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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3: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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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이한규 http://john316.or.kr |
요한복음(77) 끝까지 사랑하십시오 (요 13:1-11)
< 끝까지 사랑하십시오 >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세족식을 행하셨습니다. 그 장면에 대해 본문 1절은 이렇게 언급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이 얼마나 감격적입니까? 사랑은 끝까지 사랑해야 진짜 사랑입니다. 사랑의 첫째 정의는 ‘오래 참는 것’입니다. 인생은 가도 예술은 남습니다. 그러나 예술은 가도 사랑은 남습니다. 영향력은 변하지 않는 사랑만큼 커집니다. 시작이 반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처럼 시작이 중요하지만 마지막도 중요합니다. 시작이 잘못 되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고, 시작과 과정이 좋아도 마지막이 나쁘면 허무한 것입니다.
요새 교회 세습으로 말이 많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교회 세습은 자신이 했던 과거의 설교를 전면 부인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이 이렇게 설교했겠습니까? “여러분! 성도의 가치관을 가지십시오! 십자가를 지고 헌신하십시오! 돈과 주님을 겸하여 섬기지 못합니다! 욕심을 버리십시오!”
그 설교를 들으며 성도들은 힘써 자기 것을 드렸는데 목회자가 그 교회를 자기 것처럼 생각하고 무리하게 아들에게 물려주면 그 동안 “바치라!”고 했던 것이 결과적으로 “자기에게 바치라!”는 말이 된 것입니다. 그 문제로 교회생활에 회의를 가진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떠날 때 잘 떠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떠날 때도 초심(初心)과 사랑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사랑에는 변질이나 포기가 없어야 합니다.
유대 우화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천사들을 모아 인간 창조의 의사를 전했습니다. 그때 ‘의의 천사’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온갖 불의를 저지를 겁니다.” 그 말에 ‘성결의 천사’가 맞장구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을 창조하면 그들은 세상을 더럽힐 겁니다.” 그러자 ‘빛의 천사’도 똑같이 말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어둡게 만들 겁니다.”
그런 비판과 부정의 말이 난무할 때 긍휼의 천사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인간 때문에 세상이 불의해지고, 더러워지고, 어두워져도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주면 그들은 더 하나님 품으로 인도될 겁니다.” 결국 긍휼의 천사의 말을 듣고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했다고 합니다. 사람을 대하다 보면 실망할 부분이 많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에 대해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런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십시오.
< 겸손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는 모습을 가지고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5절). 지극히 높은 하나님이 지극히 낮은 사람의 발을 씻겨주는 장면은 겸손의 중요성을 도전합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위대한 일에서도 위대했고 지극히 작은 일에서도 위대했습니다. 남의 발을 씻는 것은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수치스런 일이지만 불신앙이 수치를 발견하는 곳에서 신앙은 영광을 발견하고 교만이 수치를 느끼는 곳에서 겸손은 영광을 느낍니다.
어느 날, 성 프랜시스의 제자들이 스승의 겸손한 모습을 보고 물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선생님처럼 겸손할 수 있을까요?” 프랜시스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을 한번만 진실로 쳐다보게. 그러면 결코 교만할 수 없네.” 주님을 한번만이라도 진실하게 쳐다보고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자신을 교만하게 만들 수 요소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진실하게 쳐다보고 따르면 점점 겸손해집니다.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부족함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겠습니까? 성도들조차 조금만 잘 나가면 난 체하고, 젠체하고, 음흉하고, 속이기 잘하고, 변덕스럽고, 이기적이고, 잘 삐치고, 잘 용서하지 못하는 모습이 아직도 많습니다. 결국 엄밀하게 말하면 거의 대부분의 성도가 다 나이롱 신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마땅하지요.”라고 해야 합니다.
진짜 성자들은 자신을 '나이롱 신자'로 생각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성자 중에 자신을 “성자답다!”고 생각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 자신을 나이롱 신자로 생각했기에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존재로 알았고, 그런 겸손한 믿음으로 어떤 어려움 속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그 어려움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있음을 믿었기에 성자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이 시간이 주님을 진실하게 쳐다보고 자신을 살펴봄으로 앞선 성자의 길의 발자취를 따라가지 않겠습니까?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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