을 지키고 보호하고, 수선하고 돌보려 합니다. 그러다가 자기의 힘이 모자라면 더이상 집을 지키거나 보호하거나 수선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우리 집의 주인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섬기는 종이 된다면 우리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능력으로 우리의 집을 보호하시고 지키시며 수선하여 돌보아 주십니다. 우리 주인되신 하나님께서는 원수가 다가오면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에게 진수성찬을 베풀어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 앞에서의 골리앗을 보십시오. 골리앗은 블레셋 군대의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군대가 보는 앞에서 다윗에게 능력을 주시어 골리앗의 목을 치고 승리하도록 하는 진수성찬을 베푸셨습니다.
사무엘상 17장 50∼51절에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 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집에서 빼어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원수 군대의 목전에서 다윗에게 골리앗이라고 하는 진수성찬을 주셨습니다. 골리앗을 이겼기 때문에 다윗은 온 이스라엘에 알려지게 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베푸신 상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느부갓네살 왕의 목전에서 풀무불 상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당시 천하의 대왕이요 공중에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처럼 위대한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왕은 진노하여 일곱배나 더 뜨겁게 한 풀무불에 이들을 던져 넣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수의 목전에서 진수성찬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다니엘 3장 28∼30절에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고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이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매우 감탄했습니다. 세 사람을 풀무불에 던졌는데 네 사람이 풀무불에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 네 번째는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보였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풀무불에서 나왔을 때 그들을 묶었던 밧줄만 타고 그들의 머리카락 하나 그을리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느부갓네살 왕의 목전에서 그들에게 풀무불 상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은 크고 비밀한 일을 나타내셔서 우리에게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십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해결할 수 있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라도 진수성찬을 차려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마음에 생각지도 못한 것을 주님은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의 목전에서 진수성찬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에 원수가 오면 그에 따른 상도 함께 옵니다. 그리고 기름으로 머리에 바르셔서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성령의 기름을 주셔서 능력을 주시고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미가 7장 8절에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엎드러져도 일어나고 어두운데 앉아도 하나님께서 빛이 되셔서 우리를 비추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 복음성가에도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평안히 길을 갈 때 보이지 않아도/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도 다가와 손 내미시네/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일어나 너 걸으라 내 너를 도우리’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과 같이 있으면 우리의 잔이 넘칩니다. 잔이 넘친다는 것은 큰 기쁨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슬픔과 환난의 눈물 대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시편 68편 19절에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편 30편 5절에는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11절에는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잔이 넘치게 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주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주께서 우리의 어려운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어 기쁨과 즐거움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3. 야웨의 집에 영원히 거함
우리가 현실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갇히더라도 주께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지켜주시며 또 원수의 목전에서 진수성찬을 차려 주신다 해도 미래에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 모든 것이 없어진다면 얼마나 좌절과 절망이 다가오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미래는 야웨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영원히 야웨의 집에서 사는 것입니다. 육신의 장막집은 병들고 쇠약해져 무너집니다. 우리에게도 뛰놀던 소년시절이 있었고 청년의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또한 장년의 활기찬 시절도 있었지만 결국 모든 사람은 늙어 병들고 쇠약해집니다.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사람은 35세부터 늙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35세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좋은 음식과 의약의 개발로 인해 80세까지 장수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사람이 한번 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고 난 다음에는 심판이 따릅니다.
시편 90편 3절에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편 103편 15절에서는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을이 와서 낙엽이 뒹구는 것을 보면 우리 마음에 감회가 깊습니다. 무덥던 여름철 그토록 싱싱하고 푸르던 나뭇잎이 가을이 되어 울긋불긋한 단풍이 들며 떨어져 바람에 날려갑니다. 그러한 것을 볼 때 우리 인생의 종말을 가슴속에 느끼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너희 인생이 무엇이냐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니라 내일 일을 자랑치 말라 오늘 네게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 삶의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높은 지위로 권력과 명예를 가진 사람들은 으시댑니다. 그들은 거대한 세상 집을 지어 놓고 큰 소리 칩니다. 그러나 바다에 가면 조그마한 바닷게가 모래 안에 커다란 자기 집을 지어 놓고 ‘이것이 내 집이다’라고 생각하지만 파도가 밀려오면 그 집은 온데간데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면 부딪혀 무너지고 맙니다. 전도서 5장 15절에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 무엇을 가지고 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모두 빈 손 들고 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26∼27절에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육신의 집도 늙고 병들어 무너집니다. 세상에 지은 집도 모두 무너집니다. 그래서 시편 127편 1절에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 곳에 삶의 의미와 가치가 있고 영광과 평안과 기쁨이 넘쳐납니다.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야웨의 집에 있을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습니까?
요한계시록 21장 1∼7절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 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야웨의 집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집이요 예수께서 2천년이 걸려서 예비하신 아름다운 우리의 장막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험하고 우리가 비록 약해도 주께서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어 해를 받지 않게 해주시고 원수의 공격도 대신 싸우셔서 오히려 잔치상으로 만들어 기쁨이 넘치게 하십니다. 또한 죽음이 오면 우리를 아버지 집으로 이끌어 주시니 어떤 절대절망이나 부정적인 세력도 주님 앞에서는 빛 앞의 어두움처럼 사라지고 영원한 긍정만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두움은 사라지고 빛만 있게 됩니다. 죽음은 사라지고 생명만 있습니다. 고독 또한 사라지고 항상 주께서 우리의 목자로 계시어 함께 하십니다. 우리에게 부정은 없습니다. 오직 긍정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품고 가시는 그 길에는 어떤 부정적인 세력일지라도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게 될 것입니다.

* 기도 :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은총과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야웨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저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저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니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아버지여 이 계시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 계시의 말씀을 가슴 가득히 받아 들이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 마음속에 주인으로 모시고 섬기는 종으로서 넘치는 기쁨과 소망과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조용기 목사

예화포커스(1- 50권)
목사이자 현직 고등학교 교사인 저자가 엮은 예화 백과사전이다. 추상적인 진리를 구체화하는 데 유용한 예화 중에서도 아주 감동적이고 신선하고 생동감 넘치는 것들을 가려 실었다. 이 예화집은 가정, 감사, 건강, 교회, 믿음, 교육, 소망, 사랑, 성공, 용서, 찬송, 행복, 등 각 주제별(전 50권)로 되어 있으며, 성경말씀, 명언, 묵상자료 등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본서를 통해 목회자들은 은혜로운 설교를 하게 되고, 성도들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새사람이 되어 늘 샘물같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한태완 목사 지음, 좋은땅, 각 권 값4,300원
주문: 전화: (02) 386-8660, 팩스(02)386-2961
교보문고, 영풍문고, 기독교 서점에서도 판매함
좋은땅 인터넷 http://www.g-world.co.kr
좋은땅 이메일 gworld@g-world.co.kr
전국서점총판/하늘유통(02)959-6478
인터넷 주문/http://www.lifebook.co.kr
편저자 홈페이지: http://allcome.ce.ro, http://bigjoy.ce.ro
저자 E-mail: allcome@naver.com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3905 만족없는 세상을 만족하게 운영자 2003-12-08 730
13904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 운영자 2003-12-08 673
13903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 운영자 2003-12-08 512
13902 신바람 박사 운영자 2003-12-08 484
13901 믿음, 소망, 사랑 운영자 2003-12-08 522
13900 믿음, 소망, 사랑 운영자 2003-12-08 764
13899 주님의 몸 된 교회 운영자 2003-12-08 988
13898 리듬이 있는 기도 운영자 2003-12-08 856
13897 왜 기독교는 십자가를 상징으로 삼나요? 운영자 2003-12-08 916
13896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 운영자 2003-12-08 1018
13895 교회의 5대 사명 운영자 2003-12-08 1747
» 영원한 절대긍정 운영자 2003-12-08 462
13893 영원한 절대긍정 운영자 2003-12-08 667
13892 본분을 잊지말자 운영자 2003-12-08 439
13891 본분을 잊지말자 운영자 2003-12-08 5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