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신춘문예 › [2000대한매일] 흥, 썩은 감자잖아! -

이환제 | 2005.02.24 23:55:54 | 메뉴 건너뛰기 쓰기
2000년 대한매일 신춘문예 당선동화

아직 바람이 매운 이른 봄날입니다. 어느 집인가 주방 쪽으로 난 쪽창이 열리더니 무언가 동그란 것이 이쪽으로 날아왔습니다. 나무들이 군데군데 서 있는 잔디밭에 툭 떨어진 그것은 데굴데굴 굴러와 팥배나무 아래에 멈추었습니다. 어린아이 주먹만한 것입니다. 그것이 날아온 곳은 팥배나무가 서 있는 맞은편아파트 맨 아래층이었습니다.

´이게 무엇일까? 꼭 돌멩이 같네.´
팥배나무는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았습니다.
‘ …감자구나.’
혼잣말을 하다가 안타까운 듯 혀를 찼지요.
“쯧, 감자가 썩었네!”
그렇습니다 팥배나무가 본 대로 그것은 썩은 감자입니다. 감자는 한쪽 귀퉁이가 이미 엄지발톱 만큼 시커멓게 썩어 있었습니다.
감자를 쪽창으로 던진 아주머니는 된장찌개에 넣을 감자를 깎다가 썩은 감자를 발견한 것입니다. 한참 감자를 들고 고민하다 차라리 푹 썩어 팥배나무의 거름이나 되라고 버린 것입니다.

감자는 으슬으슬 추워 오기 시작했습니다. 아파트 다용도실에 있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오게 되었으니 추울 수 밖에요. 한참 떨고 있는데 머리가 하얀 할머니 한 분이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할머니!”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는지 할머니는 그대로 감자를 지나쳐 갔습니다. 뭐라뭐라 연신 중얼거리며 아주 빠른 걸음으로요.
“할머니이! 할머니이!”
감자는 다시 큰소리로 불렀습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점점 멀어지는 할머니의 등에는 책가방 같은 조그만 배낭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날 좀 흙 속에 묻어 달라고 할랬더니….그러면 춥지도 않을텐데. 아직 썩지 않은 내 몸 이쪽에선 싹이 나오려고 근질거리는데….쳇, 귀머거리 할머닌가!”
감자는 할머니를 원망하며 투덜거렸습니다.
“할머니는 귀가 어둡단다.”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은 팥배나무가 말했습니다. 감자는 고개를 들어 팥배나무를 올려다 보았습니다. 팥배나무 가지에는 팥알만한 붉은 열매가 아직도 다닥다닥 붙어 있었습니다. 그 열매는 하얀 팥배나무 꽃이 필 무렵까지 그대로 매달려 있을 것입니다.
팥배나무가 타이르듯 말을 이었습니다.
“너무 원망하지 마라. 할머니는 아주 큰 소리도 못 듣거든.”
“그렇군요 .어쩐지 이상했어요.”
“미안하구나. 내가 너를 흙 속에 묻어 주었으면 좋겠는데.”
“고마워요, 팥배나무 아저씨. 하지만 아저씨는 허리를 구부릴 수가 없잖아요.그런데 할머니가 뭐라고 중얼거리며 간 것이지요?”
감자가 물었습니다.
“글쎄다? 나도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고, 날이면 날마다 온종일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닌단다. 사람들은 그런 할머니를 보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쑥덕거리지. 노망이 들었다는 둥,미쳤다는 둥.”
“가엾은 할머니군요. 아무도 할머니를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하겠네요?”
“그래, 누구든 그러지. 할머니가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이리저리 돌아 다니는 것은, 사람들이 멀리하니까 외로워서 그러는 것 같구나.”
“외로워서요?”
“사람들은 외로우면, 말이 아주 많아지거나 반대로 말수가 줄거든. 아까 그 할머니는, 사람들한테 따돌림까지 받으니 얼마나 외롭겠니? 그렇지 않아도 늙으면 외로운 법인데….”
팥배나무의 말을 듣고 나니 감자는 조금 전 투덜거린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감자는 문득 할머니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한 가지 더 생겼습니다.
“아저씨, 할머니가 메고 있던 배낭에는 무엇이 들어 있나요?”
팥배나무는 빙그레 웃더니 말했습니다.
“배낭 속엔 말이지, 재미있는 것들이 많이 들어 있단다. 할머니가 가끔 내 그늘 아래서 쉬어 갈 때가 있거든. 나는 그때 들여다보아서 잘 알지.”
“무엇이 있는데요?”
“알록달록한 헝겊 조각이나 색종이, 헌 구두도 있지. 빈 깡통과 병 뚜껑도 여러 개나 들어 있더구나 .참, 부서진 장난감도 있고.”
“이상하네요? 그런 걸 뭐하러 넣어 가지고 다니지요?”
“사람들이 할머니한테 손가락질하는 이유가 무엇인 줄 아니? 바로 배낭에 그런 것들을 담아 가지고 다니기 때문이란다.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것도 그렇고.”
저쪽을 보니까 빗자루를 어깨에 멘 어떤 아저씨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습니다.작업복을 입은 아파트 관리인이었습니다.
“아저씨이! 아저씨이!”
감자는 할머니를 부를 때처럼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러나 관리인 아저씨는그냥 가던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감자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지요.
감자는 혹시 이쪽으로 오는 사람이 없을까 살펴보며 무작정 기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팥배나무가 있는 곳은 아파트 단지 안에서 가장 외진 곳이기 때문입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감자는 너무 추웠습니다. 낮에는 그런대로 견딜 만했는데 이젠 정말 참기 힘들 정도였지요. 감자는 동그란 몸을 더욱 동그랗게 웅크려 추위를 막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발자국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습니다. 감자는 두리번 두리번 주위를 살펴보았습니다 .희미한 방범등 밑을 지나 살금살금 이쪽으로 기어 오고 있는 것은 시궁쥐였습니다.
“시궁쥐야,날 좀 흙 속에 묻어 줄래?”
감자는 시궁쥐가 가까이 다가오자 말했습니다. 시궁쥐가 단추구멍 같은 조그만 눈으로 감자를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따뜻한 흙 속에 묻어 줘.밤이 되니까 너무 춥거든.”
감자가 다시 말했습니다. 시궁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킁킁 콧소리를 내며 콧등으로 감자를 이리저리 굴려 봅니다. 냄새를 맡아보는 것이지요. 그러다가시궁쥐는 홱 돌아서서 콧방귀를 뀌며 입을 열었습니다.
“흥, 썩었잖아! 재수없게 썩은 감자가 뭐야 ! 냠냠, 어디 가야 맛있는 걸 훔쳐먹을 수 있나?”
“그러지 말고 날 묻어 줘.이것 좀 봐, 내 몸 이쪽에선 벌써 싹이 나오려고 하거든.”
“뭐어? 싹이 나오려고 한다고? 썩어서 냄새나 풍기는 것이, 흥! 맛있는 빵 덩어리인 줄 알았더니 괜히 헛수고 했잖아!”
시궁쥐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매몰차게 돌아섰습니다.
“하여튼 하수구만 벗어나면 재수없는 일투성이라니까. 아까는 고양이한테 찍 소리도 못하고 죽을 뻔했는데 ,이젠 썩은 감자가 귀찮게 구네. 나 같은 시궁쥐는 역시 안전한 하수구가 최고야. 먹을 것이 없어 배가 좀 고픈 것하고, 냄새 나는 게 흠이긴 하지만.”
젖은 몸을 이끌고 시궁쥐는 하수구 쪽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내가 흙 속에 너를 묻어 줄 수만 있으면 참 좋을텐데.”
어둠 속에서 팥배나무가 하는 소리입니다. 낮에 했던 것처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습니다.
“말만 들어도 언 몸이 조금 풀리네요. 시궁쥐는 왜 저렇게 이기적이고 얌체같지요? 내가 썩지 않았다면 벌써 시궁쥐 뱃속에 들어 있을 거예요.”

해가 떠오르자 밤새 얼었던 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팥배나무는 감자가 햇볕을 조금이라도 더 쬘 수 있게 가지를 들어 그늘을 걷어 냈습니다. 그런 팥배나무가 감자는 너무 고마웠습니다.
커다란 새 한 마리가 팥배나무 가지에 내려 앉았습니다. 아파트 옥상에 둥지를 튼 황조롱이였습니다 먹을 것을 찾아 하늘을 날다 잠깐 쉬려고 내려온 것입니다.
“황조롱이야, 흙 속에 날 좀 묻어 줘. 밤이 되면 너무너무 추워. 또 내 몸에선 새로 싹이 돋아 나려고 하거든.”
황조롱이는 아무 대꾸가 없습니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거만하게 감자를 내려다볼 뿐이었습니다.
“자, 여기.이것 좀 봐. 이쪽에서 싹이 돋으려 한다고. 이대로 있으면 난 그냥 썩어 버리고 말거야. 흙 속에 있어야 뿌리도 튼튼히 내리고….”
감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조롱이가 입을 열었습니다. 시궁쥐처럼 콧방귀를 뀌며.
“썩은 감자잖아, 흥! 세상엔 웃기는 일도 많아. 썩은 감자 주제에 싹이 나오려고 한다고! 저게 쥐라면 냉큼 잡아 먹을텐데. 아이 배고파! 시궁쥐·곰쥐·새앙쥐·들쥐. 쩝쩝,쩝. 쥐가 제일 맛있는 밥인데, 요즘은 도둑고양이들 극성이 보통이 아니란 말이야. 녀석들 때문에 쥐들이 씨가 마르고 있어. 젠장, 씨가 마른다고.”
황조롱이는 푸드덕 날개짓을 하며 하늘로 날아 올랐습니다. 그러자 팥배나무를 올려다 보며 감자가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황조롱이는 왜 저렇게 거만하고 무섭지요? 내가 쥐였다면, 나는 벌써 황조롱이한테 잡아먹히고 말았을 거예요.”

황조롱이가 다녀간 한참 뒤 팥배나무에 참새들이 몰려왔습니다. 수다떠는 데에 정신이 없는 참새들에게도 감자는 똑같은 부탁을 했습니다.
“흥! 썩은 감자구나! 얘,우리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니!”
“그런 한가한 시간이 있으면, 친구들하고 재미있는 얘기나 더 하겠다, 흥! 흥!”
참새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톡톡 쏘아붙이고서 어디론가 포르릉 포르릉 바쁘게 날아갔습니다.
어제 그 할머니가 다시 보인 것은, 아파트 지붕 너머로 붉은 해가 사라진 저물녘입니다.
감자는 있는 힘을 다해 어제처럼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귀가 어두우니 못 들을 게 뻔하지만 최선을 다 해보고 싶었습니다. 놀랍게도 할머니는 배낭을 내려놓고 감자 옆에 앉았습니다.
감자가 하는 소리를 들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지나는 길에 그냥 팥배나무 아래에서 좀 쉬어가려던 참이었지요.
앉아서도 쉼없이 중얼거리던 할머니는 우연히 감자를 발견하고 문득 중얼거리는 소리를 멈추었습니다. 이어 배낭 속에서 부서진 장난감 조각을 꺼내더니, 다시 뭐라뭐라 중얼거리며 장난감 조각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감자를 땅에 묻은 할머니는, 팥배나무 아래를 벗어나 어제처럼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습니다.

어느덧 여름이 되었습니다. 굵은 감자대에는 잔줄기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줄기 끝에 자주색 감자꽃들이 예쁘게 피어났습니다. 튼튼한 뿌리에는 어른 주먹만한 감자가 일곱 개나 달려 있었습니다.
그동안 팥배나무는 잎이 무성한 가지를 이리저리 들어 올려 주었습니다. 감자잎이 햇빛을 더 많이 받게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팥배나무 덕에 감자는 더욱 크게 된 것이지요
관리인 아저씨가 보인 것은 비가 온 다음날입니다. 아저씨는 빗자루 대신 낫을 들고 있었습니다. 무성하게 자란 잔디와 풀을 베려고 온 것입니다.
아저씨는 한쪽 구석에서부터 빠르게 이쪽으로 낫질을 해오기 시작 했습니다.감자는 꽃눈을 통하여 시퍼렇게 날이 선 낫을 본 순간, 입이 얼어 붙어 아무소리도 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무서움을 참기 위해 감자는 질끈 눈을 감아 버렸습니다. 순간, 낫질하는 소리가 멈추더니 아저씨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게 웬 감자꽃이람! 틀림없이 감자꽃인데, 감자가 어떻게 여기에 뿌리를 내리게 됐지? 줄기가 이렇게 실한 걸 보면 커다란 감자가 아주 많이 달려 있겠는걸…. 감자를 캐려면 아직 20일은 더 있어야겠고 그동안 내가 잘 가꾸어 보자.”
아저씨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감자를 캐면 모두 잘 두었다가, 봄이 오면 관리실 앞 텃밭에 다시 심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아저씨는 곁에 누가 있기라도 한 듯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내년 여름에는, 텃밭이 감자꽃으로 환해지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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