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사도행전 › 부활은 심판이다

정용섭 목사 | 2011.06.14 15:17:39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행17:22-31
설교자
정용섭 목사
참고
http://dabia.net/xe/518253

emoticon 정용섭 목사

 

부활은 심판이다

사도행전 17:22-31, 부활절 여섯째 주일, 2011년 5월29일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점에서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살아계신 동안에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는데도 예수님의 사도로 불립니다. 자칭 사도라고 말하는 게 옳습니다. 바울과 열두 사도 사이는 불가근불가원의 관계였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해서 쟁쟁한 사도들이 많았는데도 사도행전은 주로 바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이 이름만으로 본다면 사도들의 활동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지만 실제로는 바울의 입장을 변호하는 문서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그리스도교가 시작할 때는 열두 사도들의 권위가 더 컸지만, 여기에는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도 포함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바울의 권위가 올라갔습니다. 거기에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어떤 속사정이 있습니다. 바울은 활동 초창기에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지역에서 힘에 밀리면서 어쩔 수 없이 선교 지역을 그리스로 옮겼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그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 지역에 세운 교회가 세계 교회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방문한 그리스 도시 중의 하나가 아테네입니다. 성경 식 이름으로는 아덴입니다. 아덴, 즉 아테네는 그리스의 수도입니다. 고대 아덴은 철학의 도시였습니다. 플라톤은 아덴에 지금의 대학교라 할 수 있는 아카데미를 세워서 후학들을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아덴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이 안타까워서 만나는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논쟁을 벌인 사람들 중에는 에피쿠로스 철학자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있었습니다.(행 17:18) 그들은 바울과 본격적으로 논쟁하기 위해서 바울을 아레오바고 법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거기서 행한 바울의 연설이 오늘 설교 본문인 행 17:22-31절입니다. 바울의 이 설교는 아주 특별한 상황에서 한 것입니다. 청중들은 철학적으로 상당히 세련된 이들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던 사람들입니다. 작심하고 논쟁할 준비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청중으로 놓고 설교하는 일은 고달픕니다. 그래도 그들을 설득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교회의 미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바울이 처한 상황만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의 상황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철학으로 정신 무장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변증해야 할 사명이고 책임입니다. 또한 오늘 최고 문명을 구가하면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복음을 변증해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고 책임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이름으로 선포된 당시의 그리스도교 변증이 어떤지를 보십시오.

 

사람의 기술과 고안

    

바울은 아덴 사람들의 종교심을 거론하면서 변증을 시작합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행 17:22) 당시의 아덴은 로마가 지중해 연안을 지배한 뒤로 그 명망을 상당하게 잃었지만 여전히 철학적으로, 문학적으로, 예술적으로, 더 나가서 종교적으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들의 조각과 건축은 지금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뛰어납니다. 아덴 거리 곳곳에 그런 조각과 건축물이 세워졌습니다. 그 정신적 모태는 신화입니다. 신들의 우두머리는 제우스이고, 그의 아내이며 누이이면서 여신 중의 우두머리인 신의 이름은 헤라입니다. 전쟁과 지혜의 여신 아테나,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냥과 출산의 여신은 아르테미스, 곡물의 성장을 주관하는 여신 데메테르, 화로의 불을 주관하는 헤스티아 등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 많은 신들이 신화에 등장합니다. 각각 그들을 섬기는 단들이 아덴 거리에 놓여 있었습니다.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단을 만들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의 상황을 알만 합니다.

    

바울은 바로 그 ‘알지 못하는 신’이 누군지를 알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청중들은 흥미가 끌렸겠지요. 자신들도 여러 신의 형상을 만들기는 했지만 신의 세계는 물론이고 세상의 이치도 다 알지 못했으니까요. 바울은 몇 가지로 설명합니다. 1) 그는 만물 가운데 계시는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2) 그는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는다. 3)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아야만 존재하는 분이 아니다. 4) 오히려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시다. 5) 모든 사람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 6)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하신다. 이것은 성서적인 하나님 표상이지만 구약성서의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지금 바울의 연설을 듣고 있는 아덴의 철학자들도 인정할만합니다. 만물의 근원을 이데아라고 한 플라톤의 주장에서 보더라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세상이 조화롭게 구성되고 유지된다고 본 스토아 사상에서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세상을 어느 정도 깊이 있게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동의할만한 내용입니다. 일종의 자연신학 전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7) 여기까지는 아덴 사람이나 바울이나 서로 크게 이견이 없습니다.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아덴 사람들은 금, 은, 돌로 어떤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 형상은 앞에서 말씀드린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가리켜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겼다고 했습니다. 루터는 기술을 Kunst(예술)라고, 고안을 Gedanken(사상)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매우 세련되어 보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존경받고 그만한 대가도 받습니다. 지금도 어떤 화가의 그림은 수억 원, 수십억 원을 호가합니다. 인류는 그런 기술, 예술, 사상을 발전시키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것이 발전한 나라를 선진국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을 노골적으로 신이라고 믿지 않겠지만 실제로는 신과 다를 게 없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기술’은 오늘의 기술공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전공학, 토목기술도 모두 쿤스트입니다.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처럼 따르는 사상도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는 바로 그런 사상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신으로 모십니다. 그게 우리의 정치, 교육, 예술, 심지어 종교까지 지배합니다. 아마 우리의 잠재의식까지 지배할지 모릅니다. 아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듯이 우리도 지금 우리의 기술과 고안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그런 단을 마음 한 구석에 만들어 놓고 사는 건 아닌지요. 저금통장의 액수에 우리의 미래를 맡기는 삶이 바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매일 매달려 있는 티브이 방송이 우리의 ‘알지 못하는 신’은 아닐까요? 도대체 지금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는, 그래서 결국은 허무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우상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냥 간단하게 말하면 바로 위에서 언급한 물질주의, 성공주의, 자기 구원을 가리킵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가 그런 것을 제쳐두고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수도원이나 교도소 같은 곳에 들어가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세상이 요구하는 온갖 것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돈이 없으면 실제로 미래가 불안해집니다. 다른 나라보다 우리의 경제발전이 늦으면 국민들이 모두 불안해합니다. 그렇습니다. 우상은 우리가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는 힘입니다. 마치 죄가 우리를 존재론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걸 억지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길은 한 가지입니다. 참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참된 것이 오기 전까지는 가짜를 가짜로 분간하기는 어렵습니다. 명화도 짝퉁만 놓고 그냥 보면 구분이 잘 안 됩니다. 오리지널을 놓고 봐야 구분이 됩니다. 지금 사람들이 섬기는 모든 문명도 그것만 놓고 보면 그런대로 괜찮아 보입니다. 나름으로 살 길을 찾으려는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우리의 한계이기도 하고, 실존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다고 말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행 17:30) 모를 때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믿는 길이, 즉 생명을 얻는 길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심판과 부활

    

바울은 그 길이 무엇인지를 오늘 설교 본문 31절에서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이 31절이 바울 설교의 결론이고, 동시에 초기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여기서 심판은 생명이냐 죽음이냐를, 구원이냐 멸망이냐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를 쓰고 살아갈 궁리를 짜는 ‘기술과 고안’이 아니라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심판할 날을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심판이라는 말을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판사가 피고인을 감옥에 보내거나, 옥황상제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지옥에 보내는 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림들이 성서에도 있긴 하지만 그것은 생명의 결정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비유입니다. 심판은 생명이며, 구원입니다. 심판의 날은 생명의 실체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순간이기 때문에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의 날입니다.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이 심판은 두 가지 기준으로 일어납니다. 하나는 ‘공의’, 즉 정의입니다. 이 정의를 실정법, 율법으로 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고유한 심판 기준이 정의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정하신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믿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한 사람을 죽은 자로부터 살리셨다는 사실이 그 증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곧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심판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아덴 사람들이 추구하던 기술과 고안은 이 더 이상 구원의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고유한 방식으로 세상을 심판, 즉 생명을 주십니다. 이것이 철학의 도시에 살고 있던 아덴 사람들에게 전한 바울의 설교입니다. 동시에 지중해 연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초기 그리스도교가 전한 복음의 진수이고, 오늘 우리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부활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심판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가요? 부활은 한 유대인 남자가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사실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그 이전에 어떤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전제해야 만합니다. 십자가 처형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반역입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거부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부정입니다. 무죄한 이들의 고난과 죽음의 극치입니다. 유대 종교와 로마 정치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교만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고유하고 종말론적인 능력으로 인간의 반역을 해체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종교적 권력과 정치적 권력을 무장해제 시키셨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을 통해서 이제 이 세상을 지배하는 모든 허위의식이, 권위주의가, 사이비 메시아주의가 폭로되었습니다. 그 폭로가 심판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전혀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해방이 주는 기쁨의 세계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삶의 능력을 드러내야 합니다. 무엇이 참된 생명인지를 분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금년 들어서 KAIST 학생이 4명이나 자살을 했습니다. 교수 한 분도 자살을 했습니다. 며칠 사이에 젊은 가수와 아나운서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특히 청소년들의 자살률이 가장 높습니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에 완전히 예속된 탓이 아니겠습니까. 참된 생명이 어디서 주어지는지 다시 생각하십시오. 예수의 부활입니다. 이 부활은 생명이고 심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의 심판을 받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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