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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연약함을 아시는 예수님

마가복음 김필곤 목사............... 조회 수 3429 추천 수 0 2011.03.15 23:2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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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4:27-31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는 예수님
막14:27-31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엔도우 슈사꾸가 일본에 들어온 천주교가 심한 박해를 당할 때 많은 신앙인들이 순교를 당했는데, 그 역사적인 사실을 주제로 해서 쓴 책입니다. 박해자들은 바닷물이 빠졌을 때 바다에 십자가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을 그곳에 묶어 놓습니다. 물이 들어오면 물에 잠겨 서서히 죽게 한 것입니다. 이 때 그들은 예수님을 배반하면 살려준다고 합니다. 그저 예수를 구주로 믿지 않는다고 한 마디만 하면 살아 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 성도님들이 이런 처지에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때 믿음 좋은 신자들은 기쁨으로 천국을 바라보며 순교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복음이 증거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하였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신앙의 열정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기독교가 국교가 아니지만 제헌 국회를 열면서 이윤영 목사님의 기도로 시작하였습니다. 1910년 벌써 조선의 신자는 22만 6,000명으로, 중국(20만 7,000명), 일본(8만 7,000명) 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 평양에서 주일예배에 모이는 인구는 1만 4,000명 쯤 되었다고 합니다. 시내 인구의 3분의 1입니다. 얼마나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믿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순교도 많이 당하였습니다. 한 가지 소개하자면 6.25 때(1950년 9월 27일) 충남 논산 병촌리 뒷산에서는 66명이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공산당이 들어와 "야, 간나 에미나이 새끼들 예수쟁이 버리라우. 살려줄테니"라고 협박하였습니다. 당시 서른 한 살인 정수일 집사님은 시부모, 시동생, 아들, 딸, 조카 등 일가족 10명과 함께 빙 둘러앉아 간절히 기도하였답니다. 그러자 공산당들은 몽둥이와 삽, 괭이 등 농기구를 들고 떼지어 달려들어 이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다고 합니다. 이튼날까지 병촌교회 교인들은 남자 27명, 여자 39명이 순교당했다고 합니다. 당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이 교회 김주옥 장로님은 이날 어머니, 부인, 아들, 딸, 조카 등 7명이 순교를 당했지만 살인자들을 용서하고 교회를 다시 건립하고 전도와 봉사, 헌신으로 여생을 살았습니다. 만약 이런 상황이 다시 닥쳐온다면 우리 성도님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순교할 수 있다고 해도 만약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으면 자녀를 죽인다고 하면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순교할 수 있겠습니까?
공산당이 들어 와서 우리 앞에서 우리의 자녀를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잡아 땅에 묻습니다. 그리고 얼굴만 내 놓습니다. 주변으로 말을 돌립니다. 점점 땅은 다져져 아들은 숨을 헐떡이며 죽어갑니다. 이 때 만약 “네가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사실을 부인하면 네 아들을 살려주고 그렇지 않고 예수를 계속 구세주라고 믿는다면 네 아들을 죽일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셋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며 순교를 당하는 길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그 후 신앙에서 떠나 사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당시의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예수님을 부인하지만 다시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와 더 열심히 주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은 지금 신앙으로 어떤 입장을 취할 것 같습니까? 베드로는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요? 십자가에 달리시기 하루 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달리면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릴 것이다.” 그 때 베드로가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습니다.” 호언장담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합니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 때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확신에 찬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통하여 받은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신 예수님 의지하길 원하십니다(27-28).
예수님은 베드로의 연약함을 다 아셨습니다. 3년 동안 특수 수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제자들도 위기 앞에서 주님을 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제자 중에서도 수제자로 훈련시킨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신임하여 재정부장을 맡긴 유다도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왜 나는 이렇게 예수 믿고 사는데 실패하고 연약하가라며 한탄하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연약함도 주님이 아십니다. 인간은 참으로 연약합니다. 다 볼 것 같지만 너무 커도 보지 못하고 너무 작아도 듣지 못합니다. 다 들을 것같지만 큰소리도 작은 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모든 냄새를 맡을 것 같지만 조금만 냄새를 맡고 있으면 코는 감각을 상실합니다. 잠자다 뇌의 핏줄 하나 터지면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인간의 지식, 의지, 결심 대단한 것 같지만 막상 극단적인 상황에 오면 얼마나 형편없는가를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억력이 대단한 것 같지만 시간 지나면 형편없게 되지 않습니까?
어릴 때 기억력이 좋기로 소문난 사람이 어느 젊은이의 고백입니다. 큰 아버지 회갑잔치에 갔답니다. 그런데 육순이라는 말이 생각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갑잔치 축하합니다.”했다가 망신을 당했다고 합니다. 가게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살려고 하는데 "설레임"이 생각이 안나서 "아줌마 망설임 주세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은행에 통장 재발행하러 가서 “재발행”이라는 말이 생각이 않나 은행원에게 "이것 재개발하러 왔습니다."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다른 제자들과 달리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대단한 칭찬을 받았습니다. 잠시지만 바다 위로 걸어 보기도 했습니다. 변화산에서 모세가 엘리야를 만나는 신비한 체험도 해보았습니다. 자신의 장모가 치유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 수많은 기적을 실제적으로 본 사람입니다. 위기가 다가올 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킬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호언장담하는 것입니다. 자신 있게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유월절 만찬을 하시면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서로 하나씩 하나씩 “자기냐고 예수님께 물어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절대로 예수님을 팔아먹는 배은망덕한 제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정도까지 파괴된 인간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을 이미 팔아먹으려고 작정한 유다는 떠나 버렸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합니다. 유다는 나를 돈을 받고 팔지만 너희들 역시도 다 십자가의 위험 앞에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버린다는 말은 소극적으로 마지못해서가 아닙니다. 살기 위해 적극적으로 배척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로마인에게 있어서는 정치범으로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참람죄를 저지른 종교범으로 처형되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땅에 사는 것이 잠깐이라고 믿고 있고 영원한 천국이 있다고 믿고 있지만 인간이 이해타산 앞에 얼마나 인간은 연약합니다. 부담 앞에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한 치도 손해 보려하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다 버릴지라도 자신은 순교의 자리에 가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베드로 너도 별거 아니다. 다른 사람과 동일한 연약한 존재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도 실수할 수 있고, 나도 실패할 수 있고, 나도 거짓말 할 수 있고, 나도 사기칠 수 있고, 나도 예수님 부인할 수 있고, 나도 간음할 수 있고, 나도 살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순간 순간 우리의 내 무거운 죄 짐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렸다 부활하신 주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인 슥13:7을 인용합니다.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떠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삶의 한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셔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들은 결국 내 말 믿고 그곳으로 오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버리는 것도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해 주실까요? 왜 이렇게 앞으로 일어날 결론을 말씀해 주십니까?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면 말씀하신 대로 앞으로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갈 텐데 그것으로 실망하고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그 연약함, 그 죄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해결한 수 없는 문제를 대신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심으로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을 의지하고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다 도망갔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그 말씀을 기억하고 갈릴리로 갑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막16:7)” 그 부활하신 주님과 더불어 일평생 복음을 증거하며 순교의 자리에까지 가게 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한 번 꺼꾸러짐을 당했다고 그것으로 실망하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배신할 수 있습니다. 부인하고 저주까지 할 수 있습니다. 도망갈 수 있습니다. 유다는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을 회개하고 부활하신 주님 만나 다시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 한 번 실패하고 실수했다고 낙심하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잠24:16)”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보배를 품었음으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7-10)”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5)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9)”
간음하고 살인죄를 저지를 다윗도 다시 일어났습니다. 부모를 속이고 사기친 야곱도 쓰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약속을 믿지 못하고 첩을 둔 아브라함도 다시 일어났습니다. 살인죄를 지고 도망자 신세가 된 모세도 다시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실수한 것 회개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예수님은 우리가 비교의식으로 자신을 과신하는 것보다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로 능력을 얻으시길 원합니다(29).
베드로가 왜 이렇게 쉽게 무너졌습니까? 자기과신입니다. 교만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연약성을 지적하니까 베드로가 뭐라고 말합니까? 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과신입니다. 자기 과신은 신앙이 아닙니다. 단지 신념에 불과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합니다. 자신은 비교 우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그래도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아홉 명의 제자와 같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나 만은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나 많은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는 구별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만 깨끗한 척하는 것입니다. 자신 만은 잘난 척 하는 것입니다. 자신 만은 잘 믿는 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른 제자들은 순교의 현장에서 위기 앞에 도망갔지만 베드로는 도망가는 정도가 아니라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요한은 십자가 앞에 가서 유언을 들었지만 그는 고향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교만에 불과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2)”고 했습니다. 자기 과신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죄의 실제적 근거이며(사 2:6-22), 악한 자의 특징입니다(시 5:5, 잠 8:13). 교만은 자신을 우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바람 불면 누구나 다 추운 것입니다. 병들면 다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다 시험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죽음 앞에 부인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잘난 척 하다가 망가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조금 특별한 체험을 했다고 조금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자기 확신에 사로잡혔다가 넘어졌습니다. 교만한 말, 교만한 마음, 교만한 눈, 교만한 손 그것으로 영적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 속담처럼 '빈 깡통이 더욱 소리가 요란합니다', '모난 돌이 정 맞습니다', '튀는 물고기 도마에 먼저 오릅니다' ‘빈 수레는 요란합니다’. 바로(출5:2)가 교만으로 애굽의 장자들을 죽였습니다. 웃시야(대하26:16)가 교만으로 병들었습니다. 히스기야(대하32:25)가 교만으로 나라를 위기로 몰아갔습니다. 하만(에3:5)이, 느브갓네살(단4:30)이, 벨사살(단5:23)이, 헤롯이 그 좋은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 교만으로 쓰러졌습니다. 가문과 지위(마13:55), 재물(눅9:58), 존경(요1:46), 풍체(사53:2), 신앙 경륜, 평판(눅7:34), 학식(요7:15), 성공(사53:3), 능력(요5:30) 등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기업들의 전쟁"이라는 책에서는 힘있는 기업이 어느 날 힘을 잃는 이유는 "자기 만족(complacenct), 과신(confidence), 오만(conceit)"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잘 될 때 남보다 뛰어난 것이 있을 때 자기 것인 양 착각하며 자기 과신과 교만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신앙적 절개란 인간의 의지력이 아닌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 은혜에 의해 지켜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알았습니다. 나는 사도 중의 가장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나는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악 행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곤한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최초의 신앙 고백도 자신에게 나온 것이 아닙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버지라고 고백할 때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 16:17)”라고 했습니다. 신앙 고백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할 수 있도록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바다위를 걸은 것도 자신의 힘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바람을 볼 때 금방 물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으로 데려갔으니까 모세와 엘리야를 볼 수 있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택하여 쓰시기 때문에 베드로가 베드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떠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고 갔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호산나를 부릅니다. 나귀는 우쭐댔습니다. “나를 이렇게 환영하는 구나 내 인기가 이 정도라니 나는 대단한 존재야.” 수많은 군중이 종려나무를 길에 펴 놓습니다. “그래 내 앞 길에 이정도 친절은 베풀어야 하지, 감히 내가 누군데. 이 귀하신 몸이 어떻게 땅을 밟고 가겠는가?” 나귀는 우쭐 댑니다. 조금 가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엎드려 절을 합니다. “아 나는 인간보다 뛰어난 존재야, 저들을 봐라 내게 경배하지 않는가?” 나귀는 이렇게 착각합니다. 제 위에 계시는 예수님 때문에 그런 줄 모르고 우쭐댑니다. 예수님이 내리면 평범한 짐승에 불과한데, 예수님이 내리시면 마구간에 가야하는데 그것도 모르고 우쭐 댑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목숨, 소유, 권력, 지식, 명예, 건강, 아름다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거두어 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능력, 실력, 권력, 세력, 체력, 재력, 매력, 영력 등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실 때 그것이 힘이 되는 것입니다. "
그것들 다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조금 많다고 우월감에 우쭐 대고 조금 적다고 열등감에 비굴해질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셔야 순교의 현장에서 순교도 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사업에 성공할 수 있고 하나님이 은혜 주셔야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과신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3.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여 성령 충만함으로 승리하시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은 다 버린다 해도 자신 만큼은 버리지 않겠다는 베드로의 호언장담을 듣고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30절을 보십시오. 기뻐하며 칭찬하시지 않았습니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베드로가 언제 어떻게 예수님을 부인할 것인가를 말씀해 줍니다. 세 번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베드로의 부인은 실수나 과오가 아니라 철저한 배신임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자신의 연약함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살피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기 원합니다. 자기 확신 자기 신념에 사로잡힌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보다 자기 생각을 앞세웁니다.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합니다. 겸손은 말씀에 대한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예수님께 무릎 꿇고 예수님의 도움을 원해야 했을 것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저는 연약합니다. 저는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저는 너무 자신을 과신하는 교만에 사로잡혀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에서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까? 방법을 알려주세요.” 이렇게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31절을 보십시오. 힘있게 말합니다. 자신에 차 있습니다. 자기 확신 충만입니다. 신앙의 절개는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닌데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을 과도하게 신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경쟁이라도 하듯이 10명의 제자들도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서로 충성 경쟁을 합니다.
이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예수님은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잠자는 베드로를 보시고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38절을 보십시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합니다. 자신감에 사로잡혀 호언장담한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고 잠을 잡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호언장담이 아니라 깨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기도 없는 맹세를 합니다. 기도 없는 자신감, 기도 없는 확신, 기도 없는 헌신, 기도 없는 작정 오래 가지 못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호언장담한 베드로 어떻게 됩니까? 쉽게 무너져 버렸습니다. 시험에 들어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합니다. 말고의 귀를 베어 버립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이 물어 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 21:15)” 베드로는 비교하지 않습니다. 자기 확신이나 우월감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다시 물어 봅니다. 이제 이 사람들 보다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세 번 부인한 그에게 또다시 세 번째 물어 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기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합니다. 성령충만을 받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기도하여 성령 충만을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합니다.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킵니다. 복음을 전하여 하루에 3천명이 주님께 돌아오게 합니다. 룻다에서 중풍병자 애니아를 고칩니다. 욥바에서 죽은 다비다를 살립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자신감으로 자신의 우월감으로 자신의 비교의식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기적을 일으키는 기적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상상하지 못하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성령의 능력으로 담대해졌습니다. 죽음이 무섭지 않습니다. 실패가 무섭지 않습니다. 환난이 두렵지 않습니다. 세 번이나 감옥에 갇혔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위험 앞에 당당하게 말씀합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담대하게 예수님을 전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베드로서를 통해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 5:8)”
기도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 힘이 아니라 기도의 힘, 성령의 힘으로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쿠오바디스>를 보면, 베드로가 로마에서 도망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만년에 로마에 가서 전도할 때인데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을 극심하게 박해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베드로를 위하여 떠나기를 간청합니다. "선생님이 잡혀 돌아가시는 것은 저 짐승 같은 네로에게 승리의 기회를 주는 것이니 이곳을 떠나서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처음에 베드로는 이 요구를 거절하였으나 교인들의 간청이 너무 간절하므로 하는 수 없이 어느 날 새벽에 로마를 탈출하여 알반이라고 하는 언덕에 이르렀습니다. 그때에 찬란한 광채 속으로부터 홀연히 사람의 형상이 나타나서 보니 그리스도였습니다. 베드로는 곧 땅에 엎드려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를 부르며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Quovadis Domine)"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백성을 버리고 가니 나는 로마에 가서 다시 한 번 십자가에 죽겠노라." 베드로는 로마로 발길을 돌립니다. 주님의 양들을 찾아가 일하다가 로마 군사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는 "주님이 바로 달려 돌아가셨거든 내 어찌 주님과 같이 달리리오."하고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 당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자기 확신으로 살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여 성령 충만함으로 승리하여야 하겠습니다.

이 시대도 사탄을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하고 갖은 박해로 시험을 줍니다. 지금은 일제시대 때나 공산주의자들 앞에 목숨을 내 놓고 순교할 일이 없다고 해도 매일 매일 순교의 현장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때로는 질병으로 우리의 신앙을 시험합니다. 때로는 사업의 실패로, 때로는 자녀로, 때로는 세상 풍습으로, 때로는 헌신에 대한 부담으로, 때로는 세상 쾌락으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우리가 매일 삶의 현장에서 이 엄청난 유혹과 핍박 앞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자기 확신이나 자만심으로 비교우위로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다 해결하신 부활하신 예수님 의지하여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비교의식으로 자신을 과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것 있다고 그것으로 과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히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영적 전투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 말을 앞세우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야 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여 성령 충만함으로 승리하여야 합니다. 연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연약함을 극복하려면 은혜를 힘입어야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는 은혜를 받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9.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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