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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삼상16: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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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2012년 6월17일 http://dabia.net/xe/597303 |
정용섭 목사
성령의 사람
사무엘상 16:1-13, 성령강림절후 셋째 주일, 2012년 6월17일
사무엘, 사울, 다윗 다윗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분들도 다윗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압니다. 아직 청년이 되기도 전인 소년 시절에 돌멩이 하나로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때려잡았다는 무용담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다윗으로부터 시작되는 다윗 왕조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유일하게 인정받는 정통 왕조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신명기 역사가들은 다윗 왕조의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하고 기술했습니다. 남북의 왕들을 평가할 때 선한 왕의 기준은 다윗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올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 기대가 신약성서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었습니다.(마 1:16) 다윗이 구약의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대목이 오늘 설교 본문인 삼상 16:1-13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다윗을 왕으로 즉위시키는 의식에 대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이미 사울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왕은 세습을 해야 합니다. 왕의 큰아들인 요나단이 당시 세자였습니다. 요나단이 아니라 다윗을 왕으로 옹립한다는 것은 일종의 반역과 같습니다. 사무엘이 이런 위험한 일을 불사한 이유는 사울 왕과의 갈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울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운 인물은 사무엘입니다. 둘 관계는 초기에 아주 좋았습니다. 사울의 정치, 군사적 권력이 강화되면서 사무엘과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의 충돌인 셈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의 잘못을 두 가지로 보았습니다. 하나는 사울이 사무엘을 대신해서 번제를 드린 것이고,(삼상 13장) 다른 하나는 사울이 전리품을 모두 소각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삼상 15장) 앞의 일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일어난 것이고, 뒤의 일은 아말렉과의 전쟁 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충고하고, 사울 곁을 완전히 떠납니다. 성서기자는 이런 일련의 일들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삼상 15:35) 사무엘은 사울의 감시를 피해 제사를 드린다는 핑계로 은밀하게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그곳에 사는 이새와 그 아들들을 제사에 초청했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한 사람을 새로운 왕으로 선택하겠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습니다.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이새의 장남인 엘리압이 사무엘 앞에 나섰습니다. 사무엘은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다른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둘째 아들 아비나답과 셋째 아들 삼마도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일곱 명의 아들이 다 나왔지만 사무엘은 아직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에게 묻습니다.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대답합니다.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의 초청을 받고 형들은 모두 제사에 참석했는데 다윗은 그럴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물론 누군가 양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기도 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입장에서 볼 때 다윗은 나이도 어리고 형들과 비교해서도 부족한 게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사무엘은 이새에게 막내아들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왔습니다. 첫 인상을 성서기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사무엘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사무엘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서 기름을 다윗에게 부었습니다. 성서기자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은 묘사로 끝냅니다.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다윗과 여호와의 영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 크게 감동되었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다윗에게 그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사실 다윗은 왕이 될 만한 준비가 전혀 없었습니다. 형을 따라다니면서 양을 돌보기만 했습니다. 베들레헴에 큰 제사가 벌어진 그날도 다윗은 꼼짝 못하고 양만 돌보고 있다가 얼떨결에 끌려나와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습니다. 본문에도 다윗이 어떤 사명감이나 의지가 있었다는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사무엘만 주도적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런데도 성서기자는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었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꾸면 다윗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서기자의 진술은 옳은가요? 다윗은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살았나요? 다윗 전승을 아는 분들은 성서의 그런 진술에 동의하지 못할 겁니다. 다윗은 인격적이나, 판단력에서 실수도 많았고 문제도 많았습니다. 사울 왕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다윗은 이런저런 사연으로 사울의 부마가 되었고, 또 경호대장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다가 왕위를 찬탈했습니다. 사울과 다윗 사이에서 벌어진 왕권 투쟁 이야기가 오늘 본문 이후로 삼상 31장까지 자세하게 나옵니다.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서 그는 때로는 비열하게, 구차스럽게, 포악스럽게 행동했습니다. 물론 성서는 사울을 악한 왕으로, 다윗을 선한 왕으로 보고 있지만 그건 구약성서가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다윗 왕조의 관점으로 기술되어서 가능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다윗은 사울보다 나을 게 별로 없어 보입니다. 다윗은 자식 농사에도 실패했습니다. 왕자의 난도 반복되었습니다. 다윗의 왕위를 세습한 왕자가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솔로몬이었다는 사실은 다윗 왕조에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거기에 밧세바와 나단의 역할이 컸습니다. 다윗은 그런 문제를 지혜롭고도 과감하게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대충 그렇고 그렇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 그에게 그대로 나타납니다. 이런 부분들을 보면 다윗은 성령의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서기자의 진술은 틀린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영에게 감동된다는 것, 성령 충만을 경험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성령 경험을 주술적인 것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성령을 경험했다고 해서 삶의 모든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성령 경험은 예술 경험이나 문학 경험과 비슷한 현상입니다. 어떤 사람이 음악, 미술, 시에서 어떤 영감을 경험했다고 해서 무조건 창조적인 예술작품을 그리거나 시를 쓰지 못합니다. 그런 예술적 영감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 어떤 예술가도 그런 영감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서 영감이 사라지기도 하고 유지되기도 합니다. 성령을 경험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도 성령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서 성령이 사라지기도 하고, 유지되기도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령과의 소통이 단절되기도 하고 계속 열리기도 합니다. 성령의 뜨거움을 경험한 것으로 평생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어떤 신자들은 예수 영접의 확신이 있는데도 왜 자기에게 인간적인 한계가 자꾸 나타나는지 모르겠다고 걱정합니다. 믿음이 좋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사람들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조바심입니다. 소위 청교도 신앙이 이런 겁니다. 이런 문제를 청교도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이들이 소위 구원파입니다. 그들은 구원의 확신에만 매몰되기 때문에 자기 삶과 세상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습니다. 아무리 성령 경험이 뜨거웠다고 해도 여러분의 삶에는 끊임없는 시행착오가 일어날 겁니다. 다윗에게서 볼 수 있는 파렴치한 일들도 일어날 겁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낙심하기도 할 겁니다. 성령 경험이 우리의 모든 구체적인 인생 문제를 일시에 해결해주는 알라딘의 요술램프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과 세례 다윗의 기름 부음 받는 장면으로 다시 보십시오. 그것은 왕이 되는 의식입니다. 다윗은 아직 왕은 아닙니다. 일개 목동입니다. 자신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의식을 통해서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방향은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자기 삶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방향이 그것입니다. 다윗은 실수를 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했습니다. 성서기자들은 다윗의 그런 부분을 높이 샀습니다. 다윗의 기름 부음 받는 의식은 우리의 세례의식과 비슷합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신앙 내용을 의식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갑자기 새로워지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실수도 합니다. 그런 차원에만 머물러 있으면 세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세례의식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기점으로 자신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규정한다면 세례는 우리에게 결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 세례를 통해서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삶은 기본적으로 세례의 반복입니다.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창조적인 반복입니다. 세례 영성이 우리의 삶에서 점점 깊어진다는 뜻입니다. 성찬식을 반복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찬식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원초적 관계로 들어갑니다. 이런 신앙 형식을 단순히 종교적인 의례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오히려 생명의 리얼리티에 접촉하는 겁니다. 여러분의 전체 삶을 보십시오. 두 낱말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 그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이 세상에서 살다가, 어떤 식으로든 죽습니다. 약간의 차이는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좀더 넉넉하거나, 다른 사람보다 좀더 건강하게 살기도 하고, 좀더 오래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그 차이는 별개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런 삶과 죽음 자체에 관심을 있으신가요, 아니면 그것의 겉모양인 좀더 넉넉하거나 건강한 것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세례 영성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전자에 초점을 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사실에 영적인 촉수를 예민하게 맞추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이런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신가요? 이건 누구에게서 설명을 듣고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 설명은 약간의 도움이 될 뿐입니다. 자신의 삶이 스스로는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과 예수 사건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인식할 때가 세례 영성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전체 가르침이 바로 여기에 연루됩니다. 그 가르침을 몰라서가 문제가 아닙니다. 알지만 가슴에 와 닿지 않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그걸 제가 해결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성령만이 그런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이여, 우리에게 오소서.’ 하고 기도했던 교부들처럼 그 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었다는 성서기자의 이 진술은 다윗의 전체 인생이 끝난 뒤에 내려진 판단입니다. 문장만 본다면 다윗의 소년시절이 배경이지만 실제로는 역사가 많이 흐른 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성령이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우리 인생 전체를 조망해야만 확인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죽은 뒤에 어느 쪽으로 판단될 것 같습니까? 어느 쪽을 원하십니까? 우문인가요? 원하는 쪽을 선택하십시오. 그 선택이 실제 삶의 내용이 되도록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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