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한글성경 번역자 이응찬

복음............... 조회 수 1270 추천 수 0 2005.06.15 04:4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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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글성경 번역자 이응찬

1876년 봄,로스는 한글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는데 그 이름은 이응찬이었다. 로스는 한글선생을 고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불확실한 것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로스는 1877년 이응찬과 함께 미래의 선교사들을 위한 기초 한글교재(Corean Primer)를 간행하였고,1878년 봄에는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하였다.
이 당시 서양인을 돕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이응찬이 로스를 도와서 성경을 번역하고 있다는 것을 안 어떤 한국 사람이 이응찬을 고발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래서 그는 다시 의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후인 1879년 봄, 이응찬은 다시 만주로 왔다. 당시 로스는 안식년으로 본국에 귀국하였다. 그가 하던 번역사업은 매킨타이어에 의해서 계속되었다. 매킨타이어는 이응찬을 한글교사로 삼고,성경을 계속 번역하도록 했다. 이때 번역한 것이 로마서와 히브리서였다.

이응찬은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의 신앙이 분명하지 않았다. 그는 아편쟁이로 의심받았고,식사 때에는 중국 화주(火酒)를 곁들이는 습관이 있어서 그가 출석하던 중국교회신자들은 그의 신앙을 의심하였다. 이응찬의 세례는 자꾸 연기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이응찬은 짬을 내어서 고향을 방문하였고,매킨타이어는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응찬은 고향에 가서 성경을 깊이 연구한 다음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서 돌아왔다. 그래서 그는 1879년 여름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한국 개신교인으로서는 세 번째 세례였다.

1881년 로스는 안식년을 끝내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이응찬은 로스와 더불어서 성경번역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 후 긴 세월을 통해서 로스와 이응찬은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고,1887년 최초의 한글번역성서인 ‘예수셩교젼서’가 완간되었다. 이응찬은 이 최초 한글성서의 반절 이상을 번역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 성경번역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1883년 9월 이국 땅 봉천에서 콜레라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번역한 성경은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박명수<서울신대 신학대학원장>

말씀의 누룩 된‘만주 한인촌’

한국에 처음 복음이 들어온 것은 만주를 통해서이다. 만주에 있던 매킨타이어와 로스 선교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선에 복음을 전하려고 시도했다. 이들이 시도한 방법의 하나가 바로 만주에 있는 한인촌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로스는 1882년 한글성경번역인 예수성경교본을 간행하고 본격적으로 만주 한인촌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식자공인 김청송을 최초로 전도자 겸 권서로 임명하였다. 김청송은 자신의 고향이자 고구려의 고도인 지안을 중심으로 한글 복음서와 전도책자를 반포하여 많은 사람을 개종시켰다.
1884년에는 김청송에게 성경을 사서 읽은 조선인 여러 명이 펑텐(奉天)에 있던 로스를 찾아왔다. 이들은 임오군란 때 보수파에 속했던 사람들인데 만주로 망명하여 한인촌에 피신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중 최연장자는 로스에게 세례를 받고 성경 번역까지 돕게 되었다.
선교의 기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로스는 1884년 11월 동료 선교사 웹스터와 함께 한인촌 방문에 나섰다. 두 사람은 오랜 여행 끝에 묘이산에서 시작되는 한인촌에 도착하였고 여러 한인촌을 차례로 방문하였다. 이 여행에서 이들은 전직 군인을 포함해서 75명의 남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계곡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한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면서 로스 선교사는 감격했다. 그는 이들이 조선의 북부 지방에 퍼지는 누룩이 될 것을 희망했다. 그의 노력으로 지안현의 압록강 연안 계곡에 있던 28곳의 한인촌에는 1884년말 수세자 100명,남자 세례 요청자 600명에 이르게 됐다. 또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수천 가구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중국인들이 한인들을 집단적으로 구타하고 재산을 빼앗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대다수 한인들이 귀국하였으나 신앙생활은 계속하였다. 훗날 선교사들이 조선 북부지방에 들어왔을 때 곳곳에서 신앙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한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로스 선교사의 기도대로 만주의 한인 신자들은 조선 선교의 누룩이 됐던 것이다.
/박명수<서울신대 신학대학원장>

청·일전쟁 이후 선교사들의 판단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는 아시아의 주도세력에서 밀려났다. 아시아의 주도권은 일본과 러시아로 넘어갔다. 일본은 만일 만주와 조선이 러시아에 넘어간다면 그것은 명백하게 일본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다. 조선과 일본은 단지 125마일의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여기에 놓여 있는 조선의 항구들은 일본의 안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러시아 역시 동진정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시베리아 철도의 종착역은 블라디보스토크인데 이 항구는 1년에 6개월은 얼어붙어서 사용할 수 없었다. 러시아의 일관된 정책은 만주와 조선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극동에 대한 유럽 각국 정책은 오락가락했다.하지만 러시아는 일관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특별히 러시아에 대해서 경계하였다. 러시아가 주변의 약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매우 잔인했다. 때로는 회유하고 때로는 협박해서 수많은 나라를 합병하였다. 선교사들은 러시아를 서양의 문명을 계승한 나라로 보지 않았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긴 후 조선에서 일본이 우위를 차지한 것처럼 보였지만 얼마 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함으로써 조선은 러시아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것은 러시아 세력이 강력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개신교 선교사들은 국제정치가 선교에 미칠 영향을 염려하였다. 당시 러시아의 국교는 정교회였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조선의 러시아 지배가 조선의 근대화와 개신교 선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일본은 서구 문화를 충실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새로 제정된 헌법은 정교의 분리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조선이 어쩔 수 없이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면 러시아보다는 일본이 낫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러?일전쟁을 앞둔 선교사들의 분위기였다. 하지만 러·일전쟁이 끝난 뒤 일본이 한국을 무자비하게 통치하는 것을 본 선교사들은 과연 일본이 조선을 진정으로 근대국가로 만들어줄 것인지에 대해 의심하게 되었다.
/박명수<서울신대 신학대학원장>

천주교,정교회,그리고 개신교

20세기초 한국에는 세 가지 형태의 기독교가 있었다. 하나는 천주교요 다른 하나는 러시아정교회이며 마지막은 개신교였다. 이들이 조선 정부를 대하는 태도는 매우 달랐다.
한국의 천주교는 프랑스 외방선교회의 관할 아래 있었으며 프랑스 정부는 자신들의 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천주교 신부들을 적극 활용하였다. 1886년 한?프랑스 조약 체결 이후 천주교 신부들은 일종의 프랑스 정부의 외교관과 같이 행세했다. 기세등등한 신부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영역을 넘어서서 백성들의 정치적 문제에까지 간여하였다. 그들은 한국 관리를 무시하고 스스로 권력집단이 되어가고 있었다.
러시아정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에서 러시아의 세력이 상당한 힘을 갖고 있을 당시 정길당이라는 여인이 정교회 신자가 되어 조선에 들어와 러시아 황제의 칙명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총과 창으로 무장하여 사람들을 괴롭혔다. 이것을 본 동학의 패잔병들이 정교회에 가입하여 함께 소란을 피웠다. 이것은 정교회가 어떻게 정치집단화됐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초, 러시아는 만주와 한국을 지배해서 극동에서 자국의 지배권을 분명하게 하려고 했다. 그리고 한국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협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러시아가 손을 내민 나라가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한국에 대해서 특별한 정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 다만 러시아를 도울 경우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를 기대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신교는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무엇보다도 개신교 선교사들은 정부의 합법적인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고 믿었다. 조선의 법은 지켜져야 하며 때로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기독교인은 폭력적인 시위를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십자가를 지는 것이 낫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복음 자체가 부패한 사회를 변화시킬 혁명적인 힘을 갖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독립심을 갖게 되고 도덕적인 감각이 발달되며 잘못된 것에 대한 저항정신이 고양되어 결국 한국 사회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복음적인 혁명은 피를 흘리지 않고 이루어지는 혁명이어야 한다.
/박명수<서울신대 신학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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