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신춘문예 › [2001조선일보] 나무의자의 마지막 손님 -

이수애 | 2005.04.04 16:51:45 | 메뉴 건너뛰기 쓰기
2001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작품

산골 학교의 텅 빈 운동장에는 어둠이 내려와 길게 누워 버렸습니다. 그 위로 자장가 같은 달빛이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늙은 나무의자는 쉬이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가, 혼잣말을 해 봅니다.

-삐그덕 삐이-

의자는 반쯤 남은 어깨를 차가운 벽에 기댔습니다. 교실에 있을 때가 행복했지. 냄새나고 축축한 습기가 내 몸에 곰팡이를 만들었지만. 의자는 저만치 돌계단 아래에 있는 한 교실을 내려다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단잠을 잤던 구석 자리엔 앙증스런 탁자가 노오란 국화를 한아름 받치고 서 있습니다.

-삐이이-

의자는 어깨가 시려 오자 벽에서 조금 떨어졌습니다.

“에이,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있나!”

“교실 생각에 잠을 못 이루는가 본데 그런 꿈일랑 아예 꾸지 마오.”

여기저기서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늙은 나무의자는 창고 안을 휘 둘러봅니다.

좁은 창고 안에는 자신과 닮은꼴을 한 의자며 책상들이 뒤엉켜 누워 있습니다.

“아, 아니오. 애들 생각이 좀 나서…….”

늙은 의자는 혼자생각을 들킨 것 같아 엉겁결에 대꾸를 했지만 말꼬리를 흐리고 맙니다.

“흥, 교실? 애들? 난 지긋지긋 해요. 툭하면 칼로 내 몸을 도려내지 않나, 발길질을 않나, 무릎에 올라와 뜀박질을 않나, 좀 얌전히 나를 대해 주었으면 이렇게 일찍 창고에 들어오지 않았을 거예요.”

다리를 모두 잃어버린 책상 하나가 바닥에 웅크리고 있다가 앙칼지게 쏘아붙입니다.

“그래도 난 꼭 한 번만 내 무릎에 아이들을 앉히고 싶다네. 죽기 전에…….˝

늙은 나무의자는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속내를 털어놓습니다.

“참, 할아버지도 불쏘시개감이면 모를까, 한 번 이곳에 들어오면 절대로 나갈 수가 없어요.”

딱하다는 듯 아까의 앉은뱅이 책상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불쏘시개라, 아이들의 향기로운 땀 냄새를 한 번 더 맡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지. 그제서야 늙은 나무의자는 가벼운 마음이 되어 꿈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밤, 학교 뒷산에는 잠 없는 바람이 도토리밤나무에 매달려 밤새도록 놀다 갑니다.

“아니, 이게 뭐야?”

“밤이잖아, 도토리밤!”

늙은 나무의자는 창고 앞에서 나는 소리에 늦잠을 깨고 맙니다. 벌써 해가 높이 떠올라 이마를 비추고 있습니다. 남자아이 둘이서 조그만 밤송이를 신기한 듯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 속에는 통통한 밤이 이슬을 달고 들어 있습니다.

“도토리밤?”

“그래. 크기는 요렇게 작아도 맛은 얼마나 좋다구! 우리 엄마가 그러셨어.”

“그럼, 우리 뒷산으로 도토리밤 주우러 갈까?”

“나무가 높을 텐데…….”

“저어기-”

한 아이의 손가락이 창고 맨 앞에 나와 있는 늙은 나무의자를 가리킵니다. 곧 아이들은 돌계단을 올라왔고, 늙은 의자를 가볍게 들어올립니다. 아, 안 돼, 난 아직 할 일이 있단 말이야! 그러나 아이들은 무심한 얼굴로 산기슭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창고 안의 웅성거림이 멀어지는 듯 싶더니 어느 사이 밤나무 밑에 와 있습니다. 아이들은 의자 위에 올라가 펄쩍펄쩍 뛰며 밤나무 가지를 잡아챕니다. 그 때마다 늙은 나무의자는 온몸이 부서지는 듯했습니다. 아구구구, 그만, 그만해. 그러나 아이들은 밤털이에만 열심입니다. 참다 못한 늙은 나무의자는 퍽 쓰러지고 맙니다.

의자에 올라섰던 아이가 비탈 아래로 굴러 떨어집니다. 아이의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도토리밤도 뒤따라 떼구르르 굴러갑니다. 남은 한 아이도 엉덩방아를 찧으며 허위허위 산비탈을 쫓아 내려갑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한 겹 어둠이 이불처럼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늙은 나무의자는 덤불에 박힌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봅니다. 창고에서 보았던 앉은뱅이 책상처럼 두 다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또다시 깜빡 정신을 잃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는지 모릅니다. 눈을 떠보니 까만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합니다.

“별님, 제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꼭 한 번 제 무릎에 아이를 앉혀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리가 못 쓰게 되어 버렸군요.”

별들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네, 저도 알아요. 이제 의자가 아니라는 것을요. 하지만 불쏘시개라도 되어서 아이들 곁에서 죽고 싶어요. 그것도 욕심일까요, 별님?”

밤안개 때문인지 늙은 나무의자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집니다.

“이 밤중에 누가 울고 있나요?”

늙은 나무의자는 덤불 위를 바라봅니다. 그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잘못 들었나, 하긴 이 밤에 누가 있다고, 늙은 나무의자는 갑자기 쓸쓸해집니다.

“난 바람이에요, 조용한 밤 숲이 좋아서 놀러온 것이랍니다.”

“나, 난 나무의자요, 그런데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니라오.”

바람은 늙은 나무의자를 부드럽게 감싸 바로 앉히려고 애를 씁니다.

“다리가 부러져서 앉아 있을 수가 없다오.”

바람의 품에서 삐그덕거리며 늙은 나무의자는 마지막 소원을 말했습니다.

“내게는 할아버지를 들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아직 없어요. 우리 바람은 겨울이 되어야 힘이 세진답니다. 그렇지만…….”

바람이 늙은 나무의자를 기우뚱거리며 들어올립니다.

늙은 나무의자의 마음은 어느새 산 아래 교실에 가 있습니다. 그 곰살맞은 손길이라니, 꼭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았다니까. 목마도 많이 태웠지, 그 바람에 어깨가 부러져 교실 뒷구석으로 물러나야 했지만. 나무의자는 반들반들해진 무릎을 보며 행복한 꿈 속을 오르내립니다.

그 때였습니다.

-휘이익, 휘이-

“앗, 갈퀴바람이다!”

바람의 외마디 외침이 들리는가 싶더니, 의자의 몸이 빙그르르 맴을 돕니다.

“으아아!”

의자는 밑으로 밑으로 떨어집니다. 그리고 쿡!

늙은 나무의자가 떨어진 곳은 깊은 골짜기였습니다. 사람의 발길이 닿을세라 잔뜩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너무 멀리 왔구나, 늙은 나무의자는 아득해집니다. 골짜기 아래로 희뿌윰한 새벽이 툭 떨어집니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뒤늦게 달려온 바람이 늙은 나무의자의 어깨를 흔들었습니다.

“으음, 무릎이 좀……. 이젠 마지막 소원도 까마득해졌다오.”

늙은 나무의자가 힘없이 말했습니다.

“겨울이 되면 아이를 이 곳으로 데려올게요. 약속해요.”

바람이 늙은 나무의자의 무릎에 가랑잎을 가만가만 덮어 줍니다.

“허허허, 아직 모르는 것 같소. 아이들은 겨울 바람을 무서워한다오.”

“두고 보세요, 꼭 데려올 테니까요!”

바람이 의자의 코앞에 머리를 바싹 디밀고 다짐하듯 말합니다.

“그만 두오. 그렇게 데려온 아이는 내 모습을 보면 더 멀리 달아날 거요.”

그러나 바람은 골짜기를 쌩하니 빠져나갑니다.

바람이 빠져나간 골짜기는 조용합니다. 늙은 나무의자는 목마를 태우던 때가 문득 그리워집니다. 몸을 조금 움직여 봅니다.

-삐이이-

어디선가 폴짝 튀어나온 개구리 한 마리가 늙은 나무의자에 앉아 긴 하품을 합니다.

늙은 나무의자는 개구리를 슬쩍 밀어냅니다. 어서 겨울잠을 자러 가렴. 따스한 봄날이 돌아오면 내 무릎에 앉혀 주마. 늙은 의자는 개구리가 낙엽더미 속으로 엉금엉금 기어드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바로 옆에서는 얼룩다람쥐가 겨울 양식을 숨기기 위해 열심히 땅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삐-

의자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고는 마을로 내려간 바람을 기다립니다.

너무 무섭게 달려들진 말아야 할 텐데. 가만 있자, 술래잡기하는 법을 가르쳐 줄 걸 그랬나, 날이 갈수록 늙은 나무의자의 머릿속은 아이들로 복작댑니다. 가끔씩 그 아이들은 서로 나무의자의 무릎에 앉겠다고 주먹다짐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늙은 의자가 눈을 떠보면 부지런한 다람쥐가 퍼 올린 낙엽더미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얼마 안 가 얼룩다람쥐마저도 감쪽같이 먹이를 숨기고 어딘가로 떠났습니다. 늙은 나무의자는 차갑고 긴 잠 속으로 빠져듭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아주 작은 풀씨 하나가 공중을 천천히 맴돌다가 내려앉습니다. 가끔씩 바람이 풀씨 위에 살진 흙들을 덮어 주고 마을로 되돌아가곤 하였습니다.

골짜기를 오르내리는 바람의 입끝이 제법 매워졌습니다. 산짐승들은 모두 겨울잠에 들었습니다. 함박눈이 자주 찾아와 늙은 나무의자의 어깨 위에 솜이불을 덮어 주고 갔습니다.

바람은 바삐 산골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먼 곳에서 바람이 오는 소리만 들려도 집안으로 들어가 꼭꼭 숨어 버렸습니다. 바람은 요란한 소리로 아이들을 불러냈지만 아이들은 머리카락 하나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골짜기로 다시 돌아온 바람은 겨울 내내 잠든 늙은 나무의자 곁을 지켰습니다. 아이들 꿈을 꾸는지 의자는 자주 무릎을 들썩였습니다.

많은 날들이 지났습니다. 늙은 나무의자를 돌보느라 지친 바람도 어느덧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여기저기서 꽃망울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화들짝 깨어난 바람은 늙은 나무의자를 가만가만 흔들었습니다. 그러나 깊이 잠이 들었는지 늙은 나무의자는 쉽게 눈을 뜨지 못합니다. 바람은 보드라운 입김을 의자에게 불어넣습니다.

“할아버지, 눈을 떠 보세요!”

그래도 늙은 나무의자는 아무런 기척이 없습니다.

“눈을 떠 보세요, 할아버지! 할아버지 무릎에, 무릎에…….”

바람이 울먹이며 나무의자를 세차게 흔듭니다.

늙은 나무의자는 있는 힘을 다해 눈을 뜹니다.

“너로구나, 내 무릎에 마지막으로 앉은 아이가…….”

무릎 위에는 조그만 싹이 고개를 뾰족 내밀고 있습니다.

늙은 나무의자는 스르르 눈을 감습니다.

신이 난 바람은 아지랑이를 타고 다니며 골짜기 가득 따스한 입김을 불어넣습니다.

멀리서 산을 올라오는 아이들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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