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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삼하23:13-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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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3가지 사랑과 축복의 길
사무엘하 23장 13-17절
< 하나님이 축복해주시는 사람 >
요새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가 소개팅을 시켜준다고 했을 때 나이에 따라 미혼 여성들의 반응이 다르다고 합니다. 10대 후반에는 자기에 제일인 줄 알고 해줄까 말까 망설이다가 나와줍니다. 20대 초반에는 아직도 환상에 빠져 외모와 키를 따지다가 못 이기는 척 나옵니다. 20대 후반에는 현실에 눈을 떠서 직장과 집안과 사람됨을 묻지만 결론은 항상 "예스!"입니다. 그러다가 30대 이상이 되면 너무 반가워서 울면서 메모지를 들고 만날 장소를 받아 적는다고 합니다.
드디어 소개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때 반응도 다릅니다. 10대 후반에는 애프터를 신청해주기만을 기다립니다. 20대 초반에는 은근슬쩍 핸드폰 번호를 적어주고 애교를 떱니다. 20대 후반에는 강제로 집에 데려가서 부모님께 인사를 시킵니다. 그러다가 30대 이상이 되면 그 동안 시집가려고 모아둔 통 장을 꺼내 보여준다고 합니다.
지난주에 이 유머를 보고 저는 "세월이 참 무섭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어도 금방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세월입니다. 우리의 미모, 우리의 재산, 우리의 힘도 세월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항상 "겸손하게 살자!"고 스스로 다짐해야 합니다. 사람은 대개 힘이 있으면 과시하고 싶은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 본능을 억제하고 주어진 힘을 겸손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만한 마음을 가지면 무슨 수단을 쓰시더라도 그 마음을 꺾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다음 장인 사무엘하 24장에는 다윗이 인구조사를 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인구조사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인구조사에는 "내가 이런 나라를 이뤘다!"는 과시욕이 담겨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잘못으로 나라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돌고 백성 7만 명이 죽습니다. 그때 다윗은 철저히 회개를 합니다. "주님! 백성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대신 저와 저의 가문을 치소서!"
그때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 가서 제단을 쌓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라우나에게 가서 "회개의 제단을 쌓으려고 하니 네 타작 마당을 팔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라우나는 다윗에게 기쁘게 타작 마당을 내어놓습니다. 그곳에서 회개의 제단을 쌓자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게 되었고, 훗날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게 됩니다.
아라우나는 온 나라에 화를 끼친 다윗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원망이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썼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타작 마당을 기쁘게 내어드리는 헌신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라우나처럼 남을 비판하는 시간은 최대한 줄이고 나를 드리는 시간은 최대한 늘리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축복하실까요?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축복하시고, 가진 것이 있어도 신앙이 변치 않고 가진 것이 없어도 신앙이 변치 않는 한결같은 사람을 축복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일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드릴 줄 아는 사람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아무리 이름 없는 들풀과 같은 존재일지라도 아라우나처럼 소중한 일에 자기의 것을 내어드릴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 행복한 사람을 통해서 세상은 변화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은 세워질 것입니다.
<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
오늘 본문에는 아라우나처럼 자기를 드려 헌신했던 세 명의 용사가 나옵니다. 그들은 요셉밧세벳(8절), 엘르아살(9절), 그리고 삼마(11절)로서, 그들은 다윗 진영을 이끌었던 으뜸 가는 세 명의 용사였습니다. 그들의 헌신적인 행위를 보면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랑이 무엇일까요? 저는 본문을 통해서 사랑을 3가지로 정의해 보았습니다.
1. 첫째, 사랑은 듣는 것입니다.
본문 14-15절을 보면 다윗이 참 철이 없어 보입니다. 자신의 군대가 산성에 있고, 블레셋 군대가 베들레헴 성에 있어 서로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데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먹고 싶다. 누가 나로 저 물을 마시게 할까?"고 하니 얼마나 철이 없는 행동입니까? 전시에 어렸을 때의 향수에 젖어서 리더가 그렇게 마음이 약해지면 어떻게 큰 인물이 되겠습니까?
그런 말은 부하들의 가십거리가 될만한 말입니다. 그러나 세 용사들은 "주군이 이상해졌어!"라고 가십거리로 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말을 마음속 깊이 들었습니다. 그처럼 누군가의 말을 잘 듣는 것이 바로 사랑의 기초입니다. 여러분! 리더의 허물을 보고 가십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허물을 덮으라고 나를 목자 곁에 두셨구나!"라고 생각하십시오.
목회자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잘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예배 후에 가끔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말씀 감사합니다." 그러면 저는 속으로 말합니다. "성도님! 말씀 잘 들어주어서 감사합니다." 요새는 말씀을 잘 전하는 목사님보다 말씀을 잘 듣는 성도님들이 더 훌륭해 보입니다. 그만큼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말씀을 잘 듣는 분들은 교회 일 부탁하기가 참 편합니다. "집사님! 이것 좀 해주실래요?" 그러면 다른 말없이 "네!" 하고 대답합니다. 천사표 교인입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첫째 이유는 기본적인 교양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이유는 공동체 생활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큰 이유는 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잘 듣는 것은 소중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가장 무서운 일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존경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병입니다. 성경을 볼 때 "내가 이만한 존재다!"라고 생각하면 성경은 침묵해버립니다. 더 이상 하나님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 그때부터 침묵하던 성경은 말합니다. 그때부터 성경이 하나님 말씀으로 들려지고, 다른 사람의 말도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남을 향해 돌을 던지면서 자기의 부족함을 모르는 교만이 문제입니다. 대개 보면 교만할 내용이 별로 없는 사람이 교만해지고,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사람이 남보고 말을 잘 안 듣는다고 말합니다. 심리학자들은 가장 결함이 많은 사람이 가장 많이 남을 비판한다고 말합니다. 또 보면 교만한 사람이 교만한 사람을 싫어합니다. 결국 말을 안 듣는 사람, 교만한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환영해주는 곳도 없고, 갈 곳도 없고, 기댈 곳도 없게 됩니다. 멀리 미국으로 이민 간다고 해도 눈물 흘려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듣지 않는 삶이 얼마나 불행한 삶입니까?
우리는 더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해력이 커집니다. 이해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지만 오해는 사단이 주는 마음입니다. 오늘날 왜 부부관계가 깨집니까? 대개 오해 때문입니다. 남편은 대개 아내의 가사 돌보는 일이 쉽다는 오해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은근히 "나는 이 고생을 하는데 낮잠만 자면서 웬 불평이냐?"고 생각합니다. 큰 오해입니다. 사실 가사처럼 생색이 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은 생색이 나는 일을 하는 것보다 몇 배 힘듭니다. 그런 점을 몰라주는 것도 일종의 교만이고, 사랑이 없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아내를 보면서 항상 속으로 "여보! 이렇게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속으로만 생각하십시오. 겉으로 그렇게 말하고 여전히 짜증을 잘 내면 인격을 의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생각한 대로 아내를 긍휼히 여기며 이해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반대로 아내가 "남편은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줘!"라고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말로 구구절절이 설명을 해도 이해가 안되는 것이 세상인데 마음까지 알아달라고 요구하고 불평하니 그것도 너무 이해가 없는 태도입니다. 남편이 신도 아닌데 어떻게 아내의 마음을 구석구석 다 알아줍니까? 그러므로 아내가 할 일은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남편의 마음을 알아주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부관계에서 가장 교만한 태도는 바로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줘!" 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런 말은 별로 문제가 없는 말처럼 들리지만 그 말은 "나만 옳다! 나는 당신 말을 안 듣겠다! 당신은 나만 이해하라! 나는 당신을 이해해주지 못하겠다!"는 무언의 폭력입니다. 그것은 진짜 가정폭력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줘!"라는 사단적인 생각은 철저히 버리고 "내가 좀더 들어주자! 내가 좀더 이해해주자!"라고 하는 성령의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처럼 서로가 들어줄 줄 아는 삶이 부부관계를 견고하게 만들어줍니다.
사랑은 듣는 것입니다. 조금 더 들어주십시오. 들어줄 줄 모르면 평생 가도 제대로 된 친구 하나 얻지 못합니다. 그런 분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도 힘듭니다. 사람의 마음도 얻지 못하면서 무슨 하나님의 마음을 얻겠습니까? 자기 의견만 주장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맨날 오해만 하고, 맨날 불평만 하다가 어려운 지경에 처합니다. 그러나 남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을 보십시오. 맨날 이해만 하고 맨날 감사만 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미성숙한 사람은 'No'라는 말을 많이 할 구실을 찾습니다. 그렇지만 성숙한 사람은 'Yes'라는 말을 많이 할 구실을 찾습니다. 자세히 보면 'No'라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No'라는 말을 받을 줄 아는 훈련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 '오냐 오냐' 하고 키우면 'Yes'를 받을 줄만 알고 'Yes'를 할 줄은 몰라 커서도 남의 말을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Yes'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스맨'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 '예스!" 하면서 남을 격려할 줄 아는 '예수맨'이 되라는 말입니다. 남의 처지를 이해해주고, 들어주고, 양보하면서 보다 큰 것을 얻는 삶이 바로 십자가의 삶입니다. 우리는 그런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2. 둘째, 사랑은 조용히 행동하는 것입니다.
세 명의 용사는 다윗의 말을 듣고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희생을 작정했습니다. 결국 이 세 명의 용사는 물을 구하러 사명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있는 아둘람 굴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약 50리 정도 됩니다. 왕복 100리 길을 오직 물을 얻기 위해서 적진으로 들어가는 이 세 명의 용사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진정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어리석을 정도로 사랑했습니다. 전혀 논리가 맞지 않을 정도로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조용히 실천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 사명이 무엇인지 그리고 헌신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명이라고 하면 이사야가 생각이 납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뜻을 알았을 때 "제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드셨을까요? 가끔 보면 어려운 일에 앞서 헌신을 다짐하며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해보죠." 그런 분들 보면 흥분이 됩니다. 너무 기쁘고 감동이 됩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말없이 헌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데 인터넷을 통해서 저의 필요와 기도제목을 알아차리고 헌신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인이 아닌데도 멀리서 우리 교인보다 더 신경을 써주는 분도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분의 헌신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 어느새 그분의 환한 얼굴이 기도 중에 영상으로 떠오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고 푸근해지는 것을 느끼며 온갖 목회의 시름과 스트레스가 다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처럼 조용한 헌신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의 세 용사도 "왕이여! 제가 한번 갖다 오겠습니다" 하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 아무리 다윗이 그 우물물을 먹고 싶어도 갖다오라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물을 얻으러 갑니다. 그 길은 죽음의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행동합니다. 그처럼 사랑은 조용히 행동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이처럼 조용히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영성이라는 말만 하고 영적이지 못하고 책임적이지 못한 성도가 아니라 조용히 행동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생활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참여자의 길이고, 또 하나는 방관자의 길입니다. 참여자의 길이 행복을 얻는 길이고, 은혜를 받는 길입니다. 들러리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야지 '신부의 들러리'가 되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교회생활에서 주인공이 되지는 못해도 중심 인물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교회를 좌지우지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 조용히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행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셋째, 사랑은 나의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세 용사는 목숨을 걸고 적진으로 들어가 우물물을 길어와서 다윗에게 드렸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드린 것은 우물물이 아니라 자기들의 목숨이었습니다. 그처럼 자기의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지 않고도 줄 수는 있지만 주는 것이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진실한 관계는 드리는 삶을 통해서 형성됩니다.
무엇인가 소중한 일에 내 마음을 드리면 이상하게도 내 영혼이 살아납니다. 내가 죽으면 내 육신이 살아나고 내가 속한 공동체가 살아납니다. 거목이 쓰러지면 산이 망할 것 같지만 그 쓰러진 것이 거름이 되어 작은 나무들이 더 많이 생기게 됩니다. 교회도 부흥하려면 자신을 드릴 줄 아는 거목들이 많아야 합니다.
취하는 삶은 갈증을 더하지만 바치는 삶은 영혼을 풍성하게 만듭니다. 취하는 삶은 내가 주인인 줄 아는 삶입니다. 그러나 바치는 삶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아는 삶입니다. 취하는 삶에는 눈물이 나오게 되지만 바치는 삶에는 노래가 나오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저주받은 삶은 '취할 기회'만 있고 '바칠 기회'는 없는 삶입니다.
가끔 부부간에 서로 더 달라고, 서로 더 취하려고 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인류 중에서 그 사람이 내 남편이 되어주고, 내 아내가 되어준 것을 생각하면 몸 전체를 다 준 것인데 더 달라고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제는 서로 줄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가 구원받은 것만 해도 우리는 다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더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더 받으려고만 하고 취하려고만 하면 그것이 불행의 길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더 드릴 일만 있을 뿐입니다.
목회하면서 제일 감동될 때가 있습니다. 아주 어려운 사람이 물질적 헌신을 할 때입니다. 그때는 온 몸과 마음이 떨리면서 기도가 나옵니다. 그것은 피눈물입니다. 그것은 생명입니다. 그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그런 분들에게 저는 갚을 길이 없지만 하나님은 그분들에게 영혼의 자유를 주실 것입니다. 그처럼 좀더 덜 누리고, 좀더 덜 쓰고 살기로 작정하면 영혼의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시성 타고르는 "바람이 불어 배 안의 등불이 꺼지니 뱃전에 달빛이 차더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가 세상 욕심을 버릴 때 행복이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자기에게 자그만 힘이라도 주어질 때 그 힘으로 다른 사람을 주눅들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살아갈 힘을 주는 사람이 진정으로 영혼의 만족의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인 중에는 예배와 기도에는 강한데 나누는 일에는 국물도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는 사람은 절대로 인색하고 까다로운 사람들이 되면 안됩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은 세상을 너무 몰라요!"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몰라도 주님의 뜻은 알고 있습니다. 그 주님의 뜻을 실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 받기를 원한다면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양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축복 받을 생각도 안 해도 하나님께서는 큰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이제 나누는 일을 더 많이 하십시오. 우리가 소중한 일을 위해 호주머니를 비울 때 그 빈 호주머니에 하나님은 더욱 풍성한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이웃의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도 많이 나누십시오. 우리 주위에 어려운 분들이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너그럽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드리고는 싶은데 여건이 안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드리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방법과 길은 반드시 하나님이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 위대한 이해력을 가진 분들이 되십시오 >
세 명이 용사가 가져다 준 우물물을 받고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그 엄청난 헌신을 보고 다윗은 이기적인 감성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어리석은 욕망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원했던 것, 그처럼 소중한 물을 전혀 마시지 않고 하나님께 부어드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이 물은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갔던 사람들의 피입니다. 제가 도저히 마실 수가 없습니다."
이 점이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그는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부하들이 보면서 얼마나 감동이 되겠습니까? 그 순간 그들의 사기는 더욱 충천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해서 그들은 더욱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치게 되었고 결국 나라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정치인들이나 지도자들에게 있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분들이 성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정책 결정을 하는데 완벽하기를 기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원하는 것은 사심 없이 국민들을 위하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그 잘못을 시인하고 근신하는 모습입니다. 한 가지 잘못을 시인하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다 물어뜯는 사람들 때문에 시인이 힘들겠지만 그래도 잘못에 대해 진지하게 용서를 구하면 대다수 국민들은 용서에 인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용기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고, 사실 우리 자신이 다 그런 존재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렸을 때 다윗의 갈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깨끗이 해소되었을 것입니다. 헌신은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는 촉매제입니다. 다윗도 위대한 사람이지만 세 용사도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하였더라." 이 세 용사는 헌신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고, 누군가의 필요에 반응할 수 있는 위대한 이해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위대한 이해력이 넘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화요일 교회 이전 장소 계약을 했습니다. 계약금을 치르고 나니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룬 부부처럼 마음이 설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설움이 설렘으로 변화된 줄 믿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앞으로 필요한 것들을 생각할 때 남모르는 부담감이 저의 영혼에 저며옵니다. 상세하게 얘기하지 않아도 교회 이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여러분들도 알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통해 작은 은혜가 주어져서 감사하다면 이번에 주님의 몸된 전을 위해 저와 함께 조금이라도 부담을 나누어지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일어서야 할 때입니다. 서로 더욱 격려해야 할 때입니다. 모두 일체감을 가지고 함께 이 일에 심취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소리 없는 헌신을 기대합니다. 다윗의 세 용사처럼 목자의 필요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위대한 이해력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세워진지 처음으로 맞이하는 헌신의 장을 지나면서 여러분들의 신앙의 차원이 한 차원 높아지고, 잃었던 활력을 다시 한번 찾고, 다시 한번 헌신을 통해 주어지는 영혼의 새로움을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전을 세우는 하늘 나라의 거룩한 기초석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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