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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눈물 .....

요한복음 이정원 목사............... 조회 수 2591 추천 수 0 2010.10.20 19: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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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1:28-37 
설교자 : 이정원 목사 
참고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2007·08·26

 당신은 자주 우는 편입니까? 아마도 여자분들 중에는 잘 우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좀처럼 잘 울지 않습니다. 옛날부터 남자는 울어서는 안 된다고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일생에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태어날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그리고 나라를 잃었을 때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남자들은 잘 울지 않습니다. 남자가 우는 것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걸핏 하면 우는 것도 그렇지만,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도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믿음 좋은 성도라면 은혜에 감격하여, 또는 연약한 형제를 동정하여 간혹 울게 되지 않을까요?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우셨던 모습을 세 번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본문에 나오는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입니다. 또 한 번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해서 함락될 것을 예견하시고, 고통당할 백성들을 안타까워하시며 우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며 우셨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고자 하시는 결연한 자세와 인간적인 고뇌를 안고 울부짖으며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흘리신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마르다와 마리아의 불신앙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셨던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동네에 도착하셨을 때는 죽은 나사로를 장사지낸 지 나흘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으러 와서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계셨더라면 병든 나사로를 고치셨을 것이기 때문에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오빠가 죽어버렸기 때문에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하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마지막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놀랍고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 그러자 마르다는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절) 그런데 다음 장면을 보면 그렇게 대답한 마르다가 실제로는 전혀 믿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전했습니다.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28절)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하나도 전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마르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정말 믿었다면 동생 마리아에게 이렇게 전해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빠가 다시 살 것이라고 하셨어. 그러니 이제 눈물을 거두고 어서 예수님께로 가자.”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말씀을 한 마디도 동생 마리아에게 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그 말씀을 진정으로 믿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말을 듣고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 예수님을 맞으러 갔습니다.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29-30절)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마르다가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32절)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하신 놀라우신 말씀도 이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사로가 다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놀랍고 엄청난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동생 마리아에게 그 말씀을 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예수님께 와서 언니 마르다와 똑같이 말했던 것입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우는 사람들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께로 급히 달려갈 때, 문상하러 왔던 유대인들은 마리아가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 알고 그녀를 따라나섰습니다.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31절)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많은 유대인들이 문상하러 왔습니다. 유대인들은 상을 당한 집에 와서 유족들과 함께 우는 풍습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급히 달려갈 때 문상하러 왔던 유대인들은 그녀가 나사로의 무덤에 가는 줄 알고 따라갔습니다. 무덤에 가서 함께 울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유대인들이 마리아가 무덤에 가는 줄 알고 따라옴으로써,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는 놀라운 이적을 함께 보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께서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울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 앞에서 이렇게 통곡하자 함께 따라온 유대인들 역시 그 자리에서 함께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계시던 곳은 삽시간에 통곡하는 소리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 앞에서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던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신 주님
  

이들의 모습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안타깝고 비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33-35절)
  유대인들은 우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그 중에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36-37절) 유대인들 중 일부는 예수님께서 우시는 것을 보고 “나사로를 정말 사랑하셨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나사로를 죽지 않게 좀 할 일이지, 왜 이제 와서야 그렇게 우느냐고 빈정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우신 것은 유대인들이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고 따라서 울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은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격한 감정을 느끼시면서 우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우셨을까요? 33절에 보면 우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우셨습니다. ‘통분히 여기셨다’는 말은 분이 나서 씩씩거린다는 뜻입니다. 통분히 여기셨다는 말은 38절에도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죽음을 가져온 죄를 향해 거룩한 분노를 발하셨던 것입니다. ‘민망히 여기셨다’는 말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죽음의 슬픔과 절망 속에서 고통 받는 인간의 처지로 내려오셔서 그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맛보시는 심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를 죽음에 빼앗긴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을 그대로 느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격하게 우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우시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불쌍히 여기시는지를 실감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흘리신 눈물은 죽음 앞에서 절망한 패배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우리의 슬픔과 고통에 공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슬픔과 절망에 빠지게 한 사탄과 죄에 대해서 분노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탄과 죄를 멸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정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과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이제 그분을 믿는 우리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 받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믿는 자에게 죽음은 잠자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담대하고 확신있게 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자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5-58)

믿는 자는 달라야 한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놀라우신 말씀을 듣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여전히 슬픔과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주위의 사람들도 그녀들과 함께 슬퍼하며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불신앙의 결과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통곡한다 해도, 주님의 말씀을 들은 마르다는 달라야 했습니다.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고, 마리아는 언니와 함께 소망을 가지고 기뻐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저는 예수님의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정에 전적으로 공감을 느낍니다. 믿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과는 좀 달라야 합니다. 말씀을 들은 자는 다른 사람들과는 뭔가 다른 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가장 답답하고 안타까운 것은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믿음이 좋은 것 같던 성도가 어려움을 만났을 때 전혀 믿음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어떤 성도는 소위 ‘길일’을 잡는답시고 주일에 결혼식 날짜를 잡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살아가는 성도라면 안 믿는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음 좋은 성도가 집안의 대소사 때문에 주일을 자주 빠지게 된다면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안 믿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 믿는 이웃들에게 신앙을 인정받고 배려 받는 것 역시 필요합니다. 최대한 협조하되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는 성도가 되도록 하십시오. 무조건 대립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한정 끌려가는 것 역시 성도답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안 믿는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신앙을 지킨다는 점에서 안 믿는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흔들림 없이 이겨나간다는 점에서 안 믿는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생활 속에서 의롭고 선한 행실을 나타냄으로써 안 믿는 사람들과 확실히 구별되어 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말씀을 굳게 붙들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을 가리키셔 거룩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거룩한 백성, 즉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안 믿는 사람들과 확실히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눈물 흘리신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들의 슬픔과 절망을 공감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러한 고통과 절망을 가져온 죄와 사탄의 세력에 대하여 통분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고 우리를 위로하시고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또 우리에게 죽음과 절망을 가져다 준 사탄의 세력을 멸하시고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참된 위로와 도우시는 은혜를 힘입을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 앞에서 죽음을 이기고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알 수 없습니다.
  눈물을 흘리신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주님께서 안타깝게 여기셨던 우리의 믿음 없는 모습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따르는 자들에게 날마다 말씀을 가르치시고 놀라운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토록 말씀을 가르치시고 이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늘 믿음 없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도 전혀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믿음 없는 사람들을 여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들이 믿음에 굳게 서게 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이 마음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목사로서 저는 믿음 없는 성도들을 볼 때 많이 실망하고 때로는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가르치고 기도해주었건만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인가?’ 그런데 주님께서는 믿음 없는 사람들을 깊이 동정하시고 우셨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할 때 실망하고 화를 낸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이제는 주님처럼 해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우리는 대개 믿음 없는 형제의 모습을 볼 때 실망하고 속상해 합니다. 때로는 꾸짖기도 하고 비난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연약한 성도는 더 상처를 받고 시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잘못되고 부끄러운가를 알아야겠습니다. 이제 연약한 형제를 나무라거나 비난하지 맙시다. 형제가 더욱 견고하고 아름답게 자라가도록 사랑과 인내로 돌보도록 합시다. 우리도 형제의 연약함을 공감하면서 그를 위해 눈물 흘릴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으로 연약한 형제를 품어주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연약한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슬픔과 고통을 친히 가슴 깊이 느끼시면서 우셨습니다. 우리를 죽음과 슬픔과 고통과 절망으로 몰아넣은 사탄과 죄에 대해서 분노하시면서 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우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이 연약함과 고통과 절망과 죄와 죽음 가운데서 건져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셔서 사망권세를 정복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입증해보이셨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문제와 죄와 죽음까지 해결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의 마음을 본받으며, 주님의 도우시는 은혜를 힘입어 믿음을 지키며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이 여기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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