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한희철 › 477.싹

한희철 | 2002.01.02 21:19:1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한희철477.싹


교회 주위 몇 곳에 수세미 씨를 뿌렸다. 지난해 안 집사님네에서 얻은 수세미를 잘 말렸다가 올 봄 씨를 뿌린 것이다. 잘 올리면 보기에도 좋고 어른 팔뚝만큼 크고 긴 수세미를 단강 찾는 이들에게 선물로 전 한다면 그것도 즐거움이리란 기대에서였다.
한동안 뜸을 들이더니 넓적한 잎새들 펴며 싹이 나왔다. 땅 상태에 따라 이르고 더딘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가 싹으로 돋아났다.
크고 작은 돌멩이에 개똥이 가득한 교회 옆 작은 터에 열무와 상추씨를 뿌렸다. 소리, 규민이, 아내 온 식구가 괭이들고 호미들고 나가 돌멩이를 치우고 풀을 뽑고 지렁이 꿈틀대는 거름을 펴선 고랑을 낸 후 닭 모이 주듯 씨를 뿌려 흙을 덮었다. 손에 묻는 개똥도 괜찮았다.
이틀 뒤에 싹이났다. 연초록빛 말간 싹들이 옹기종기 피어 올랐다. 얼마 후엔 솎아 줘야 할게고 또 얼마 후엔 시원한 김치로, 상큼한 상치로  밥상에 오를 것이다.
짐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는 교회 창고를 정리했다. 짓기로는 유아실로, 결혼식 있으면 신부대기실 쯤으로 생각하고 지었지만 실제로는 창고로 쓰이고 있는 곳이다. 짐들을 정리하고 책상을 들여놓았다.
좁기도 하고 특이한 냄새가 나기도 하지만 그런대로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엔 좋은 자리가 되었다. 지 집사님네서 전해준 고구마 중 그 중 큰 놈을 골라 반을 자른 후 접시에 물을 담아 놓아두었다. 어디서나 살아 있는 것을 본다는 것은 적지 않은 버팀목이잖은가.
눈이 있나 보라고 몇 번 아내가 그랬지만 마침내 쑥쑥 싹들이 돋아났다. 산봉우리에 나무 덮인 듯 곳곳에 힘찬 싹들이 솟아올랐다.
살아있는 것은 언제라도 싹을 낸다. 작은 씨라도 아무리 어려운 조건이라도 싹으로 돋아난다.  생명은 그렇게 강인하고 순결한 것이다.
그 힘을 믿고 싶다.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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