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바보의 힘 : 예수의 멋진 힘

누가복음 한완상 형제............... 조회 수 2681 추천 수 0 2012.02.09 20:10:14
.........
성경본문 : 눅6:20-22 
설교자 : 한완상 형제 
참고 : 새길교회 

sgsermon.jpg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바보의 힘 : 예수의 멋진 힘

(누가복음 6:20-22, 고린도전서 1:22-25)

2012년 1월 1일 신년예배

한완상 형제

  

 지난 신묘년은 정말 다사다난 했습니다. 그런 중에도 바보의 소중함을 가슴 시리게 깨우쳐 준 값진 한해이기도 했습니다. 새해 임진년에도 우리로 하여금 계속 감동적인 바보들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지난 주 내내 또래 친구의 폭력적 시달림에 견디지 못해 자살한 한 중학생의 그 ‘바보같은’ 죽음이 주는 충격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젊은이는 마치 잠시 다녀 올 여행을 앞두고 부모님께 남기는 편지처럼 담담하게 쓴 유서를 남겼습니다. 바보치고 이렇게 차분하고 착하게 유서를 쓰는 바보는 없을 듯합니다. 그 마지막 편지에는 죽음 앞에 느끼는 두려움보다는 부모와 형에 대한 사랑이 절절하게 나타나고 있어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합니다.

 

“저는 매일 매일 가족 몰래 몸의 수많은 멍들을 보면서 한탄했어요.”

“아빠, 매일 공부 안하고 화만 내는 제가 걱정스러웠죠? 죄송해요.”

“엄마, 친구 데려 온답시고 먹을 걸 먹게 해준 제가 바보스러웠죠? 죄송해요.”

“형, 매일 내가 얄밉게 굴고 짜증나게 했지? 미안해.”

 

  그는 바보같이 죽으면서도 가족에게 온 존재로 보여준 그 사랑의 감수성, 그 동고(同苦)의 사랑에 우리는 우리의 우둔함과 비정함을 새삼 깨닫게 되고 부끄러워지게 됩니다. 저의 가슴을 더 아리게 하는 것은 눈물 흘리며 죽기까지 하면서 보여준 그의 바보 같은 사랑고백이었습니다.

 

  “매일 남몰래 울고 제가 한 것도 아닌데 억울하게 꾸중 듣고 매일 맞던 시절을 끝내는 대신, 가족들을 볼 수가 없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저희 가족들이 슬프다면 저도 슬플 거예요. 부디 제가 없어도 행복하길 빌게요.

  p.s. 부모님께 한 번도 진지하게 사랑한다는 말 못 전했지만, 지금 전할게요. 엄마, 아빠 그리고 형 사랑해요!!!!“

 

  이 유서를 보고 가슴 아파할 그의 엄마, 아빠와 형을 생각해 보세요.

 

  올 해 우리들에게 감동의 충격을 준 바보는 한 둘이 아닙니다. 지난 봄, 고려대학교를 자퇴하면서 “오늘 저는 대학을 그만둡니다. 진리도, 우정도, 정의도 없는 죽은 대학이기에...” 라고 절규했던 김예슬이라는 젊은이가 있습니다. 또 다른 한 젊은이가 서울대학을 떠나면서 자격증 장사 브로커 노릇하는 대학이라 외치며 노예 아닌 인간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12월 30일에는 우직하게 민주화의 원칙을 온 몸으로 지키며 어렵게 살아온 바보같은 정치인 김근태 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게다가 30년은 더 살 수 있는 나이에 죽었던 스티브 잡스가 유언처럼 남긴 말이 생각납니다. “계속 갈망하십시오. 계속 바보로 남으세요.” 그는 이 외침대로 살았기에 일찍 죽은 것 같습니다.

이러한 용기 있는 바보들의 감동적인 삶과 죽음을 보면서 저는 바보의 본질이 무엇이며, 기독교 복음이 이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바보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새해를 맞아 예수님을 새롭게 바라보고 싶고, 그의 말씀을 새롭게 되새기고 싶습니다.

 

  바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보통 사람들, 특히 영악한 보통 사람들이 못 보는 것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그런 보통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용기 있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바보입니다. 어느 시인이 노무현 대통형의 죽음을 보고 바보라고 하면서 “바보란, 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일상의 테두리 안에서 사는 보통 사람들이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을 바로 보기에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바보는 살펴주는 사람”입니다. 바로 선한 사마리아 같은 사람이지요. 성직자들이 억울하게 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피해 갔지만, 돌쌍놈으로 욕먹었던 잡종의 인간 사마리아인은 진정 바보였습니다. 그만이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을 바로 보살폈기 때문입니다.

 

 바고, 살피는 능력 때문에 일상성의 테두리 안에서 기득권을 즐기는 힘 있는 사람들은 바보들을 왕따 시키고, 핍박하고, 착취하고 차별합니다. 바로 그러했기에 예수님도 처음부터 그의 고향이라는 일상성의 세계로부터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쫓겨나는 현실을 예수님께서는 온 몸으로 증거 하셨지요. 예수님은 환영받지 못한데서 끝난 것이 아니라 벼랑 끝으로 밀려 떨어져 죽을 뻔 했지요.

  그렇다면 예수따르미들은 예수님의 바보스러움을 새삼 주목해야 합니다. 그의 바보스러운 말씀을, 그리고 바보 같은 결단과 삶을 새롭게 확인해야 합니다. 그 바보스러움에서 새로운 힘, 새로운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새해를 맞는 기쁨일 것입니다. 바보 되기를 항상 회피해 왔던 저희들이기에 새해 첫날 바보가 주는 감동을 예수님을 통해 온 존재로 받아 들여야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말씀 중 바보 같은 메시지가 무엇인지 주목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메시지가 너무 많아 특별히 바보스러운 것을 골라내기가 쉬우면서도 어려운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치시기 전 광야로 나가 그 운동의 본질을 확인하려 했습니다. 그 운동의 궁극적 목표와 전략을 깊이, 깊이 성찰하고, 명상하셨습니다. 광야에서 그는 바보스러운 결단을 내립니다. 사탄의 세 가지 유혹을 물리치시지요. 노다지로 쏟아지는 복들을 바보스럽게 거부했습니다. 거부(巨富)의 복, 세상을 장악하는 대권(大權)의 복, 그리고 초자연적 신통력의 복을 모두 거부하셨습니다. 여기서 사탄은 큰 복주머니를 독점하고 있는 복 방망이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참으로 바보같이 그 큰 축복들이 쏟아지는 것을 물리쳤지요. 그러니까 광야 시험에서 예수님은 처음부터 바보 되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엄청나게 큰 바보가 되어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치시기로 결단하신 것입니다. 예수따르미는 이 같은 예수님의 큰 결단의 깊은 속뜻을 항상 되새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첫 설교를 바보 같은 선언처럼 듣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수를 무시했던 예수의 첫 선언에 불쾌했던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말씀에 감동하지 않는 고향사람들, 특히 배타적 유대 민족의식에 충만해 있던 사람들에게 이방인 과부 사렙다와 이방인 장군 나아만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를 부각시켰지요. 그것은 팔이 밖으로 굽기를 요구하는 바보 같은 예수님의 요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향에서 배척 받게 되었지요.

  역시 예수님의 주옥같은 메시지는 산위의 말씀일 것입니다. 누가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같은 선언은 정말 지금 굶주릴 수밖에 없어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웃기는 소리’로 들릴 수 있습니다. 이런 비참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라고 말한다면 과연 누가 하나님 나라 운동에 적극 나서겠습니까? 게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은 부유한 사람들, 지금 배부르며 기뻐서 웃는 사람들에게는 “화가 미칠 것이다.” 라고 저주 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예수님은 아주 새빨간 빨갱이라고 욕먹기에 딱 알맞은 메시지를 던진 셈이지요. 그래서 참으로 어리석은 선포같이 들렸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미 가난해서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어떤 힘센 사람이 네 오른 뺨을 치면 왼쪽 뺨도 돌려 대주라고 했지요. 또 추워 떠는 가난한 이들의 겉옷을 힘으로 빼앗는 자들에게는 속옷까지 모두 벗어 주라고 했습니다. 결국 발가벗으라는 웃기는 명령이기도 하지요. 가진 자는 더 갖게 되고, 못 가진 자는 적신(赤身)으로 발가벗고 살아가는 바보가 되라는 명령이지요. “너에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사람에게서 도로 찾으려 하지 말라.”(누가복음 6:30) 이것은 자본주의 시장의 거래를 근원적으로 부정 하는듯한 바보 같은 메시지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비유 말씀에는 꼴찌에 대한 예수님의 진한 사랑표현이 나타납니다. 탕자 같은 존재, 경멸 받았던 이방인, 여성, 죄로 인해 중병에 시달리는 죄인들, 지체장애자로 절망 속에 인간쓰레기로 사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지극한 배려와 사랑은 당시 힘 있는 율법주의자들이나 예루살렘성전 세력과 회당 세력들에게는 바보스러운 편애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실천과 삶은 또한 바보스러운 선택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광야의 시험을 이기시고 갈릴리로 돌아오신 뒤 예수님은 병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그가 베드로의 장모를 낫게 하신 일로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지요. 환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지요. 이때 아침 일찍 홀로 기도하시고 있는 예수님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찾아와서 “모두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이때 베드로는 장모 집에 운집해 있는 환자들을 치유해 줌으로써, 그 집이 하나님나라 운동의 본부나 중심처가 되기를 소망했을 것입니다. 예수 치유센터 설치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성공할 것으로 계산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름처럼 많은 사람들이 몰려 온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것이 엄청나게 거대한 운동본부로 급성장할 것을 내다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곳저곳 필요가 절박한 현장으로 직접 두루 찾아다니시는 운동을 선택하시고 펼쳤습니다. 이른바 방랑선교요 방랑운동이지요. 거대한 본부나 본당이 필요 없다는 예수님의 다짐이지요. 이때 베드로는 속으로 바보 같은 선택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의 한국 메가처치(Mega-Church)의 영악하고 영특한 욕심은 예수의 뜻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하기야 예수님의 이 같은 선택은 얹듯 보기에 바보스럽기 조차 합니다.

 

  게다가 병을 치유 하시면서 환자를 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시는 처방을 내리셨는데 이것은 유대종교 기득권 세력에게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위태롭고 위험한 신성 모독적 도전이었습니다. 그만큼 바보 같은 짓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당시는 지금보다 훨씬 구조적으로 분할된 사회였습니다. 인종으로, 성으로, 계급으로 분할된 닫힌 체제였는데, 예수님의 밥상공동체의 평등운동이나, 계급과 인종과 성의 차별 없이 환자를 치유하신 행위 역시 무모한 도전행위로 낙인찍힐 수 있었지요. 그만큼 바보스러운 선택이었지요. 바위보다 굳건한 당시의 구조적 차이를 허물어뜨리려는 불순하고, 불온하고, 불경한 저항으로도 낙인찍히게 되지요.

 

 그런데 가장 심각한 바보다운 선택은 예수님 스스로 죽으러 가는 메시아임을 선포한 일입니다(마태복음 16:21). 원래 메시아란 칭호는 당당하게 승리하는 지도자, 용기 있게 해방시키는 지도자, 신적 권위로 세상을 통치하는 지도자 등의 뜻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패배하는 메시아, 고문당하는 메시아, 피 흘리며 죽는 메시아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지도자역할입니다. 실패하는 메시아는 한마디로 웃기는 메시아이지요. 그런데 예수를 압승자 메시아로 착각하여 그를 따랐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바보 같은 고백을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셔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마태복음 16:21)

 

  이 같은 죽으러가는 메시아는 유대전통에도, 희랍전통에도, 로마전통에도 없습니다. 예수의 독특한 메시아 인식 이지요. 이 같은 바보스러운 예수의 메시아 선포를 듣고 즉각 베드로는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라고 책망하듯 말립니다. 한마디로 주님 그런 바보 같은 말씀하시지 마세요라는 베드로의 핀잔이었습니다. 어떻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나약하게 허무하게 패배하고 죽을 수 있느냐는 베드로다운 항변이지요.

  그런데 기독교 복음의 핵심과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의 가치는 바보-메시아가 되시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서 빛나게 되는 가치입니다. 그것도, 십자가에 처형되면서도 처형시키는 자를 용서하는 그 넉넉한 예수의 결단에서 찬란하게 빛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산위에서 바보처럼 말씀하셨던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는 몸소 그 사랑을 실천하시어 바보가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진수입니다. 이 복음을 사도바울이 계승하여 적절하게 신학화(神學化)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요, 이방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고린도전서 1:21-25)

 

  바울은 예수의 바보스러움을 하나님의 어리석음으로 표현하면서, 그러나 이 하나님의 바보스러움이 예수님의 패배와 고난과 죽음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힘과 지혜로 나타난다고 해석했습니다. 탁월한 신학적 해석입니다. 예수 죽음이 옳은 선택에서 나온 것임을 하나님은 그의 부활을 통해 입증하시고 옹호하셨으며, 반대로 예수를 죽인 제국과 문명의 독선과 폭력은 궁극적으로 패배할 것임을 밝힌 것이라고 바울은 신학화 했습니다. 여기서 갈릴리 예수의 바보 같은 하나님나라 운동이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통해 초대교회운동으로 연결되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기독교 복음은 갈릴리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서 시작하여 그의 고난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예수의 바보 같은 선택과 결단을 통해 우리를 안타깝게 하지만 마침내 부활사건으로 우리를 감동의 절정에로 이끌어 주십니다. 이러한 복음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 비우시는 바보 같은 하나님을 또한 만나게 됩니다. 성육신 사건의 감동은 처녀탄생에 대한 교리에서 나오기 보다는 예수의 무력하고 처절한 바보 같은 고난과 죽음에서 태동하다가 마침내 부활에서 폭발합니다. 부활의 폭발은 모든 구조적, 우주적, 심리적 독선과 폭력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구원의 힘입니다. 그러기에 갈릴리에서의 예수운동과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사건은 한 줄로 이어집니다. 이 힘은 스스로 비우시고, 나누시고, 죽음에 이르는 바보 같은 하나님의 모습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이 같은 바보의 힘으로 주님은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세워주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펼쳐나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아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듯, 이 땅, 이 역사 속에서도 아빠의 뜻을 이룩하는 일에 우리를 초청해 주시고, 우리 손을 친히 잡으시고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쁜 소식입니다. 이 소식 들으며 초대교회는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셨음을 새삼 뒤늦게 깨닫게 되어 눈물을 흘리며 감사, 감격했던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대고(代苦)와 대속의 메시지로 우리를 항상 감사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악조건에서도 항상 기뻐하게 하시고, 쉬지 않고 감사기도하게 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삶, 그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빛 아래서 영리하고 영악하게 살아온 우리의 부끄러운 삶을 진솔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보처럼 사시고 바보처럼 죽기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온전한 존재와 아름다운 관계로 일으켜 세워 주셨는데 우리는 항상 잔머리를 굴리며 살아 왔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잔머리 굴리면서 남을 제치고 홀로 압승의 영광을 누리려고 파이팅을 외치며 살아왔음을 뉘우쳐야 합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주님은 단 한 번도 꼼수를 부리지 않으셨습니다. 말없이 조용히 번제물의 어린양같이, 제사장들과 빌라도 앞에서 정말 바보같이 침묵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제단으로 우아하게 나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꼼수를 멋대로 부리며 승리주의적 우월감을 가지며 교만하게 살아왔습니다.

 

 새해를 맞아 우리의 영의 귀를 활짝 열고, 영의 가슴을 크게 열어 예수님의 그 바보스러운 외침의 소리를 새롭게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깊은 뜻을 헤아려 감사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 굶주린 자, 이제 슬피 우는 자가 복이 있나니...

오른 뺨을 치는 자에게 왼뺨을 돌려대라.

어린아이같이 잔머리 굴리지 않는 자가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되리라.

우아하게 지고, 멋지게 죽는 자가 부활의 영광에 이르리라.

꼴찌가 첫째가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우리의 역사 속에서 펼쳐나가라.

 

  이제 새해를 맞으며 우리는 새삼 우리를 슬프게 하는 한 가지 현실적 진리에 주목해야 합니다. 인간 사회가 경쟁만을 부추기면서 승리주의 가치만을 높이 떠받들 때, 잔머리를 굴리며 꼼수를 즐겨 사용하는 가진 자들, 곧 적자(適者)들의 횡포가 더 극심해 질 것이라는 현실입니다. 그만큼 바보들의 억울한 고통과 죽음이 끊이지 않는다는 진리입니다. 바로 이것은 정글에서와 같이 강자만 승리자로 영광을 독점하는 경쟁상황에서는 사람은 짐승이 되고, 국가는 괴물이 되고, 시장은 참으로 징그러운 괴수로 변질되고 만다는 진리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비극의 상황에서 예수따르미는 바보가 되더라도 강권을 잔인하게 사용하거나 꼼수를 부리는 세력을 단호하게 거부해야합니다. 그리고 과열경쟁과 승리지상주의를 제어하는 운동에 앞장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가장 감동적인 바보의 모범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우리들이 이 시간, 새해 아침에 고백합니다.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당신은 진실로 멋진 바보 메시아이십니다. 저희들도 용기 있게 우아한 바보가 되게 하소서. 바보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6456 레위기 주님과 함께 걷는 길 레13:1-23  최장환 목사  2012-02-15 6635
6455 이사야 천 배의 축복을 꿈꾸십시오 사60:10-22  이한규 목사  2012-02-14 2763
6454 이사야 성령 충만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사61:1-11  이한규 목사  2012-02-14 2956
6453 이사야 바른 믿음을 가지십시오 사60:1-3  이한규 목사  2012-02-14 2255
6452 이사야 사람의 마음을 얻는 길 사60:4-9  이한규 목사  2012-02-14 2465
6451 여호수아 편견만 버릴 수 있다면 수20:1-9  이한규 목사  2012-02-14 2348
6450 이사야 사랑은 책임입니다 사59:9-21  이한규 목사  2012-02-14 2590
6449 이사야 응답 받는 4대 기도 사59:1-8  이한규 목사  2012-02-14 2907
6448 누가복음 소외감을 극복하는 길 눅18:9-14  이한규 목사  2012-02-14 3084
6447 이사야 성공자의 6가지 공통분모 사58:9-14  이한규 목사  2012-02-14 2085
6446 이사야 가장 아름다운 사람 사58:1-9a  이한규 목사  2012-02-14 2433
6445 이사야 거칠 것이 없는 축복 사57:14-21  이한규 목사  2012-02-14 2754
6444 이사야 감정에 도취되지 마십시오 사57:1-13  이한규 목사  2012-02-14 2292
6443 시편 은혜가 넘치는 삶의 축복 시145:1-9  이한규 목사  2012-02-14 3084
6442 이사야 현상에 미혹되지 마십시오 사56:9-12  이한규 목사  2012-02-14 2337
6441 이사야 용서를 체험하십시오 사56:1-8  이한규 목사  2012-02-14 2209
6440 이사야 축복은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사56:10-13  이한규 목사  2012-02-14 2787
6439 민수기 원망과 불평의 시작 민11:1-9  이정원 목사  2012-02-13 2847
6438 민수기 성도의 책임 민10:29-36  이정원 목사  2012-02-13 2223
6437 민수기 하나님의 군대 file 민10:11-28  이정원 목사  2012-02-13 4552
6436 민수기 은 나팔 민10:1-10  이정원 목사  2012-02-13 2138
6435 민수기 우리의 인도자 민9:15-23  이정원 목사  2012-02-13 1961
6434 고린도전 다시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자가 되자 고전15:51-52  강종수 목사  2012-02-12 1974
6433 요한복음 농부의 마음 요15:1-2  한태완 목사  2012-02-12 3330
6432 시편 믿음과 하나님 알기 시34:1-22  한태완 목사  2012-02-10 2607
6431 신명기 하나님 경험의 위기 신18:15-20  정용섭 목사  2012-02-09 2094
6430 마가복음 제자의 길 막1:14-20  정용섭 목사  2012-02-09 2410
6429 사무엘상 사무엘을 부르신 하나님 삼상3:1-9  정용섭 목사  2012-02-09 2933
6428 마가복음 물세례, 성령세례 막1:4-11  정용섭 목사  2012-02-09 2945
6427 갈라디아 종의 영, 아들의 영 갈4:4-7  정용섭 목사  2012-02-09 2074
6426 요한일서 생명세상 file 요일1:1-4  이선근 형제  2012-02-09 2056
6425 야고보서 어른 사회의 왕따 약2:8-9  정형선 형제  2012-02-09 2355
6424 창세기 새 하늘과 새 땅 : 창조와 부활의 새 아침 창1:1-5  서광선 목사  2012-02-09 2162
» 누가복음 바보의 힘 : 예수의 멋진 힘 눅6:20-22  한완상 형제  2012-02-09 2681
6422 마태복음 함부로 서약하고 맹세하지 말라 마5:33-37  한태완 목사  2012-02-09 3434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