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흔적(53)

복음............... 조회 수 1071 추천 수 0 2005.07.31 08:3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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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흔적(53)

본문: 갈라디아서 6장 11∼18절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6:17)

뉴욕 퀸즈 한인교회 사모님은 어렸을 적에 천연두를 앓아 얼굴이 심하게 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마마 자국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연두에 걸려서 죽을 고비에 처했을 때 목사님의 기도로 생명을 건지고 난 후 그 사모님의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네 얼굴에 있는 마마 자국은 하나님께 너를 살려주셨다는 증거이고 흔적이란다.” 그 사모님은 그때부터 자신의 마마 자국은 부끄러운 삶의 흔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고 살려주셨다는 하나님 사랑의 흔적임을 자랑하며 한인교회 사모님으로 목사님과 함께 큰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도장을 찍히고 나면, 예수에 의해 인박힌 인생이 되고 나면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림이 없이 그리고 영향 받지 않는 능력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의 인이 박힌, 예수의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있는 성도라는 귀한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몇 년 전에 철원에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 6.25때 공산당 당사를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관광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6.25의 흔적이었습니다. 보훈병원에 가면 아직도 6.25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땅굴도 남북이 갈라진 상처요 흔적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적비 남기는 것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래서 온 나라 구석구석에 유적비가 널려 있습니다. 열녀비, 치적비, 순교비, 생가...등등, 심지어는 아직도 버젓이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 유적비를 남기는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만 나무랄 것이 없습니다. 남한에서도 대통령 생가 복원한다고 얼마나 떠듭니까? 무엇을 남기기 위해 사는 사람들 같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디에 자기 이름이 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래서 명예를 구하고, 돈을 구하고, 권력을 찾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남긴 흔적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흔적을 유산으로 물려주었습니다. 그들의 절기는 하나님과 관계 된 것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흔적입니다. 칠칠절은 가나안 땅에서 첫 번째로 거둔 곡식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수장절은 광야에 묻어 있는 하나님이 역사하신 흔적입니다.
알프렛 테니슨 경의 글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한번은 두 친구가 동부로 가는 길에 저희 집에 들러 며칠을 지내며 일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더러 동부에 같이 가자고 해서 가던 중 한 친구가 모자를 잃어버린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그는 자기 모자를 제 집에 두고 온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써서 모자를 찾아 보내 달라고 저에게 부탁했습니다. 저는 그의 부탁대로 집에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답장을 보내 왔습니다. 그 답장 중에 문장 하나가 저에게 잊을 수 없는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편지를 받고 집안 구석구석을 다 뒤져보았습니다. 그러나 모자는 흔적도 없었습니다. 그분들이 여기 남겨 두고 가신 것은 큰 축복 하나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는 곳에 어떤 흔적이 남습니까? 우리는 기쁨의 흔적을 남깁니까, 슬픔의 흔적을 남깁니까? 사랑의 흔적을 남깁니까? 아니면 미움의 흔적을 남깁니까? 화평의 흔적을 남깁니까? 아니면 불화의 흔적을 남깁니까?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선함과 소망과 희락을 기대할까요? 아니면 우리를 차라리 잊어버리고 싶을까요? 우리는 우리 뒤에 축복을 남겨둡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해독을 남겨둡니까? 우리가 가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에 우리가 기다려지는 사람이 될까요? 아니면 우리가 가는 것이 귀찮고 그들에게 고통스러운 일일까요?
이사야 52장 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우리의 발자국은 어떻습니까? 지난밤에 눈이 내렸는데, 밖에 무엇이 지나갔나 하는 것을 알려면 어떻게 합니까? 발자국을 보면 압니다. 소가 지나갔으면 소 발자국이 났을 것이고, 개가 자나갔으면 개 발자국이 났을 것입니다. 사람이 지나갔으면 사람의 발자국이 나지 않았겠습니까? 내 발자국에는 용서가 남아 있습니까? 아니면 원한이 남아 있습니까? 만족을 남겨 둡니까? 아니면 불만과 불평을 남겨 둡니까? 희망을 남겨 둡니까? 아니면 절망과 좌절을 남겨 둡니까? 성결을 남겨 둡니까? 아니면 불결을 남겨 두어 우리의 발자국을 차라리 가리고 싶어합니까? 우리의 발자국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마음속에 여러 가지 갈등을 느끼면서 그의 제자 한 사람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그때 마침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치시며 복음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요한의 제자는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세례 요한의 제자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생님께서 당신이 정말 우리 유대인이 기다리는 메시야인지 아닌지 알아보고 오라고 해서 여기 왔습니다." 그때 보통 사람이라면 "이 사람아, 내가 메시야가 아니면 누가 메시야인가? 자네 선생인 세례 요한이 이미 나를 소개하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새삼스럽게 또 물을 것이 뭐 있는가?"라고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조금도 잘못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제자에게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나를 알려고 하는 사람에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발자국은 무엇입니까? 내가 나를 아무리 선전해도 다른 사람이 내 발자국을 보고 나를 판단할 것입니다.
저 아프리카에는 데이빗 리빙스톤과 알버트 슈바이처가 남긴 흔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밟았던 대륙인 숲과 평야와 마을에는 그들의 발자국의 영향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리빙스톤이나 슈바이처를 한평생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뒤따른,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를 미지근한 기관으로 전락시킨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으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랑을 받으러 와서 우리의 미지근한 태도 때문에 실망하고 돌아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보여주면 그 사람에게도 은혜가 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내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에게 흘러들어 오는 것과 같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라야 하고, 내가 어디로 가든지 다른 사람에게 선과 인자를 남겨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면서 "복이 근원이 되라"고 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창세기 39장 5절에 보면 "그(보디발)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쳤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셉으로 인하여 보디발의 집에 복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복의 근원이 되어 어디 가든지 그곳에 여러분을 통해 복이 임하게 되고, 좋은 흔적과 발자취를 남기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7절에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흔적’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티그마’라고 했습니다. 소유권을 표시하는 각인(刻印)입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예수의 낙인(烙印)으로 번역했습니다.
낙인은 쇠도장으로 화인(火印)이라고도 합니다. 자기 노예나 짐승에게 낙인을 찍어 소유를 표시했습니다. ‘스티그마’는 불명예스런 단어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스티그마’를 영광스럽게 자랑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고백합니다. 곧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소유’라는 선언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소유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신앙고백, 곧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 10:32)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 서두에 반드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합니다.
바로 이 고백이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 즉,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다가 처형당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세례문답할 때 반드시 식사기도를 하는지 묻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점심때는 기도를 못한다고 대답합니다. 저는 세례 받은 학생들에게 이제는 부끄러워 말고 점심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신앙고백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소속감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는 땅에 살고 있으나 하늘 시민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8) 이런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입니다.
둘째는 고난과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그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온갖 박해와 고난을 받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에 보면 “옥에 갇히기를 여러 번 하고 매도 수없이 많이 맞았다”고 했습니다. 그런 고난의 상처가 바울의 몸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4절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무릎에 기도의 흔적이 있어야 하고 우리의 발에는 전도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성 프란체스코는 두 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내 생전에 내 몸과 내 영혼에 될 수 있는 대로 주님이 친히 맛보신 그 수난의 고통을 맛보게 하소서. 그리고 주께서 우리 죄인을 위하여 그처럼 참으실 수 있었던 그 불타는 끝없는 사랑을 알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사랑이 온 지평선을 덮고 있는 듯한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있을 때 측은함과 비탄의 칼이 그의 심장을 찢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손에 못에 박힌 자국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복음을 위해 받은 상처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입니다. 주를 위해 일하다가 받은 상처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섰을 때 ‘나는 예수의 그리스도의 종’이라 자랑할 수 있는 흔적을 많이 소유하는 삶을 살아가십시다.
여러분, 예수님에게는 우리를 향한 흔적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는 우리를 위해 가시관 쓰신 흔적이, 예수님의 손과 발에는 못 박힌 흔적이, 예수님의 가슴에는 일곱 번 넘어진 십자가의 흔적이, 예수님의 등허리에는 채찍에 맞은 흔적이, 예수님의 이마에는 땀흘린 흔적이 예수님의 눈에는 우리를 위해 흘린 눈물의 흔적이, 예수님의 무릎에는 우리를 위해 기도한 주님의 흔적이 있어요. 이건 모두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가지신 흔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위해서 이 몸을 가지고 무언가 주님을 위해서 일하므로 흔적을 가져야 됩니다.
고등학교 친구 가운데 그 어머니가 팔이 불구인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제가 그 친구네 집을 놀러 갔는데 그 불편한 손을 가지고 점심을 차려서 아들 친구들이 왔다고 상을 차려 주시는데 보니까 불구 정도가 아니고 그 손이 녹아 가지고 손 한쪽이 아예 뭉글어졌어요 얼굴서부터 밥을 먹고 나서 그 친구가 어머니 손을 쓰다듬으면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만일 우리 어머니의 이 손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죽었을 거다. 내가 어렸을 때 집에다 나를 뉘어놓고 어머니가 들판에서 일을 하는데 우리 집에 불이 나니까 들판에서 동네로 달려오는데 자기 집에 불이 나고 아기는 방에 있으니까 번개처럼 집으로 와서 자기를 앉고 나오다가 이렇게 됐다는 것입니다. 아주 녹았어요 그런데 어머니의 그 흔적을 쓰다듬으면서 자랑스럽게 얘기를 하더군요.
우리 예수님의 몸에는 우리를 사랑했기에, 못 박힌 흔적 가시관 쓰신 흔적들이 있어요. 우리의 머리로 지은 죄를 위해 가시관 쓰시고, 손으로 지은 죄를 위해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지은 죄를 위해 창을 받고 주님은 흔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대한 전도자 바울이 말하기를 내 몸에도 예수의 흔적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정말, 바울은 생각해보면 그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죽을 뻔했습니다. 돌에 맞아서 죽었다고 생각하고 들판에 내 버렸는데 하나님이 살려 주셔서 또 전도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수도 없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굶고, 위험을 당하고, 굶주렸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몸에는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다. 성지순례 때 로마에 가보았습니다. 바울의 순교기념 교회당 옛날 바울이 복음전하다가 사형을 당하는데 돌기둥에다 목을 내면 위에서 내려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머리가 떨어지면서 때굴 때굴 3번 튀어서 굴렀대요 굴른 데마다 샘이 솟았다 해서 거기다 표시를 해 놨습니다. 여러분 바울의 몸에는 예수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묻습니다. 여러분의 몸에 조금이라도 주님 앞에 “이겁니다.”라고 내놓을 수 있는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까? 만약에 예수의 흔적이 없다면 우리는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너무나도 엄청난 은혜를 받고도 그 은혜를 보답하는 아무런 흔적이 없다면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몸에 나타난 흔적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떠한 일을 열심히 했는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농부들이 열심히 일하면 손바닥에 굳은살이 배겨 있습니. 그것을 보면 압니다. 열심히 연필을 잡고 공부한 사람은 그 손가락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운동을 열심히 한사람은 근육이 튼튼하고 좋지요. 부끄러운 흔적도 많지요 여러분, 아직도 담배 못 끊은 분 많이 계시죠? 담배를 많이 핀 분을 보면 이가 누렇고 손가락도 누래요. 술도 자꾸 먹으면 덜덜 떨고 흔적이 나타나지요. 늙으셔서 곤란해집니다.
레슬링 선수나 유도 선수들을 보면 귀가 보기 민망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습니다. 어떤 선수들은 귀가 안으로 말려들다 못해, 구멍까지 거의 막히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수 없는 시간을 매트에서 뒹굴면서 연습을 했기 때문입니다. 선수로서 성공하기 위해서 그들은 귀가 문드러지는 것을 감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슬링 선수라고 하면서 예쁜 귀를 가지고 있다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선수로서 충실하지 못했다는 뜻이 됩니다. 선수로서 대성했는데도 귀가 여전히 아름답다면, 그는 특별한 관리를 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얼마 전, 어느 등산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그 등산가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봉우리들을 거의 다 정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집념의 결과, 그는 양손의 손가락을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동상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손은 보기에도 흉칙한 몽당 손이었습니다. 그는 그 손을 자랑스럽게 올려 보였습니다. 그는 그러한 장애를 스스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하여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그 손은 그 사람이 자신이 선택한 길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웅변으로 증명해 주었습니다. 눈물겨웠습니다.
이렇듯, 어느 한 가지에 뜻을 두고, 그 일에 전념하게 되면, 그로 인한 영광의 흔적을 몸에 지니게 됩니다. 아니, 어떤 높은 뜻에 마음을 두면,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서 몸에 어떤 이상이 생겨도 괘념치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육체의 모양에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육체는 단지 도구이므로, 자신이 세운 고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귀가 문드러지고 손가락이 떨어지는 아픔도 기꺼이 감수합니다. 혹자는 그런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할 지 모르지만, 나는 그들을 존경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목사로서 나는 어떤 흔적을 가졌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혹은 '선생으로서 나는 어떤 흔적을 가졌는가?'라고 묻기도 했습니다. 이 질문은 '많은 사람을 의의 길로 인도하는 인도자로서 뜻을 세운 나는 어떤 흔적을 가지게 될까?'라는 질문으로 연장되기도 했습니다. 좋은 레슬링 선수가 되려면 수 없이 매트에서 뒹굴어야 하듯이, 좋은 목사가 되려면 특별히 전념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게 뭘까? 좋은 목사가 되기 위해서 전념하게 될 경우에 남게 될 육체의 흔적은 무엇일까?
낙타 무릎! 그렇습니다. 예전 우리 선배 목사님들의 무릎은 낙타 무릎처럼 굳은살이 박혔습니다. 그러한 육체의 흔적은 그분들이 얼마나 기도에 몰두했는지를 잘 증명해 줍니다. 목사는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면 목사로서의 자기 직분에 충실했다면, 그의 무릎이 정상이 될 수 없는 이치입니다. 물론, 요즈음에는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낙타 무릎이 되지 않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무릎에 굳은 살이 없다고 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목사님들이 많이 앓고 있는 각종 질병도 사실은 육체의 흔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쓸 데 없는 욕심을 부리거나 잘못하여 갈등을 만들고, 그로 인하여 마음 고생을 하고, 그로 인하여 병을 얻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교인들을 위해서 함께 고통하고 함께 울다 보면, 목사님의 속은 숫껌뎅이가 되고 맙니다. 어느 원로 목사님께서 지나가다가 속이 시꺼멓게 썩은 고목나무를 보시고, '너는 목회도 안 했는데, 왜 그렇게 속이 썩었냐?'하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배짱 좋게 목회하는 분들은 병 없이 살지만, 여린 마음으로 교인들과 함께 울고 웃는 목회자라면, 당연히 그러한 흔적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 잘못 빠지면, 일부러 육체의 흔적을 만들려고 합니다. 기도를 많이 했다는 티를 내기 위해서 일부러 목청을 돋구어 기도하는 사람들처럼. 하지만 이런 흔적은 하나도 가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짐짓 자랑하기 위해서 애써 만든 흔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부름을 위해서 전념하다보니 자연히 생긴 육체의 흔적이 중요합니다. 이런 흔적이 있다면, 우리는 그 흔적을 쓰다듬으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를 진짜 목사가 되게 하셨군요'라고 감사 기도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지하철 역 화장실에 가보면 이런 글이 적혀 있는 것을 봅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작은 중소기업에 김주임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무슨 잔정이 그리 많은지 후배들 뒤치다꺼리나 하기 일쑤였고, 아무도 손도 안 대는 서류함을 거의 날마다 정리하느라 퇴근 시간을 넘겼으며, 어김없이 오후가 되면 커다란 쟁반에 커피 여러 잔을 들고는 “즐거운 오후 되십시오.” 하며 설탕 대신에 미소 한 숟가락을 더 넣어 책상에 놓아주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휴직계를 냈습니다. 아내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병간호를 위해 그는 그렇게 떠나갔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지만 한심하고 남자답지 못하고 무능하여, 있으나마나 한 사람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회사에 없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가 남기고 간 빈자리는 사람들에게 너무 큰 것이었습니다. 아침마다 마실 수 있었던 향긋한 커피는 기대할 수 없었을 뿐더러 책상 위의 컵들엔 커피 자국이 그대로 남은 채 먼지만 쌓여 갔고 향기 나던 화장실은 들어가고 싶지 않을 만큼 더러워졌으며, 휴지통에서는 늘 휴지가 넘쳤고, 서류들은 어디 있는지 서류철끼리 뒤죽박죽 섞여 쉽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서내 사람들은 점점 짜증난 얼굴로 변해갔고, 서로에게 화를 냈으며, 시간이 갈수록 큰소리가 오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실에 가득했던 화평은 어느새 조금씩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같은 동료였던 박주임이 상사의 짜증을 다 받아내느라 기분이 몹시 안 좋은 오후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문득 김주임이 끓여다 준 커피가 그리워졌습니다. 김주임이 생각나자 아직 남아있는 그의 책상 앞에 무심코 갔을 때 작은 메모가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가 편할 때 그 누군가가 불편함을 견디고 있으며, 내가 조금 불편할 때 누군가는 편안할 것이다 " 여러분은 지금 어떠십니까? 편하십니까? 그렇다면 누군가가 지금 여러분을 대신해서 불편함을 견디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니면 지금 불편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누군가는 여러분으로 인해 편안함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있으나마나한 사람, 필요 없는 사람, 필요한 사람.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십니까?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지 그 진가는 사실 지금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여러분께서 남기시고 갈 빈자리는 그것을 말해줄 것입니다. 여러분이 떠난 후 남게 될 빈자리를 생각하시면서 날마다 필요한 사람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한국의 슈바이쳐라 불리우는 장기려(張起呂, 1911-1995) 박사는 이 시대의 참 의사였으며 참 스승이었고 우리 시대의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의 삶을 이끈 두 가지 중요한 축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헌신적인 의료활동, 사회봉사활동, 청십자운동 등은 입술로만이 아닌 구체화된 하나님 사랑의 흔적이었습니다. 1950년 12월 평양의대병원 2층 수술실에서 그는 밤새워 가며 부상당한 국군 장병들을 수술하고 있을 때 갑자기 폭탄이 병원 3층에 떨어졌습니다. 국군들은 모두 재빨리 철수해야 했습니다. 그 바람에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생이별을 하게 되었고 일평생 빛 바랜 가족 사진 한 장을 가슴에 품고 아내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재혼를 권했지만 그는 언제나 똑같은 말을 되풀이 했습니다.
"한 번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나는 한 여인만을 사랑하기로 이미 약속을 했습니다. 내가 평양에서 결혼할 때 주례하시는 목사님께서 우리 부부를 앞에 세워놓으시고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두 사람은 백년 해로하라.' 재혼하는 것은 백년 뒤에나 생각해 볼 일입니다. 나는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영원히 살기 위해서 잠시 동안은 그저 혼자 살겠습니다!"
그는 결국 빛 바랜 사진을 보면서 아내를 그리워하다가 통일을 보지 못하고 작고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은 "내가 죽고 나거든 나의 비문에는 '주를 섬기면서 살다간 사람'이라고 적어달라" 입니다. 그가 남긴 일화들은 그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임을 말해 줍니다. 한번은 수술실에서 집도자인 장기려선생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의사 한 분이 그의 방으로 찾아갔습니다. 장기려선생은 방 한구석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기도가 끝난 다음 "아, 내가 늦었나요?" 하면서 미안한 듯 서둘러 수술실로 갔습니다. 그는 수술 전에 반드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천하의 명의로 알려진 그가 수술 전에 반드시 기도드린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줍니다.
여러분은 죽기 전에 이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기실 것 같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무슨 일을 많이 했는가에 흔적이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에 흔적이 있는가 하면 손, 발에는 없고 입으로만 한 몫 하니까 입에만 흔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현대 그리스도인을 앉은뱅이라 했습니다. 앉아 있을 때는 성한 사람이나 똑같지만 일하자 하면 앉은뱅이는 앉아서 뭉개져요. 일어나서 일을 못하잖아요. 현대 그리스도인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몸에 이제 예수의 흔적을 가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나의 삶에 주의 흔적이 남게 하소서. 내 생명을 주님께 드립니다. 때로는 어둠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세상에서 빛을 드러내지 못하고 어둠에 동화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믿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에 품고 살기 원합니다. 우리가 밝은 빛을 드러내 어둠을 이기게 하소서. 정직과 화목, 성실과 진실함의 흔적을 남기게 하소서. 그리하여 믿음의 사람들이 어둡고 썩어가는 정치와 문화, 윤리 속에서 빛을 드러내길 원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창문이 돼 세상 사람들이 이 창문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소서. 이러한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빛 되심을 세상에 알릴 수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 2부: 분반(구역)공부 자료

1. 말씀: 마루구멍을 뚫은 웨슬리의 기도

한 유명한 목사가 영국을 여행하던 중 감리교 창시자인 웨슬리 선생의 고택과 집무실을 둘러보게 되었답니다 평소에 기도하던 기도실로 들어간 그는 마룻바닥에 쥐구멍 같은 구멍이 두 개 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곳 안내자에게 물었습니다.
"저것은 무슨 구멍입니까?"
"목사님 생각에는 무슨 구멍 같으세요?"
"글쎄요,모르겠는데요. 혹시 쥐구멍이 아닌가요? 맞습니까?"
"천만에요. 저것은 웨슬리의 기도의 흔적입니다." 얼마나 기도를 열심히 했던지 웨슬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 그 마룻바닥에는 쥐구멍 같은 무릎 자국이 구멍처럼 뚫려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새벽 4시에 두 시간씩 기도하고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규칙적으로 금식 기도를 했습니다. 그를 지켜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기도를 중요시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모든 빛을 띤 청명한 얼굴로 기도실에서 나오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2. 묵상 및 토의
0 내가 가는 곳에 어떤 흔적를 남기고 있습니까? 사랑의 흔적입니까? 화평과 기쁨의 흔적입니까?
0 나는 이 세상에 좋은 흔적과 발자취를 남길 것 같습니까?
0 사도바울 처럼 당신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습니까?
0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실천해야 할 점이나 앞으로의 나의 결심, 각오, 다짐 등을 이야기 해보세요

3. 예화(1): 흔적(사도바울의 고백)

다메색 가는길 그가 날 찾아와 나로 고백 하게 하였네
아무도 나를 괴롭게 말라 내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매맞은 흔적을 배고푼 흔적을 날구원 하신 예수의 것이 되기위해 이 아푼 흔적을 가져야 했네 소나 말이 인두로 지져져서 주인의 소유가 되듯 내영혼 성령의 인두로 지저져 예수께 잡혔네
예수께 잡힌 그날로 나는 없고 내안에 예수만 있네
내게 사는것이 그리스도니 죽는것도 수지 맞을 일이네
내가 좋아 한것들 내가 자랑 하든것들 묻어버린지 오래되었네 내모습 묶어 버리고 그로 내안에 플어놓아 그를 말하게 하시고 그를 알리게 하며 그를 보이게 하시네 내안에 붙은 그의 흔적 그의 표시 되어 나로인해 그에게로 돌아 서니
그의 사람 작든 크든 그의 흔적 가져야 하네

* 예화(2): 세상을 떠나면서도

세상을 떠나면서도 쓰레기만 잔뜩 남기고 떠나가는 사람이 있다.
세상을 떠나면서도 무성한 소문만 가득 남기고 떠나가는 사람이 있다.
세상을 떠나면서도 항상 기억하고픈 아름다운 사랑을 남기고 떠나가는 사람이 있다
세상을 떠나면서도 따뜻한 인정, 훈훈한 정을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기고 떠나가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떠나갈 것인가
/용혜원

* 예화(3): 십자가의 고통 체험

어린 조카 중에 하나가 척추병에 걸려서 허리가 굽어지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결국 세브란스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그 상한 척추뼈 세 마디를 빼고 대신 뼈를 넣어 주어야 하는데 특히 어린 아이기 때문에 산 뼈를 넣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 뼈를 빼 주기로 하고 환자와 함께 수술실에 들어갔다. 내 허리 옆에 있는 부채뼈 3cm를 잘라 주어서 수술 받게 한 일이 있다.
그 애는 지금 커서 출가하여 잘 살고 있다. 나는 그 뼈를 빼어 주면서 예수의 십자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어서 지금은 감사하게 생각한다. 3cm의 뼈를 절단하여 준 자리는 만질 수도 없이 아픈 것은 물론이지만 숨을 크게 쉴 수도 없으리만큼 절단한 뼈 부위의 울림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고통이 있기에 병신으로 죽게 될 아이가 정상인이 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에서 참고 견딜 수 있었다. 또한 성한 사람의 뼈를 잘라서 오래 고생하는 것을 보고 이해 못하는 친척들도 있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고통을 참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조금이라도 따를 수 있게 된 것을 보람으로 생각하며 지금도 그 흔적을 만져 본다.
(박경천 목사의 간증)

좋은 만남, 복된 만남
복된 만남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기회를 줍니다. 우리 안에 있는 엄청난 가능성을 발견하도록 도와줍니다. 삼중고(三重苦: 입과 눈과 귀의 장애)를 겪는 어린 헬렌 켈러를 만난 설리반은 헬렌에게 있는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그 가엾은 소녀 속에 감추인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평생 헌신했습니다. 좋은 만남이 좋은 삶을 만들 듯이 하나님과의 만남은 당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을 만나면 끝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납니다.

하나교회의 비전
1. 365일 예배드리는 교회(히10: 25, 행17:11)
오늘날 죄악이 만연한 세상에서 매일 말씀을 읽고, 듣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말씀의 거울을 통해 매일 마음을 바르고 깨끗이 하여서 예수와 복음을 위해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막8:35)
2. 더불어 사는 공동체 (행2:42- 47)
하나님은 영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육신까지도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천국에 대한 소망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교회는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안에서 한 가족이 되고, 교회 직영 사업을 통해 청장년의 일자리 마련, 노후생활 보장 등의 꿈과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3.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교회(롬14: 17)
정의롭고(선행에 힘쓰고), 근심, 거정, 두려움이 없고(기도에 힘쓰고) 기쁨과 찬송이 넘치는 교회
4. 하나님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마22:37- 39)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이러한 꿈과 비전이 있는 교회를 개척하고자 합니다. 연락바랍니다.

하나 교회 한 태 완 목사
전화: 010-7676-3049, 자택: (02) 959-3049
이메일: jesuskore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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