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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러한 | 2004.01.11 16:54:40 | 메뉴 건너뛰기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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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의 긴 여행


보라는 13일 만에 그 분 곁으로 갔습니다.

다른 날보다도 학교에서 일찍 마친 후
학원 가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학교 부근 친구 집에 가서 놀다가
3층 옥상에서 추락해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짧은 생을 마쳤습니다.


중환자실에서 보라를 위해 기도할 때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서
저는 기적을 정말로 믿고 싶었습니다.
아니 0.000001%의 기적을 확신했었습니다.

그러나 보라는 우리 모두의 바램을 뒤로 한 채
열 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먼저 그 나라로 긴 여행을 떠난 것입니다.



제 손을 붙잡는 보라 아버지에게
무슨 말이든지 위로하고 싶었지만 그 어떤 말도
생각나질 않아 겨우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는 좋은 나라로 먼저 갔습니다'
'저도 알아요...
그런데 제 마음이 왜 이렇게도 아플까요...'





2년 전에 속초에 사는 예진이도
가족들과 함께 물놀이 갔다가 물에 빠져
깨어나지 못하고 결국 40일 만에 그 나라로 갔었는데,

왜 또 사랑하는 보라를 이렇게 데려가시는지
가슴은 미어질 듯 아프기만 했습니다.


저는 그 때 예진이가 있는 중환자실에서
이렇게 기도했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저 아이와 단순 비교할 때 얼마나
더럽고 악한 사람입니까.

데려가시려면 저 같이 당신
앞에 부끄러운 사람을 데려갈 것이지
왜 저렇게 순진한 아이를 데려가시려 합니까...


한참을
그런 억지 기도를 드리는데
제 가슴에 새겨지는 그 분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아들아!

너 정말로 그 이유를 몰라서 묻고 있는 거니?
지금 네가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은
너의 의로움도 아니고
너의 열매 때문도 아니란다.


사실 너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병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너를 데려가려고 했단다.
그리고 그 후에도 여러 번 너를 데려가려고 했었지.

아니 지금이라도 나는 너를 데려갈
준비는 항상 되어 있단다.


그러나 만약 지금 너를 이 곳에
오게 한다면 너는 너무나 부끄러워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기회를 주고있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란다.


물론
너는 그 아이의 순수함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너는 나의 사명(使命)이 있기에
오직 나는 너에게 기회를 주고자

너를 덮어주고
너를 도와주고
너를 인도하는 것이란다.


저는 그 때 그 기도를 드린 후에
너무나 부끄러워 한 마디 대꾸도 못하고
하염없이 울기만 했었습니다.





저는 지난주 어느 라디오방송에서
인생을 풍자한 이런 멘트를 들었습니다.

40대에는 아름다움을 자랑했던 '미모의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50대에는 지식을 자랑하는 '지성의 평준화'가
60대에는 빈부 격차를 가름하는 '재산의 평준화'가
70대에는 약하고 강했던 '건강의 평준화'가

그리고 80대가 되면 살고 죽음을 판가름하는 '목숨의 평준화'가
남몰래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게 부당하고 불공평하게 느껴졌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런 차이들은 결국 모두가 비슷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이비콕슨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려면 언제나
자신의 장례식을 상상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거창한 우주의 종말 이전에
자신의 종말의 날에 과연
얼마나 많은 조문객이 왔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절대자 앞에 자신의 인생을 결산할 때
과연 어떤 고백을 할 수 있을까를 늘 생각하면서
오늘의 현실을 극복해 나가야 성공적인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어떤 이는 마지막에
자랑스럽게 이렇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는 달려갈 길을 마치고
나는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저는 그 말을 이렇게 재구성해보았습니다.

저는 당신이 저에게 주신
인생의 경주에서

페어플레이를 하였고
작정된 풀코스를 다 달렸으며
주어진 룰을 다 지켰습니다.


주여,

저도 마지막 그 날에
그 고백을 꼭 하고 싶습니다.
...


2004년 1월 11일 강릉에서 피러한이 드립니다.  



^경포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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