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인터넷전도편지 › 기독교가 배타적인 이유

최용우 | 2008.10.30 11:42:13 | 메뉴 건너뛰기 쓰기
불교는 인간의 곤경이 죄보다는 고(苦)에 있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고난의 뿌리라고 보는 욕(欲)에 있는 것으로 가르친다.
그러기에 스스로의 노력(참선이나 수도)에 의해 욕망을 없애는 것을 통해서만 해방될 수가 있다.
불교에서는 하나님도 구세주도 구원도 없다.
"쉬지 말고 노력하라."는 것이 부처가 죽기 전 그의 제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철학적 힌두교는 우리의 문제가 '마야'(maya)에 있다고 본다. 이는 시공간적 경험이라는 '환상'으로 이해된다. 대중적 힌두교는 '카르마'(karma) 곧, 환생을 통한 응보라는 교리를 가르친다.
각 사람은 자기 자신의 악행의 열매를 먹어야 한다. 끝없는 윤회(samsara)로부터 용서받아 벗어나는 길은 없다. 단지 개인적 존재가 소멸되어 신적 실체로 흡수되는 것을 포함하는 '열반'(Nirvana)이라는 최종적 해방만 있다.

회교에서는 분명 하나님(알라)의 자비를 선포한다.
코란 114장은 '동정심 많고 자비로운 알라의 이름으로'시작하나 자세히 보면 그것은, 공적이 있는 사람들,기도하는 사람들 구제금을 내는 사람들, 라마단(Ramadan)때 금식하는 사람들에게만 자비로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다른 죄인들에게는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외에는 아무런 메시지도 주어져 있지 않다.

일본의 도요히코 가가와는 기독교의 유일성을 발견했다.
"나는 여행하는 순례자였다. 나는 지쳐 있었다.
인생이라는 반환점이 없는 길을따라 여행하는 순례자였다.
비극이 두텁게 깔린, 어둡고 음침한 세상을 방황하고 있었다.
불교는 대자대비를 가르친다. 나는 모든 종교에 대해 감사한다.
그러나.... 태고 이래 그 누가... '이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해 뿌리는
나의 언약의 피..'라고 단언한 사람이 있었던가?"

심지어 부활하신 주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두 세명이라도 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일때
'나도 너희중에 함께 있느니라'고 말씀하신다. 뿐 아니라 그분은 우리가 모든 족속으로 제자로 삼기위해 나갈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그의 약속을 반복하여 확실히 하시고 계신다.
이것은 기독교만의 유일한 것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이같은 약속을 하지 못했다.

불교도들은 부처와 교제한다고 주장하지 못하며, 유교도들은 공자와, 회교도들은 모하멧을, 마르크스 주의자들은 칼 마르크스와 교제함으로 알거나, 실제로 함께 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못한다.

주예수만이 다시 살아나신 분이시며, 우리의 구세주이신 까닭이다.
신자와, 신자가 믿는 대상, 상호간의 친밀하고 개인적인 사랑과 신뢰와 교제와 약속의 관계..이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다른 종교에는 이에 비길 만한 것이 없다. 이런 사실은 수천년전의 과거의 무수한 기록에서 뿐만 아니라. 지금도 무수한 성도들을 증언을 통해 생생히 증거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직 한 길!, 오직 한 이름!, 오직 한 하나님!,
오직 한 주님!, 오직 한 중보자! 가 있을 뿐이다.
이런 성경의 주장은 배타적인 주장임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절대, 진리라면 배타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은 필연이다.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에 있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의 성경과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회교, 코란의 주장이.. 둘 다 모두 사실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이나, 절대진리에 있어서는 하나가 참이면 하나는 거짓이다.

"진정으로 유일한 것은, 보편적인 중요성을 가지며 보편적으로 알려져야 한다.
유일한 사건(십자가 사건)이 없다면 보편성은 없다. 따라서 유일성은 보편성과 한데 결합되어 있다고 비서트 후프트는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세주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에서나 그분을 선포할 책임이 있다고..."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존 스토트 著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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