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자유(36)

복음............... 조회 수 600 추천 수 0 2005.08.01 09:5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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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자유(36)

본문: 신명기 30:19-20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어느 아버지가 두 아이를 데리고 주말여행을 떠났습니다. 계곡에 이른 아버지는 두 아이에게 텐트를 칠 만한 자리를 찾아보라고 일렀습니다. 큰 아이가 바위 근처로 달려가며 말했습니다. "아버지, 여기가 좋아요" 그러자 작은아이가 대꾸했습니다. "아니예요. 거기는 경사가 져서 안 좋아요." 그리고는 작은아이가 소나무 밑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아버지, 여기가 좋아요." 그러자 이번에 큰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아니예요. 거기는 송충이가 있어요."
더 나은 곳을 찾기 위해 두 아이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큰 아이가 물가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아버지, 여기가 어떨까요?" 그러자 작은아이가 말했습니다. "아까 그 바위 근처만 못한걸." 그들은 다시 맨 처음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바위 위도 소나무 밑도 벌써 다른 사람들이 차지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똑똑히 들어 두어라. 더 나은 것은 더 나은 마음만이 선택할 수 있다." 아이들이 물었습니다. "더 나은 마음이란 어떤 마음인가요?"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장점을 크게 보고, 단점을 감싸 안으면서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는 운명지어진 것과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운명지어진 것이 아니며 또한 모든 것이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정해진 삶 속에는 선택의 자유가 있지만 그 결과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릅니다.
저드슨은 지금으로부터 180년 전에 미국 교회가 처음으로 파송했던 선교사입니다. 그는 탁월한 수재였기에 젊은 25세의 나이에 모교인 대학으로부터 교수 초빙을 받았고, 같은 해에 보스톤에 있는 어느 큰 교회로부터 담임목사 청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 곳을 다 정중하게 사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선교사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혼한 지 보름만에 아내와 함께 인도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인도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교사라는 이유 때문에 쫓겨났습니다. 긴 항해 도중에 아내는 유산을 했고 너무 허약해진 나머지 랑군에 도착했을 때 들것에 실려 배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저드슨 부부는 복음을 위해 열심히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어 두 번째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도 몇 달되지 않아 열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러자 저드슨은 낙심하지 않고 복음 사역에 최선을 다했는데 그만 감옥에 끌려 들어갔습니다. 그는 창문이 하나도 없는 캄캄하고 더러운 감방에서 일년 반 동안이나 고생을 했습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그의 아내는 건강을 해쳐 출감한 직후에 3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아이도 몇 개월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저드슨은 낙심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서 일했는데 결국에는 자신도 병이 들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요양을 하려고 고국으로 가는 배를 탔는데 그의 건강이 너무 악화되어 고국 땅을 밟아보기도 전에 숨지고 말았습니다. 이 땅에서 저드슨의 삶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저드슨은 불교가 국교인 그 나라에서 최초로 성경을 만들어 수많은 영혼을 구하는 데에 쓰임 받았습니다. 또 그의 부인은 오늘날 선교사 부인들 중에 가장 귀감이 되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있습니다. 저드슨은 세상으로 통하는 넓은 길을 버리고 고난의 길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마7:13-14, 눅13:24)
여러분이 지금 가고있는 인생의 길은 좁은 길입니까? 넓은 길입니까?, 또 의인의 길입니까? 악인의 길입니까?(잠4:10-27) 검소와 절제의 길입니까? 사치와 낭비의 길입니까?
아담이 하나님께 지음 받아 에덴동산의 낙원에 거하게 된 것은 선택의 여지없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요 운명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 26∼27절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아 에덴동산에서 살도록 운명지어졌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에게도 하나님은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에덴동산의 모든 나무의 실과는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 가운데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먹는 날에는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잘못된 선택을 하면 무서운 결과를 갖는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15∼1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얻는 나무 실과는 아담과 하와가 자유로이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악을 아는 나무의 실과는 먹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선택은 아담과 하와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선택의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유혹으로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하여 “정말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묻자 하와는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마귀는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말하며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마음에 탐욕이 들어온 하와는 스스로 선택하여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에게도 주었습니다. 아담은 이를 거부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 선택하여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타락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일어나는 지구상의 많은 비극은 우리 인간이 스스로 택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면 아파트에서 뛰어 자살하려는 사람을 막지 않으셨느냐,’‘왜 전쟁과 가난과 고통을 그대로 두고 보시느냐’ 하면서 ‘하나님은 안 계신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지으신 것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름답고 좋은 세계를 지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의 비극적 세계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택한 삶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먹으면 죽는다고 한 선악과를 따먹고 이러한 비극적인 운명을 초래했습니다.
모든 것이 죽음이라는 나무의 뿌리에서 나온 것으로, 오늘날의 비극적인 일들을 만들어 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어 영적으로 죽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겼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남자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17∼18절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편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당하고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지배하려는 갈등과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16절에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아내를 다스리는 것, 이것이 남녀간 갈등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결국 인간 육체의 죽음을 선언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 19절에서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의 죄, 마귀와 세속, 질병과 저주, 가난과 전쟁, 죽음과 좌절, 절망 등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아담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마귀의 유혹으로 스스로 택한 것입니다. 이후 이것은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에게 운명으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제일 조건은 자유입니다. 아담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선택의 자유가 없다면 꼭두각시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꼭두각시를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로봇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는 이상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합니다. 자기가 잘못 택했으면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그 말씀을 어기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고 사망의 열매로 오늘날 우리는 온 세계의 비극과 고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남의 탓으로 돌리면 안됩니다. 성경에 아담은 자신이 선악과 먹은 것을 하나님 탓, 하와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아담은 “당신이 지어서 내게 주신 그 여자가 주므로 먹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가 선악과를 먹고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하와에게 돌렸습니다. 하와 역시 “뱀이 나를 유혹하므로 먹었나이다”라고 하며 그 책임을 뱀에게 돌렸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한 길에 대한 책임을 자꾸 남에게 뒤짚어 씌우려 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3절에서 바울 선생은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떠나 진실함과 깨끗함을 버리고 부패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택하고 성령충만하여 열심히 기도하며 진실하게 사는 것을 택할 수도 있고, 게으르고 나태하여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읽지 않으며 세상과 마귀와 짝하여 부패할 수도 있습니다.
큰 호수는 물고기가 만들지 못합니다. 큰 호수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호수에 사는 물고기가 오른편에 살 것인가 호수의 왼편에 살 것인가, 헤엄을 칠 것인가 그 자리에 머물 것인가 하는 것을 택합니다. 호수 그 자체는 운명지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호수 안에 사는 물고기가 어디에서 살 것인지, 움직일 것인지의 여부는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역시 많은 부분이 운명지어져 있지만 또한 우리 스스로가 선택해야 할 것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선택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완전한 사람이시므로 예수님도 아담과 하와처럼 시험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유가 없는 로봇과 같다면 시험할 필요가 없을테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으므로 선택의 자유가 있으시고, 또한 시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사십주야를 금식하신 후 매우 굶주리셨을 때 마귀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금식을 해본 사람은 금식 후 얼마나 배가 고픈지 압니다. 보통 사람들은 사흘만 금식해도 배고픔을 호소합니다. 예수님은 사십주야를 금식하셨으니 얼마나 주리셨겠습니까? 예수님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우선 먹자’는 마음을 택하셨다면 돌을 변하여 떡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의 유혹에 그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예루살렘 거룩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내려다 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고 예수께 말했습니다. 이번에도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는 물러서지 않고 높은 산에 올라가 온 천하 영광을 예수님께 보여주었습니다. 부귀와 영광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일본도 저렇게 잘 살고, 홍콩이나 싱가포르 사람들도 잘 사는데 꼭 예수님을 믿어야 잘 산다고 하느냐’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마귀도 이 세상의 부귀와 영광을 우리에게 줄 수 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한 이 마지막 장면은 높은 산 위로 올라가 천하의 영광을 보이면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고 유혹하였습니다. 마귀를 따라가면 마귀가 부귀와 영광을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안을 빼앗기고 영의 귀를 빼앗기며 깨닫는 마음 역시 빼앗겨 결국 지옥에 떨어지게 됩니다. 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 공명이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마귀는 잠시 있는 것을 취하게 하고 영원한 하나님을 버리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을 따라가면 하나님은 현세에서 뿐 아니라 내세에서도 부귀와 영광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염려하는 것이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더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일에 항상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진실한 그리스도를 통한 부귀와 영화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귀와 영화를 받으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체험하게 되어 금세에서도 은총을 입고 또한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마귀는 이 세상에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한 후 그것을 미끼로 천국을 빼앗아 갑니다. 우리의 영혼을 멸망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마귀의 유혹에 대해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자랑을 선택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섬기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일생에 하나님의 성령이 주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선택하셨으므로 하나님의 성령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14∼15절에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선택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을 아셨습니다. 엄청난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고 치욕의 고통 당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 또 다른 유혹이 왔습니다. 헬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헬라로 모셔 가려 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0∼21절에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빌립을 통해 헬라 사람들은 예수께 와서 ‘유대 사람들이 당신을 배반하고 죽이려하는데 헬라로 우리와 함께 가면 환영하겠다’며 헬라로 갈 것을 유혹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헬라 지방으로 가셔서 환영받고 편안하게 여생을 지내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2장 23∼24절에서 예수님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유대 땅에 남을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기도하실 때 선택은 얼마나 괴로우셨는지, 주님은 이를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것을 가룟유다가 알았으므로 그는 로마의 군인들과 대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그 자리에서 기도할 때 선택의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땀방울이 핏방울로 변했습니다. 오늘날 의사들은 사람이 너무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피부 바로 밑에 있는 모세혈관이 터져 피가 땀구멍을 통해 넘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심한 고통을 받으셨으면 모세혈관이 터져 땀방울이 핏방울로 떨어졌겠습니까? 마가복음 14장 36절에는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완전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버림당하고 고통 당하며 죽을 것을 생각할 때 너무 괴로워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서 예수님은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선택한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를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체포되어 온갖 곤욕과 괴로움을 당할 때 장엄한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살기 위해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가 “내가 너를 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말했지만 주님은 생명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택하신 길을 뒤돌아보지 않으시고, 일단 죽기를 각오한 이상 후회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7장 11∼14절에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한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엄한 침묵입니다. 주님은 죽음을 선택하시고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선택하여 희생제물이 되셨고, 그로 인해 우리의 구주가 되신 것입니다. 첫 아담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을 택하여 선악과를 따먹었지만, 마지막 아담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결심하고 죽기까지 순종하는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처음 아담의 잘못된 선택으로 우리 모두가 죽었지만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올바른 선택으로 우리가 다시 살게 된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대군을 이끌고 유럽을 휩쓸고 있을 때, 장군 한 사람이 정예 부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의 국경 도시인 펠드리히를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포위망을 좁히며 총공세를 펴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펠드리히 시에서는 비상 시의회를 소집하고 항복 여부를 논의하였는데 대다수 시의원들의 의견은 미리 항복해서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자는 데로 모아졌습니다. 그때 교회의 지도자 한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부활주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우리의 힘만을 믿는다면 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맡긴다면 살 길이 열릴 것입니다. 무서워 떨고만 있지 말고 교회의 종을 힘껏 치고 부활절 예배를 드립시다. 그리고 그 뒷일은 하나님께 맡깁시다."라고 말했습니다.
드디어 펠드리히 시에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찬송소리가 메아리치기 시작했습니다. 종소리와 찬송소리는 프랑스군 진영에까지 울려 퍼졌습니다. 프랑스 군대는 밤사이에 오스트리아 군대가 도착했기 때문에 울리는 기쁨의 종소리와 노랫소리일 것이라고 판단해서 공격을 취소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말았습니다. 펠드리히 시는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절망할 자유와 희망할 자유가 있습니다. 믿을 자유도 있고 믿지 않을 자유도 있습니다. 맡길 자유도, 내가 움켜쥐고 있을 자유도 있습니다. 영원히 살 자유도, 영원히 멸망할 자유도 있습니다. 둘 중하나를 선택할 자유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든 뜻대로 선택할 자유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늘 알아야 될 것은 삶의 큰 틀은 운명지어져 있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님은 우리가 태어난 시대와 지역은 운명지어져 있으므로 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예수님을 선택할 것인지, 세상을 선택할 것인지는 우리가 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전도를 받았을 때 예수님을 택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택하지 않았을 때 내세에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그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듣고 난 이후 내가 하나님을 믿을 것이냐 믿지 않을 것이냐, 성령께 순종할 것이냐 안 할 것이냐 하는 것은 스스로가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부름 받은 사람은 많되 택함 받은 사람은 적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러 주셨는데 대답을 하느냐 안 하느냐는 우리에게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사람을 통해 여러 모양으로 우리를 불러주셨을 때 우리가 ‘예’하고 따라 왔으므로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셔도 대답하지 않으므로 택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든 그 이후의 결과는 우리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가 생명을 택하고 사망을 택하지 않는 것, 복을 택하고 저주를 택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살기 위해 생명을 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말씀을 순종하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함께 놓았는데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보혈을 통해 죄악과 절망 대신 용서와 의와 사랑을 택하고 세속과 마귀 대신 성령과 거룩함을 택하고, 병과 고통 대신 치료와 건강을 택하고, 저주와 가난 대신 아브라함의 축복과 예수 그리스도의 형통을 택하고, 죽음과 지옥과 영원한 멸망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활과 천국과 영광을 택하라’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은 정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잘 택하였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길을 택한 것입니다. 우리는 복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복이 없는 사람은 이 길을 택하지 못합니다. 복이 있어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 선택의 갈림길에 놓여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자란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둘은 자라 결혼하여 분가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심리학자들이 이 알콜 중독자의 아들로 태어나 자란 이들이 결혼하여 어떻게 사는가를 조사해보았습니다. 맏아들은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알콜 중독자였기 때문에 받았던 어릴 적의 고통과 기억 때문에 술은 아예 보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아주 깨끗하게 잘 살고 있었습니다.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사업을 하며 행복한 가정을 꾸몄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알콜 중독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부인은 집을 나가고 자녀들은 고아원에서 처참하게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그 두 아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똑같이 알콜 중독자의 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는데 이렇게 되었습니까?” 맏아들은 “선생님! 선생님의 아버지가 알콜 중독자라면 선생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저도 알콜 중독자가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어떤 것을 택하느냐에 따라 이처럼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똑같은 세상에, 똑같은 시절에 삽니다. 그러나 마음먹기에 따라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은 복을 받고 한 사람을 저주를 받습니다. 한 사람은 천국으로 가고 한 사람은 지옥으로 갑니다. 마음의 선택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이처럼 다른 결과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이므로 결코 다른 사람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앞에는 항상 두 길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하나님의 길과 세상의 길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은 좁고 험합니다. 마태복음 7장 14절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것은 쉽지 않으므로 그 길을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 여러 가지 절제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 길을 택하지 않고 쉬운 길, 넓은 길을 택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좁고 험한 이 길을 택했지만, 예수님을 믿고 막상 안에 들어와 보면 이것이 참으로 넓고 좋은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성령과 사는 것보다 더 의와 평강과 희락과 믿음, 소망, 사람이 넘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와 보기 전에 좁은 길을 걷지 못하고 세상으로 나갑니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길은 얼핏 보아서는 넓고 편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7장 13절에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길을 갈 것인가의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으로 남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미국에 아주 친한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두 사람이 술집으로 가다가 교회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오늘 저녁 설교는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라는 설교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한 친구는 “교회에 가보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한 친구는 “술 먹고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사는게 얼마나 좋은데, 나는 싫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한 친구는 교회로, 다른 한 친구는 술집으로 갔습니다. 세월이 지나 당시 술집으로 갔던 사람은 살인을 저지르고 중죄인으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어느 날 신문에 그의 옛적 친구가 신문에 크게 보도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놀라서 자세히 보니 함께 가다가 교회가겠다고 하던 친구인 클리블랜드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는 보도였습니다. 사람의 길이 한 순간의 선택으로 인해 이처럼 달라질 수 있습니까? 똑같이 청년시절에 술 먹고 방탕했는데, 하루 저녁의 갈림길에서 한 사람은 교회로, 다른 한 사람은 술집을 선택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교회를 택했던 사람은 대통령으로, 술집을 향했던 사람은 죄인으로 감옥에 갇히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마태복음 6장 29∼33절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과 같이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십니다.
코카콜라의 창업자인 아사 캔들러는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캔들러 자신도 그러한 자기의 삶을 돌이키려고 무던히 노력을 했지만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술에 취해 집으로 오는데 그의 귀에 벼락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자신의 본능적 욕구를 절제하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캔들러는 아내에게 그 말을 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나와 함께 교회에 나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주님께 부르짖어 당신의 본능을 제어하십시오. 당신의 본능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을 섬기며 십일조를 드리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내의 말을 듣고 또한 아내의 간절한 기도로 캔들러는 교회를 다니며 술을 끊고 수입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을 간절히 구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영세한 코카콜라 회사가 있는데 이 회사가 법원에 경매 처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캔들러는 당시 2300불을 들여 그 회사를 인수하여 지금의 코카콜라로,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웠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하나님을 믿으며 주님을 위한 선교 사업으로 일생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알콜 중독자였던 사람이 어느 날 하루 그의 길을 올바르게 선택하여 자신의 허물을 끊고 하나님을 섬기며 십일조를 드리면서 믿음 생활을 하자 그의 인생에 새로운 기회가 생겼고 그로 인해 그는 놀라운 기업가로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코카콜라는 세계 구석구석 안 들어가는 곳이 없고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서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복을 주십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이 선택여하에 달리게 됩니다. 지혜롭게 선택하면 성공과 행복이 뒤따르고 선택을 잘못하면 실패와 불행이 따릅니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있고 순종하여 안 먹을 수도 있는데 선택을 잘못하여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사실 인간의 매일의 생활은 선택으로 이루어집니다. 무슨 옷을 입고, 무엇을 먹으며, 어떤 집을 사고, 어떤 물건을 살까? 어떤 학교로 진학하고 어떤 배우자와 결혼하며 무슨 사업을 하고 어떤 지도자를 택하여 투표할까? 그런데 이 선택의 자유는 결국 책임이 따릅니다.
모세는 공주의 아들로서 호화롭게 지내느냐? 압박 받는 내 민족과 운명을 같이하고 살 것이냐는 두 갈림길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히11:24-26)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목자들의 싸움으로 넓은 들과 골짜기를 선택할 때 푸른 풀만 보고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악함을 염두에 두지 않았으므로 불행한 일을 당합니다. 솔로몬에게 장수의 축복과 부귀의 축복에서 무엇을 줄까 물었을 때 지혜의 축복을 달라고 하자 장수와 부귀의 축복도 더하여 주셨습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과 팥죽 한 그릇의 선택에서 굶어죽게 되었는데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슨 상관이냐며 팥죽 한 그릇을 선택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였습니다.(잠19:3)
롯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고국으로 돌아갈 때,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고부의 의리를 택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롯을 어떻게 축복하였는지 우리는 구약성경 롯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는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축복의 길과 저주의 길,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의 길(요10:11-14)이 놓여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가는 길은 어느 길을 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과 바알(왕상18:21), 하나님과 세상(약4:4), 하나님과 재물(마6:24) 중 무엇을 선택할 것입니까? 둘 다 섬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 중하나를 선택할 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고, 성경말씀을 중심으로 선택하고,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실 것인가를 생각하여 선택할 때 자연히 모든 선택이 바르게 됨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자유를 가졌으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 세상 자랑을 따라가는 길을 걸어가지 말고 믿음과 소망, 사랑의 길을 택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잘되면 자기 탓이요 잘못되면 남의 탓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길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고 자기의 잘못된 선택을 남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잘못된 선택을 회개하고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하나님 섬기는 것을 택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을 택하고 예수님을 택하고 말씀을 택하여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택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생에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할 뿐 아니라 천국 영생을 얻어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이미 운명지어진 것도 있지만 우리 삶의 많은 것을 우리가 선택할 자유가 있음을 압니다. 운명지어진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길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택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택하며, 말씀을 택하고 천국을 택하여 영생을 얻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래서 영원히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사는 우리들이 되도록 주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 2부: 분반(구역)공부 자료

1. 말씀: 인생은 선택의 차이

어떤 알코올 중독자에게 아들이 둘 있었습니다. 도저히 두 아들을 키울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복지과 직원에 의해서 이 아들들은 각각 다른 집으로 입양을 보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다음 두 아들의 행방이 궁금해서 복지과 직원이 추적을 했습니다. 과연 이 두 아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첫째 아들을 찾아가 보았더니, 아버지와 똑같이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수용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질문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당신도 이렇게 살 수 있단 말인가?" 그 아들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인데, 어떻게 내가 알코올 중독자가 안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맞는 듯합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부모가 본을 보여야 한다는 말이지요. 웃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도 할 수 있지요. 여러분 꼭 그럴까요?
이번엔 둘째 아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형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동생은 사랑하는 아내와 예쁜 자녀들과 함께 아주 단란한 가정을 가꾸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질문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아버지와 전혀 다르게 살수 있습니까?" 그때 아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그렇게 사셨는데, 내가 어떻게 똑같이 살 수 있단 말입니까?" 타산지석이나, 병가지상사란 말이 맞는 것입니다. 두 아들이 살아온 삶의 조건은 똑같습니다. 같은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도 판이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두 아드님은 똑같은 아버지의 유전자를 받고, 똑같이 처절한 환경 속에서 삶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알코올 중독자가 된 것이 너무나 당연한 노릇이라 생각했지만, 또 다른 사람은 알코올 중독자가 되지 않은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잘 보세요! 남의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의 차이, 판단의 차이는 결국 삶의 결과까지도 엄청나게 차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인생은 선택입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 에 따라서 운명이 바뀌는 법입니다. 중요합니다. 잘 선택을 해야 합니다. 바르게 판단을 해야 합니다. 행복과 미래는 판단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결코 운명이 아닙니다. 환경을 탓하며 원망과 불평을 하며 자신은 물론 함께한 사람들까지도 망치고 있는 사람은 아닙니까? 불행한 사람이 가는 길입니다. 아니면, 환경을 뛰어 넘어 하나님의 축복을 만들어 가는 사람입니까? 행복한 사람이 되시렵니까?

2. 묵상 및 토의
0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할 때 우선순위가 무엇입니까?
0 내가 선택하여 가는 길은 좁은 길입니까? 넓은 길입니까?
0 나는 내 마음 은밀한 곳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는가? 내게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이 없는가?
0 나는 신앙 제일주의의 삶을 살고 있는가?
0 내 삶의 왕은 누구입니까? 나는 하나님께 순종합니까? 하나님을 내 마음 중심에 모시고 있습니까?
0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느낀 점이나 앞으로의 나의 결심, 각오, 다짐 등을 이야기 해보세요

3. 예화(1): 선택

예전 모 프로그램에서 꽤 흥미로운 코너를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 결심했어!"라고 외치던 주인공의 얘기죠.
주인공은 항상 어떤 양자 택일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상당한 차이를 불러오죠. 우리는 매일 순간순간 크고 작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당신은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먼먼 훗날 우리의 인생을 돌아볼 때, 그래도 나의 선택이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만 있다면 그건 참 행복한 일일 것입니다.

* 예화(2): 선택과 성공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잘못된 선택으로 후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마릴린 먼로가 그의 친구 콜린 타운센드를 만나서 한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두 사람 모두 할리우드에서 유명한 배우가 되는 꿈을 가졌는데 타운센드는 후에 예수를 믿고 선교사와 결혼해 할리우드를 떠났고 먼로는 세계적인 배우가 되었습니다. 후에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먼로는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 영화배우가 되기로 했을 때 나는 굳게 결심했지. 그래서 꿈을 이루었지만 너무나 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했어.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불행한 사람이야.” 그리고 얼마 후 먼로는 자살하고 맙니다. 그의 선택의 귀결이었습니다. 배우가 되는 것이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수가 되는 것이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위하여 택하고 왜 그것을 선택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이 때문에 지혜와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선택권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선택은 근본적으로 자유롭습니다. 아마 처음부터 늘 최선의 선택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매순간 선택을 해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솜씨는 점점 향상되어 갈 것이고, 그에 따라 우리는 더 적극적으로, 더 자유롭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인생은 선택입니다. 어떤 것에 우선 순위를 두고 선택하여, 집중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갈립니다. 좋은 선택, 그 다음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입니다.

4, 찬송(1): (265장)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1.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세계 만민이 의의 길 이 길 따라서 살길을 온세계에 전하세 만백성이 나갈 길
2. 주 예수 따르라 승리의 주 세계 만민이 돌아갈 길과 진리요 참생명 네 창검을 부수고 다 따르라 화평왕
3. 놀라운 이소식 알리어라 세계 만민을 구하려 내주 예수를 보내신 참 사랑의 하나님 만백성이 따를길
4. 고난길 헤치고 찾아온 길 많은 백성을 구한길 모두 나와서 믿어라 온세상이 마침내 이 진리에 살겠네

[후렴]
어둔밤 지나서 동튼다 환한 빛 보아라 저 빛 주 예수의 나라 이땅에 곧 오겠네 오겠네

* 우리는 좋은 교회를 만나야 합니다. 교회 선택은 마치 결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의 방황이 끝나고, 좋은 교회를 만나면 신앙의 방황이 끝난다!”그러나 이 지상에는 완전한 교회가 없습니다. 완전한 교회는 천상 교회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중하게 선택하되 완전한 교회를 찾느라 교회 쇼핑을 하거나 거듭 방황만 해서는 안 됩니다. 마치 처녀가 완전한 신랑감을 찾아 고르고 고르다 평생 결혼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좋은 교회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나의 영혼을 위해 지속적으로 은혜를 공급받을 수 있는 교회인가? 내가 공동체 안에 들어가 어울리며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교회인가? 사역 프로그램들을 나의 사명으로 삼고 헌신할 수 있는 교회인가? 이런 기본 조건들이 맞으면 일단 좋은 교회라고 보고 선택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우리 성도들에게 신령한 은혜를 베푸시고, 사랑을 나누게 하며,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1. 하나교회는 초대교회(사도행전2:42-47)와 같이 모든 성도가 서로 사랑과 교제와 나눔이 있는 교회입니다. 즉 하나님도 한 분, 지구도 하나, 진리도 하나,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교회입니다. (사도행전4: 32)
2. 매일 예배를 드리는 교회입니다.(히브리서 10:25, 행17:11)
3. 하나교회는 예수님이 주인이신 예수공동체이며, 모든 성도가 영육간에 주림이 없는 풍요로운 삶과 꿈(비전)을 보장하는 교회입니다.
4. 모든 성도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헌신, 충성하는 교회입니다.(막8:35)
5. 교회 예산(선교, 구제비)을 헌금(십일조)에만 의존하지 않고 교회 직영의 사업체를 두어 성도(신자)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마음껏 발휘하고 자아실현의 기회를 주는 교회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와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진리와 생명이 있고, 사랑이 있는 교회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본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개척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땅끝까지, 세상 끝날까지 함께 전하며 당신을 믿음의 형제, 자매로 모시고 의(義)와 평강(平康)과 희락(喜樂)과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고저 합니다. 연락바랍니다.
하나 교회 한 태 완 목사
전화: 010-7676-3049, 자택: (02) 959-3049
홈페이지: http://comesee.ce.ro, je333.ce.ro
이메일: allco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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