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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4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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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
생의 갈림길에서 9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을 때
2006-10-08
본문: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시42:1-2)
I. 본문의 배경
시편 42편의 표제어는 고라의 자손을 저작자로 밝히고 있습니다. ‘고라의 자손의 시’라는 표제가 의미하는 바를 ‘고라의 자손이 보관하던 시’라고 해석하고 이 시의 저자를 다윗 왕으로 보는 구약학자들도 있으나 본편에 나오는 성전에서 수종을 드는 문맥을 고려한다면(4절), 이는 다윗 왕 보다는 고라의 자손 중 한 사람의 시일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성전을 수종드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고라 자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라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광야로 나아오던 때에 한 족속의 우두머리였습니다. 불행히도 이 고라의 족속은 모세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런 고라의 자손들을 기뻐하셨을 리가 없었으며, 그런 이유로 땅이 갈라져 저들이 살고 있는 모든 진이 땅 속에 파묻혀 버리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재앙을 맞이하게 됩니다.(민 16:21). 그러나 고라의 모든 자손들이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으며,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일평생 반역의 무리하고 하는 낙인이 찍힌 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슬픈 가족사를 이어와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들의 불명예와 슬픈 과거들을 씻어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오게 되었는데 다윗 왕 때였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울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을 때에 새로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의 주위로 상처받고 곤고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대로 이들을 목자와 같이 돌보면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에 이릅니다. 이때 다윗을 도왔던 족속 가운데 고라 족속이 나옵니다. 다윗은 반역의 무리라는 저들의 낙인을 지워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하나님의 성소에서 수종을 들며 성도들을 섬기고 헌신하는 특별한 사람들로 세워줍니다.(대상 25장, 26:1 등 참조).
시편 42편은 그런 역사적 배경을 지닌 고라의 자손 중 한 사람이 기록하였다고 전합니다. 아마도 이 시의 저자는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하여 요단 강 건너편으로 망명의 길을 올랐을 때 그를 따라온 고라의 자손 중 한 사람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II. 욕망과 영혼의 힘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다윗을 비롯하여 시인을 포함한 그와 함께 한 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 42:3).
A. 영혼의 힘과 욕망
한 사람의 사람됨은 영혼의 올바른 힘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영혼의 올바른 힘을 가리켜서 ‘덕’(德, virtus)이라고 부릅니다. 덕이란 인간 영혼의 힘,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작용이 창조의 목적을 향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영혼에서 비롯되는 인간의 정신과 마음의 작용, 그리고 육체의 행동, 이 모든 것들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 발휘되는 힘을 가리켜서 ‘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사람됨은 그 영혼의 덕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한 신자의 신자 됨은 그가 무엇을 하고, 어떤 교회에 출석하는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어떤 욕망이 역사하고 있는지를 통해서 판단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러한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격 안에 한 가지 욕망만이 존재 하겠는가?’ 물론 가장 거룩한 사람들 속에도 아주 더러운 욕망이 깃들 수가 있고, 짐승처럼 막 살아가는 인간의 욕망 가운데에도 주님을 잘 믿고 진실한 성도가 되고 싶어 하는 갈망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여러 가지 욕망이 우리 안에 함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주도적인 욕망은 하나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지만, 여전히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는 주도적인 욕망이 흐르고 있다면 우리는 분명 신자의 길을 가고 있는 중입니다.
시인은 기도 제목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사랑하고 존경하는 다윗왕의 목에 칼을 겨눈 무리들을 토벌해 달라는 간구가 그의 간절한 소망이 될 법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 그러한 기도의 제목으로 나아가는 대신 자신 속에 있는 불붙는 욕망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간절한 갈망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갈망이었습니다.
B. 영혼의 갈급함
시인은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라고 하는 이 표현이 마음에 충분하지 않은지 한 묘사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1. 이 고백의 배경
이 고백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사슴들이 많이 삽니다. 가을철 교미기가 되면 발정한 수사슴들은 암컷을 찾아서 들판으로 나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 마리의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서 날카로운 뿔로 생명을 건 싸움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발정(發情)할 때에 수사슴에게는 아주 강력한 목마름이 나타나게 되는데, 처음에는 그러한 갈증을 뒤로 한 채 짝을 찾아 나섰던 수사슴들이 어느 순간 짝보다도 더 급한 물을 찾아서 헤매게 됩니다. 사슴들이 들판을 가로지르다가 물을 만나면 다행이지만 물을 만나지 못하면 타는 듯한 갈증 속에서 죽어가기 일쑤입니다. 이렇게 사슴이 죽을 때는 본능적으로 앞발로 땅을 파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시인은 팔레스타인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한 모금의 물을 찾다가 죽어간 수많은 사슴들의 시체를 보았을 것입니다.
시인은 한 모금의 물이 없어서 죽음의 길을 갔던 이 사슴들처럼 지금 자신은 하나님과의 감격스러운 만남이 없기 때문에 죽어버릴 것 같은 처지가 되었으니 자기를 긍휼히 여겨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금이나 은이나 왕국을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감격적인 영혼의 만남을 통하여 말입니다.
2. 영혼의 목마름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축복에 목마른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혼의 목마름이 아닙니다. 인간의 헛된 육욕의 바람들입니다. 어느 시대이건 하나님 자신에 대해 영혼의 목마름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한 어느 시대, 어느 공동체이건 하나님은 당신을 향하여 목마른 사람들을 두셔서 그들로 하나님 자신을 갈망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목마른 사람들은 주님을 가까이 하는 것 밖에 소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자신께 목마른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없이 천국에서 생명수 물가를 걷기보다는 주님과 함께 지옥의 불길 한 가운데를 지나는 편이 훨씬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주님을 향해 목마른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무엇, 어떤 혜택, 어떤 축복의 약속, 어떤 은혜 때문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너무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워서 그분을 뵙고 싶고, 만나고 싶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우리들 가운데 얼마나 있을까요?
오늘날 냉담하게 드려지는 예배를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을 찾을 수가 있습니까? 주님을 만난 감격 속에 흐느끼는 성도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예배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악함과 더러움 때문에 주님을 뵈옵지 못한 슬픔 속에서 흐느끼는 성도들이 얼마나 소수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무엇입니까?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자비를 구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 사람이 사랑을 안다는 것은 곧 사랑 받지 못할 때의 목마름을 안다는 말과 동일하지 않습니까? 우리들에게는 이런 순수한 신앙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과 위선과 허위와 형식을 벗어버리고, 주님 앞에 정직하게 서는 법, 하나님의 참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비결들을 배워야 합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을 뵈옵기 위해서 간절히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왕국을 찾기 위해서 아니었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잃어버린 왕국이 아니라 왕국 한 복판에 있었던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당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성을 지키는 무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고 주님을 인해 기뻐하던 때, 이방의 땅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주님과 그렇게 예배 속에서 만나던 때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목마름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주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이 많은 축복을 해주셔서 이런 영화를 누리고 저런 부귀를 누린다 하더라도 한 가지 행복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만난 것이 그것입니다. 온갖 죄와 헤아릴 수 없는 불결 속에서 살아왔던 우리를 주님은 임마누엘의 보혈의 샘에서 씻어주시고 치료하셨습니다. 그리고 고침 받은 우리에게 그 큰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능가하는 그 어떤 행복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에 간절히 목말라 하는 사람들에게 옵니다.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마셔도 해갈되지 않는 이 세상의 물과 이 세상의 떡이 아니라 우리를 온전히 만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큰사랑을 갈망하는 성도들, 그분께 목말라 하는 성도들을 주님께서는 만나주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좀 단순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껏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수많은 욕망과 그 욕망대로 하나님을 움직여보고자 했던 우리의 잘못된 생각들을 한번 내려놓고, 우리들이 간절히 원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일생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필요한 것인지를 한번 되물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고, 우리의 영혼이 우리를 향한 신실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도대체 우리가 무엇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중세 시대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inas)라는 경건한 교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한 수도사였습니다. 무엇인가 안타까운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렇게 기도하는 그에게 하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종 아퀴나스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랴. 네게 무슨 소원이 있기에 그토록 간절히 내게 매달리느냐?” 그러자 이 하나님의 사람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전 아무 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다시 하나님이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간절히 금식하며 눈물로 간구하느냐?” 그때 그는 대답했습니다. “주님, 저는 아무 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주님이 제게 무엇을 주신다면 다른 것 말고 주님 자신을 제게 주시옵소서. 주님은 저의 것이고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없이도 넉넉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삶은 얼마나 건조하고 고통스러운 삶일까요. 주님이 가장 아파하시는 것은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꿋꿋함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비록 오랜 세월을 죄 가운데 살고 그의 삶 속에 의로움이 없다고 할지라도, 어느 순간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고 주님 밖에는 의지할 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간절히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그러한 성도들을 주님은 훨씬 더 잘 만나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만나게 하는 것은 단지 도덕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죄인이라도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에 죄에 대한 심오한 참회를 갈망하는 마음도 말입니다. 그러나 순종하며 경건하게 살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그러한 갈망을 갖는 것은 영혼의 작용하는 원리에 있어서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이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이게 늘 묻고 싶습니다. “요즘 당신은 행복하십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묻는 저의 질문에 “그럼요!”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다시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도 당신 때문에 행복하십니까?”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불순종을 일삼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영혼에 목마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던지고 싶은 질문입니다.
아무도 행복하다고 대답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우리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요? 천하를 다 주고 우리의 욕망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속에 죄에 대한 갈증은 무저갱과 같아서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만족은 이처럼 세상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큰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어떻게 행복할 수가 있으며 그 사랑을 되찾기까지 어떻게 그가 진정으로 목마르지 않은 삶을 살 수가 있겠습니까?
이전에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이제는 아득하게 잊혀 진 옛날이 되었고,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음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는 주님 없이 사는 일에 제법 익숙해져 가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런 신앙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하물며 저보다 여러분들을 더 사랑하시고 여러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기까지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셨던 그분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요? 주님의 마음은 주님을 모르는 채 살아가는 이방의 백성들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한때 당신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 사랑이 없이도 넉넉히 살아가는 당신의 백성들 때문에 고통을 받으십니다. 행복하십니까? 기쁘십니까? 평안이 있습니까? 우리는 정직히 고백해야 합니다. “아니요, 나의 많은 죄와 허물 때문에 주께 나아가지 못하고 있으며, 주님을 거스르며 사는 이 삶이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어거스틴(A. Augustine)이 자기의『고백록』(Confession)에서 고백했듯이 신자는 주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평안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난 이후로 행복이 없었고 앞으로도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따금 주님을 등진 가운데 맛보는 세상의 즐거움과 죄악 된 삶이 가져다주는 약간의 쾌락들이 우리를 기쁘게 만들지만, 그것은 일종의 마약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들이 잠시 영혼의 궁핍함을 잊어버리게는 하지만 그 즐거움이 사라지면 다시 선명하게 떠오르는 하나님과의 관계,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그 신앙의 길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생겨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이고, 주님이 없이는 우리 자신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 더 깊은 사랑 속으로, 더 깊은 은혜와 연합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이 우리의 모든 삶을 움직이는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3. 하나님 자신께 대한 목마름
그러면 이 시인이 갈망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을까요?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신 하나님을 갈망하나니”(2절). 시인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왔기 때문에 자기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열납 되지 못한다든지 이제는 하나님이 자기를 완전히 버리셨다고 생각할 정도로 교리에 무지하거나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예배할 수 있는 자유를 모두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이렇게 갈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시인은 그런 하나님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간절히 만나고 싶어 했던 하나님은 이지(理智) 속에 묶여 있는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지식 안에서 잘 들어 보십시오.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느끼면서 생생한 교제의 감격 속에서 살 때에는 자기 앞에 놓여있는 잘못된 상황에 순순히 굴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그 능력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바꾸고 싶어 합니다. 그러한 간절한 바람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거룩한 욕망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나를 제외한 온 가족은 교회를 안 다니는 불신자이고, 나 혼자 외롭게 교회를 다녔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부모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다지만 여전히 그분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자기 영혼이 변화 받지 못했을 때에는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집안이 복음화 되지 않은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와서 설교를 듣고 찔릴 때마다 생각합니다. ‘우리 집 식구들이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데…’ 그렇지만 막상 집에 가면 그런 마음은 갈망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작고, 불신앙으로 살아가는 가족들의 현실은 너무나 높은 산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위로합니다. “언젠가는 때가 오겠지…” 바르지 못한 이 상황들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굴복하는 방법들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다가 큰 영적인 각성과 은혜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닫고 생생한 주님과의 교제의 기쁨을 회복합니다. 그렇게 변화되고 나면 집안 식구들이 불신 상태로 있는 그 현실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속히 예수님 믿고 구원 받으셔야 한다. 새사람으로 살아가셔야 한다. 내가 그 일을 위하여 무엇을 헌신할 수 있을까?”라고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전에 느낄 수 없었던 살아계신 하나님을 자신이 느끼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제껏 고칠 수 없었던 상황들을 능히 고칠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 속에서 살 때 이 믿음은 더욱 굳세어지게 됩니다.
시인이 갈망했던 하나님은 성경의 역사 속에 나오는 그런 하나님이나 교리 속에 묻혀있는 차가운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나의 삶의 현장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살아계셔서 언제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일하시는 하나님, 의인의 고통을 들으시고 경건한 자의 눈에 눈물을 씻어주시는 하나님, 마음에 한처럼 품은 기도제목으로 부르짖을 때에 잠잠하지 않고 귀를 기울이사 응답하시는 그런 살아계신 하나님을 이 시인은 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삶의 현장에 도전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여리고성을 도는 믿음이 있습니까? 어떻게 역사하실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내 눈 앞에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러한 위대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일생을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없이 살아가던 사람들, 침체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느 한 순간에,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면서 “아멘, 믿습니다!”를 연발하는 기도가 과연 믿음의 기도일 수 있을까요? 그렇게 믿음 없이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자명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필요에 의해 하나님 당신을 향해서 내기를 거는 마음으로 도박을 하는 사람들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거명되고 있는 그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성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가운데 엄청난 일에 도전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핍박과 환난의 칼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없는데도 하나님이 그렇게 자식을 주시리라고 믿었습니다. 주를 위해서 고난을 받고, 주를 위해서 수치를 당하는 것이 이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도전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내적인 삶의 특성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모세, 기드온, 사라, 혹은 아브라함, 이사야, 누구든지 간에 그런 도전하는 외적인 삶 속에 있었던 그 믿음의 사람들의 내적인 특성은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늘 목말라하는 자신에게 영혼의 해갈을 주시는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 속에서 산 그들의 영적 삶이 이렇듯 엄청난 믿음과 도전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차가운 사랑은 없습니다. 그러한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차가울 수 있을까요? 우리의 태도는 둘 중에 하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감격 속에 살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만남에 목말라 하든지 둘 중에 하나이어야 합니다.
III. 갈망을 상실한 이유
그러면 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도 목마른 사모함이 없을까요? 그것은 바로 영혼의 무감각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죄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은 무디어짐이 우리로 하여금 그런 갈증을 앗아간 것입니다. 신자 안에서 일어나는 갈망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정신적인 작용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하나님보다도 더 큰 것에 영향을 받고 있다면 거룩한 갈망은 있어도 곧 사라지거나, 아예 생겨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이처럼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 여러분들이 일주일 동안 죄를 지으면 얼마나 큰 죄를 지었겠습니까? 물론 여러분들 중에는 그런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문에 날만한 죄를 지으셨습니까?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고 예배당에 나오신 분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큰 죄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도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나태하고 안일한 죄가 살며시 스며들어오면 하나님에 대한 감각은 아주 무디어지고 세상과 육체에 대한 감각은 아주 예민해지게 됩니다. 하루에도 그런 일은 몇 번이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새벽 시간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고양되었던 마음이 낮 시간이 되어 무디어지고 저녁 시간에 갈급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마음 안에 죄가 들어오게 되면, 세상과 육체에 대한 감각은 아주 예민해집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을 때에는 전혀 마음 아파하지 않던 사람이 조금만 자기 성질을 건드리면 교회에 나오지 않거나 그 지체들을 피나게 미워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은혜의 감각들은 점차 사라지고 육체에 대한 감각으로 가득 찬 마음은 결국 그의 인격 속에 배이게 되고, 불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서서히 드러나게 됩니다. 이는 은혜에 의하여 어느 정도 통제가 되는 약간의 잠복기를 거쳐 이내 아주 형편없는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의 회개의 경험을 돌이켜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나면 대게 세 가지 느낌을 한꺼번에 경험하게 됩니다. 첫째는 이제 무거운 짐을 벗어버렸다고 하는 가벼움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셋째는 예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죄들이 크고 두려운 실재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각각 차례대로, 사죄, 사랑, 영광에 대한 감각의 회복과 관련됩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함께 아우르면서 예전에 없던 새로운 갈망이 생겨나는데 그것은 신령한 것들에 대한 갈망입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입니다.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그것은 또한 위엣 것들에 대한 갈망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3:1-2). 이것은 곧 하나님 자신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입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때에, 이런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목마름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나태한 신앙생활과 게으른 경건생활 속에서 커다란 죄는 아닐지 모르지만 이런 저런 죄들이 우리의 마음을 타고 들어왔고 우리의 심령을 더럽혀서 하나님을 향해서 마땅히 가져야 할 갈망을 잃어버린 채 신앙생활을 하게끔 만들고 있습니다. 아아, 우리가 하나님 없이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이제껏 그분의 사랑을 양식 삼아 살아왔습니다. 죄 가운데 있을 때에 용서와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 위로와 오류 가운데 있을 때에 진리로 붙들어 주셔서 살게 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종식하고 어떻게 버려야할지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끝없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IV. 마음을 추스릅시다
우리가 영적인 비만을 가지고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영혼의 회복을 사모하여야 합니다. 목마른 사슴처럼 더 크신 은혜를 구하며 아버지 앞에 매달리는 깨어진 마음을 가진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제 이 말씀 앞에서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추스려야 할지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불평과 불만, 그리고 원망과 다툼으로 자신의 곤고한 영혼을 숨긴 채 살아가는 그대에게 진정한 만족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되면, 그대가 행복해지시겠습니까? 주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해주셨을 때에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이 세상에 더러운 즐거움의 물이나 아니면 쾌락의 떡으로 살 수 있도록 만들어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리는 그렇게 해서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신령한 은혜와 사랑을 통해서 날마다 창조의 목적을 향해 새롭게 살아가도록 선택된 성도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슬픔의 이유가 무엇이든지 우리의 힘듦의 원인이 무엇이든지 우리가 아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그 모든 일에 대한 대답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무엇을 믿고 부요합니까? 무엇을 믿고 우리는 시인처럼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주님의 사랑에 목말라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에 가만히 들어온 더러운 죄, 사소하지만 지속적으로 불순종하며 살아가기 때문에서 우리의 영혼에 어두움을 더했던 우리의 죄들을 진심으로 고백합시다. 그리고 죄악 된 삶의 껍질들을 벗겨 주님의 사랑에 목말라 하는 우리의 영혼의 속살을 드러내주시도록 간구합시다. 다시 한 번 잊혀지지 않는 은혜의 부으심을 기대하면서…….
나눔의 시간
1. 지난 주의 말씀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사 38:1-6)”를 듣고 한 주간 실천했던 삶이나 받은 은혜들을 나누어 봅시다. 2. 영혼의 힘과 욕망의 관계에 대해 말해 봅시다.
3. 결국 영혼의 목마름이란 무엇을 향한 목마름입니까? 그리고 그러한 경험들을 나누어 봅시다.
4. 우리가 삶이 현장에서 믿음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5. 가을 사경회에 대한 기대와 기도 제목을 나누어 봅시다. 2006-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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