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민27:1-4 |
---|---|
설교자 : | 최만자 자매 |
참고 : | 새길교회 |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인생은 미완성, 역사도 미완성, 그래도 희망을 가지며
(민수기 27:1-4, 36:1-3, 8)
2011년 2월 6일 주일예배 말씀증거
최만자 자매
구정은 한 번 더 새해를 맞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늘 두 번의 새해 인사를 오가게 하지요. 설날을 맞아 새길 자매형제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하느님이 내리시는 만복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새로운 시작의 의미를 가지는 때에 저는 성서말씀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이제 새로운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있었던 한 이야기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출애굽에 관한 이야기나 그들의 광야생활에 대한 이야기들은 많이 알고 있고 또 여호수아의 지도아래 가나안을 점령하는 이야기는 많이 이야기 되고 있지만 가나안 입성 바로 이전의 일들은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의 성서본문은 바로 그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l는 어느 집단이나 조직이 새로운 공동체적 질서로 향할 때 겪게 되는 과정들을 보여주어 오늘 우리의 현실에도 조명할 필요가 있으며 의미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드디어 하나님이 약속한 땅 가나안에 가까이 이르러 정말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려는 바로 그 시작점에 일어난 여성들과 관련된 이야기로 살피고자 합니다. 이 시기는 출애굽과 광야생활의 위대한 영도자 모세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젊은 새 지도력으로 지도력이 교체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위해 광범위한 분야에서의 삶의 방식을 고민하고 여러 가지 삶의 규정들을 새롭게 설정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출애굽 과정동안의 여러 가지 오류들을 틀어내고 새 땅에서 새롭게 참된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함께 설정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설화가 출애굽에 초점이 있다면 여호수아 설화는 이스라엘 부족 동맹사회의 질서구축이라는 관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사는데 있어 이스라엘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파라오의 억압에서 경험한 그 전제 군주제적 국가가 아닌 평등한 관계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평등한 부족 동맹체의 이상은 정치적 지도력에 있어서도 그러했고 경제적 삶의 형태에 있어서도 평등의 이상을 추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경제적 평등의 이상은 광야생활에서 모두가 똑같이 하느님이 내려주신 하루 먹을 만큼만의 만나를 거두는 생황을 통해 훈련되기도 했습니다. 정치적 지도력의 평등을 추구한 이상은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 약 이백년 동안을 왕권 군주제가 아닌 판관의 지도력 구조로 지낸 역사에서 드러나기도 합니다. 아무튼 민수기는 이 시점에 일어난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높이 가졌던 정치 경제적 평등의 이상을 실현하는 일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음을 성서 기록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광야생활 후기에 이르러서는 평등사회 이상의 선봉자인 모세의 지도력이 독점적이라는 반발이 커 가데스란 지역에서는 반란사건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또한 여호수아가 모세를 승계하면서 지파 공동체를 새로이 구성하는 과정에서도 부족 지도력들의 극심한 재편의 과정의 흔적을 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부족 동맹사회의 새질서 구축이라는 막중한 과제를 이끌어 가는 과정은 다양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발생시킨 것이 사실입니다. 모세로 상징되는 탈주와 여호수아로 상징되는 재질서화는 서로 쌍을 이루는 연속적 요소이지만, 그 사이에는 무수한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탈주에서 재질서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는 제거되고 누군가는 권력이 강화되는 역사가 반영됐다고 추정됩니다.
그런데 평등한 삶의 운영을 위한 주된 내용 가운데 하나가 바로 토지분배였습니다. 이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토지를 분배 받았다는 오경의 맥락 속에 위치하지요. 오늘 본문의 슬로보핫 딸들의 이야기는 그 탈주에서 재질서화로 가는 이행 과정에서 땅의 분배에 있어 여성의 권리에 대한 요구의 제기였습니다. 이는 당시에 남성 지도력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새 질서의 요구였습니다. 그것은 새로이 전개되는 세상에서 성적 평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의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매우 골치 아픈 문제였습니다. 사실 광야의 여정에서 모세와 함께 출애굽 사건의 지도력을 폈던 미리암의 역할을 두고 여성의 정치 지도력을 어떤 위치에서 인정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였던 흔적들이 많았으며, 새로운 부족 동맹체의 질서에서 그것은 하나의 과제로 인정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슬로보핫의 딸들 이야기는 바로 경제적 질서에서의 성적 평등의 문제가 제기되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딸들의 주장에 대항하여 남성 중심적 가부장적 질서를 강하게 유지하려고 하는 가부장제의 우두머리들의 반대운동이 일어났고 그러한 대결의 과정을 거쳐 양측이 타협점을 찾아 해결하게 되는 과정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로 이 토지분배의 과정에서 일어난 일인데 이 내용을 김진호선생(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은 남녀 대결적 상황으로 해석하는 관점을 시사하였습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민수기 27장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가는 도중 요르단 강가 모압 광야에서 인구조사를 하며 지파에 따라 유산을 분배하는 장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민수 26:51-56). 광야는 미래의 약속성취를 향해가는 과정이었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형성할 공동체적 삶의 모든 규정들을 준비하는 과정을 가지는 시간과 공간이었습니다.
경제적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토지분배는 당시의 사회조직체인 2-3세대의 공동체인 기본 가족단위인 ‘아비의 집’, 그리고 그것이 확장된 ‘가문/문중’의 조직, 그 결합들의 ‘지파와 부족’ 그리고 이들이 결합된 ‘지파동맹’으로 단위가 형성되었습니다. 지파동맹의 지배적 사상은 평등주의 이념에 있었고 그 관철 단위가 가문/문중이었습니다. 이런 단위에 의해 토지분배가 이루어 졌는데 요셉의 후손, 므낫세 지파의 헤벨 갈래에서 한 가부장인 슬로브핫이 아들이 없이 죽어 토지분배에서 제외 되었는데 그에게는 다섯 딸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철저하게 남성의 보호 아래 있어야만 생존의 위협을 피할 수 있는 문화 안에서 보호해 줄 남성을 상실하는 것은 바로 생존의 위협을 의미했지요. 그래서 성서는 지속적으로 고아와 과부, 이방 나그네를 돌보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음을 봅니다. 이제 이 다섯 딸들은 생존 위협을 받는 처지가 되었는데, 그러나 이 생존의 위기 앞에서 이들은 자신들에게 불행을 주는 제도와 관습에 굴복하지 않고 담대히 자신들의 미래를 방해하는 문화적 요인들에 맞서 나섰습니다. 이 다섯 딸들이 모세를 찾아와 문제 제기를 하였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하느님의 선언이 전체 공동체를 배려하는 의미는 가지지만, 자신들에게는 매우 부당하다는 주장입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죽음이 반역사건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이름이 아들이 없다고 해서 문중에서 사라지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관습은 반역자에겐 상속의 책임이 없었고, 한 가문이 상속자가 없어 몰락의 위기에 있을 경우는 문중이 그 책임을 져야하였습니다. 아마도 슬로브핫 가문의 남성 족장 우두머리들은 이런 책임을 지기 싫었고 가문의 재산도 다른 곳으로 빼앗기기 싦어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슬로브핫을 반역자로 몰았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딸들은 그 지목의 부당함을 모세에게 항변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떤 불의에 도전 할 때 항상 하느님의 뜻에 기초하여 그 반대되는 불의를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 슬로브핫의 딸들의 도전은 모세를 통하여 내려진 하느님의 말씀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모세는 이러한 여성들의 도전을 받고 야훼께 이 문제를 여쭈었고 하느님은 ‘슬로브핫’의 딸들의 하는 말이 옳다‘는 응답을 내리셨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딸들은 유산을 상속 받을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런 판례가 일반화 되어 이후에는 아들이 없을 때는 딸들이 항상 다른 남자친척들 보다 우선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7:8-11) 당시의 상속법은 아버지에서 아들로, 아들이 없을 경우는 형제에게, 형제가 없으면 삼촌, 삼촌이 없으면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에게로 가는 지극히 남자 중심으로 되어있었지요.
여기까지의 이야기에서 함께 생각을 나눌 내용들이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위대한 점을 보게 되는 것 같아요. 그 하나는 이 딸들의 위대함입니다. 물론 이점은 나중에도 반복될 수 있겠지만 우선, 이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부당한 대우, 부당한 처지에 대해서 순응하거나 침묵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부당함을 바로잡기 위한 도전을 용감하게 감행한 것입니다. 당시 사회를 상상해 보면, 얼마나 남성중심적 가부장제의 횡포가 여성에게 심각하였던 가를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요즈음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성을 돌로 쳐 죽이는 이슬람권의 폭행 살해에 대한 국제적 비난이 쏟아지는데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남성중심적 권력이나 폭행의 위협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무튼 이처럼 강력한 남성중심 권력 사회에서 여성들이 가부장제 질서를 흔드는 재산권을 주장하고 당시의 최고 권위인 모세에게 도전한 것은 보통의 용기와 결단이 아니었습니다. 부당함에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는 정의의 가치, 혹은 생존의 위협아래 사생결단적인 것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들의 도전의 대단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이야기에서 찾게 되는 위대한 관점은 성서 하나님의 자기 뜻 수정과 딸들이 옳고 내가 틀렸다는 솔직한 인정입니다. 이는 성서의 하느님이 자신의 권위, 절대성, 이런 것들을 벗어 던지고 약자요 여성의 편이 되어 주저 없이 저들의 대변자가 되며 저들을 위한 결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서의 매력이 이런 본문들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도 이렇게 자기 수정을 하는데 우리가 자신의 신앙적 신념 혹은 교리를 절대화하여 다른 생각을 수용 못한다는 것은 참 어리석고 가소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서의 하느님이 모세나 가부장제 우두머리들의 권력자 편이 아니라 약자와 여성들의 편이 되고 있다는 이 장면을 읽을 때 통쾌함, 상쾌함을 느낍니다. 하느님이 참 멋쟁이요 열린 하느님 이라는 생각이지요, 여기서의 모세도 손뼉을 쳐 주고 싶은 기쁨 같은 것이 생기지요. 이 해결은 물론 아들이 없는 경우라는 한정을 갖고 남성중심적 제도권 안에서 늘 예외적인 경우에만 여성권리가 보장된다는 한계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남성 계승의 상속원칙이 확고한 사회에서 그 관습과 규정을 넘어서는 새로운 판례를 이끌어 내었다는 점에서 다섯 딸들의 위대한 승리라고 말하게 됩니다. 27장에는 이같이 우리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새 힘을 주는 인생과 역사가 이제 완성되는 듯 한 벅찬 기쁨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들의 새로운 삶의 자리가 무난히 실행되기에는 가부장제적 세력의 반대가 너무 거세었습니다. 반대 세력은 가부장제 구조의 우두머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성들이 경제권을 갖는 것에 위기를 느끼고 가부장제 사회의 질서가 흔들리게 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이 가부장제 전통을 고수하려는 세력들은 어떻게든 딸들의 주장을 막고자 했지요.
이 가부장제 남성 권력들이 다섯 딸들의 주장을 반대하기 위해 내세운 근거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 하나는 27장 본문에 나타난데로 곧 아비가 고라의 반역과 관련되었다는 것, 그래서 상속의 보전을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딸들에게 상속하면 그들이 다른 지파로 시집가게 되면 자기 지파의 재산이 흘러 나가기 때문에 딸들에게 상속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몰락 가문의 문제에 대해 문중 책임제 같은 이스라엘의 관습은 절대 가난으로 떨어지는 자가 없게 하고 죽은 형제에게 상속자를 제공하기 위한 하나의 사회 안전망 같은 개념이 되겠습니다(시형제 결혼제도도 이 맥락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런 원리가 잘 지켜지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오히려 형제나 친척이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복속시키려고 편법을 사용했을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슬로브핫의 딸들은 그런 현실을 보면서 자신들의 상속권을 더 확고히 요구 했을지 모르겠고 모세 또한 그래서 저들의 주장을 수용하였던 것으로도 생각됩니다.
민수기 36장은 이들의 사건을 우울한 결말로 이끌어 감으로써 성서 안에 계속되는 가부장적 사고와의 충돌을 보여주면서 그 딸들은 다른 지파 남성들과는 결혼 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제한 받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여성들은 그들이 획득한 소유를 제한 당하는 문화적 구속에 다시 갇히게 되지요. 36장의 관심은 남성소유권이 확립된 농업경제 문화 속에서 드러난 경제적인 이익문제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여성을 제한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서에 나타난 모든 사건의 결정은 야훼께서 내리시지만 그것은 공동체의 남성우위적 양상들에 의해 여성들은 결국 문화적으로 구속당하고 곧 바로 이상이 실현 될 듯 하던 상황은 사라지고 저만치 그 이상은 멀어지고 힘겹고 고통스러운 통제, 지배, 구속의 가부장제적 남성위주 권력의 사회가 힘을 가지는 현실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논쟁은 결국 양자 타협을 이끌어낸 것으로 딸들은 상속은 받지만 그들이 속한 지파의 남자에게만 시집 갈 수 있다는 제한에 갇힙니다. 여기에는 그야말로 전통을 고수하는 지배층의 이해가 얽혀 나타나고 있습니다.
형식상. 이 타협은 문중의 재산도 보전하는 동시에 아비의 집 재산도 보전하는 묘안으로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여성들은 자유를 구속당하는 삶을 살게 되면서도 상속권이나 소유권에서는 아무 권리가 없는 빈껍데기 상속인이 되었습니다. 시집가면 남편에게 재산이 소속되고 말지요.
여성신학자들은 이런 귀결에 만족하지 못하며 그래서 그 딸들에 대해서도 비판적 분석을 합니다. 그들이 여성들의 경제권을 찾으려 한 것이 목표도 아니었고 아버지의 이름을 문중에 남기려 한 행동이라고 봅니다. 또한 이 이야기가 경전에 남겨지지 않은 것은 가난으로 몰락하게 되는 여인들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 상속자 낳지 못한 불행한 남자들을 위로하는 이야기로 보존됬다고 지적하고 남자들의 이름이 씨족에서 제외 될 수 없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7장과 36장의 차이를 볼 필요가 있어요. 36장엔 청중이 남자들뿐이고 조상 가문의 우두머리들뿐이며 그리고 모세가 하나님과 상의도 없고 자신이 직접 선포하고 있어 하느님이 모세에게 명한 말이라기보다는 모세의 말을 화자가 보고하고 있는 장면이 됩니다. 남자들 판에서(권력자들 판에서) 여성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간접으로만 표현되고 있고 36장에서는 중심이 아버지의 이름 보다는 땅과 권리에로 초점이 옮겨져 있지요.
여성신학자들의 비판적 분석은 여성시각에서 본문을 제대로 해석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7장에서 그들의 생존권 때문이거나 혹은 아비의 이름을 남기기 위함이거나 간에 여성들의 경제권을 살려내는 대단한 사건을 만들었고 거대한 권력 앞에도 부당함을 지적하고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정의로움과 당당함을 두루 지녔던 이 여성들의 행동은 의미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실제로 이 딸들에 대한 평가는 미드라쉬에서 이들의 믿음이 좋았다는 칭찬과 담대하다, 용기있다는 칭찬을 받고 있지요. 그리고 사마리아 오스트리카에는 노아, 호글라 두 딸의 이름이 종족이름으로 나와있고 북왕국 초기의 수도가 디르사로 또 한 딸의 이름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들이 각기 일족을 형성했던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철통같은 남성 중심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릴 근거를 마련하였고 종교적 최고 권위 사회적 최고 권위에 도전한 용기와 새로운 질서의 실천자로서의 모습은 역사 안에 오래도록 남을 이상입니다. 하나님의 결정에 도전한 것, 전통을 답습 않고 그 부당함에 도전한 것, 새 시대에 필요한 새질서를 통찰할 줄 알았고 새 질서를 추구한 것, 새 문제를 제기한 것 등 등 이들에 대한 평가는 결코 폄하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27장의 그 상쾌한 도전이 36장의 우울한 결말로 끝나는 이야기의 슬픈 마감에 대해 다시 생각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로운 도전, 부당함에 대해 정당함을 내세우는 도전을 막으려는 거대한 가부장제적 세력을 어떻게 나의 삶의 자리에서 그리고 역사의 진행에서 거부하고 저항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지요. 이 세력들에 의해 우리의 인생은 미완이 되고 역사도 미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가부장제적 권력, 세력의 횡포는 인간 실존 안에서 끊임없이 당면해야 하는 우리의 실존의 한 측면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점에서 인생은 미완성, 역사도 미완성이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이진관의 노래 ‘인생은 미완성’을 떠 올립니다.
인생은 미완성 쓰다가 마는 편지
그래도 우리는 곱게 써가야 해
사랑은 미완성 부르다 멎는 노래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불러야해
사람아- 사람아- 우린 모두 타향인 걸
외로운 가슴끼리 사슴처럼 기대고 살자
인생은 미완성 그리다 마는 그림
그래도 우리는 아름답게 그려야 해
친구야- 친구야- 우린 모두 나그넨 걸
그리운 가슴끼리 모닥불을 지피고 살자
인생은 미완성 새기다 만 조각
그래도 우리는 곱게 새겨야 해
성서는 결국 여성들의 평등한 위치를 확보해 주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그래도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삶에서 부당함에 도전하는 삶의 성찰을 촉구하게 해 줍니다. 이 이야기는 비록 제한된 결말, 우울한 결말을 보이지만 정당한 도전과 부당한 세력들 사이에서 힘들게 살아야하는 우리의 실존적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게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부당함에 부대끼면서도 그것을 넘어선 진리와 아름다움, 정의로운 삶을 향해 부단히 노력하는 곳에 하느님의 편드심과 하느님의 열린 손길이 함께 해 주신다는 희망을 한편 갖게 합니다.
파도의 물결처럼 인생 완성과 미완성의 굴곡을 바라보며 오늘도 부당함에 도전하는 정의로운 가치의 선택에 결코 낙심하지 않는 삶으로 사는 것이 성서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는 길이 아닐까요?
새길 공동체도 새로운 세대, 새로운 역사의 시간대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시점에 슬로브핫 딸들 이야기, 새로운 도전과 가부장적 거대세력간의 대결 이야기를 깊이 음미 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새길의 공동체적 삶의 새길을 다시 열기 위해, 새길의 미완성의 역사를 새로이 진행해 나가기 위해 이 이야기를 다시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