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최만자 자매 | 2015.03.14 14:23:1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막5:25-34
설교자
최만자 자매
참고
http://www.saegilchurch.or.kr/index.php?mid=sermon&category=99215&document_srl=123800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가복음 5:25-34)

2012년 8월 19일 여름수련회/주일예배

최만자 자매

(새길교회 신학위원)

 

맹위를 떨치던 폭염도 서서히 그 위력을 잃어가기 시작하는 듯합니다.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어김없이 제 때를 찾아오는 사이, 새길 식구들이 일상을 밖에 내려놓고 여기 수련회에 모여 ‘근원적인’ 혹은 ‘원초적인’ 나를 찾고 바라보고 그리고 새롭게 다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금년 주제가 ‘healing' 치유이기에, 나 자신의 속 깊은 곳과 여기 함께한 모두와의 보다 더 조화롭고 아름다운 관계의 모양새를 가져봤던 것은 아닌가 짐작해봅니다.

 

‘치유’란 병을 고치는 것, 상처를 보살펴 회복시켜 온전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지요. 우리의 인생살이에 상처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으며, 우리 삶의 자리에 병마와 상처가 없는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도종환 시인은 이를 노래하여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네 삶에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누구나 고여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치유를 원하며 온전히 회복된 상태가 되기를 바라고 기대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번 수련회가 새길 식구들이 각자가 가진 상처들을, 또는 우리 공동체 안에 있는 상처들을 치유하여 새길 전체가 온전히 회복되어지는 간절한 바램 가져봅니다. 이런 뜻에서 저는 오늘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한 치유사건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어 우리들의 치유 이야기에 도움을 얻고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의 성서 본문 이야기는 열두 해 동안 혈루병을 앓았던 한 여인이 예수를 만나 병을 치유 받고, 온전한 사람으로 새롭게 살아난 이야기로 본문은 복음서 모두에 각각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익히 많이 들어본 이야기입니다. 본문의 여인은 12년간 이 병을 앓아왔는데 26절에 그의 투병생활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는 병을 낫게 하기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 여러 의원들에게 수없이 많은 치료를 받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치료비로 써 버렸습니다. 결국 경제적으로 극히 가난한 신세가 되었으나 그녀의 병이 낫기는커녕 더 악화되어 이젠 치료의 모든 희망을 잃게 된 지경에 이르렀다 합니다. 그러나 그 외에도 여인을 더욱 압박하고 괴롭힌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회 공동체로부터의 ‘왕따’ 당함이었습니다. 하혈을 하는 병을 유대전통에서는 ‘부정한’ 병으로 간주했고, 종교적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부정한 병을 앓고 있는 부정한 인간인 이 병자는 다른 사람과 접촉해서도 안 되고 자유롭게 밖으로 다닐 수 도 없었습니다. 여자의 하혈을 부정한 것으로 규정했던 유대의 전통은 심지어 출산 때의 피 흘림 까지도 부정하다고 하여 정결예법을 치르도록 율법으로 정해 놓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여인은 병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도 없이 병세는 악화되고, 가진 돈은 탕진하게 되고, 뿐만 아니라 부정한 죄인취급까지 당해 사회로부터 격리당하는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을 지경으로까지 밑바닥에 내려앉은 신세가 된 여자였습니다. 이 정도의 상황이라면 누구나 스스로의 인생을 포기하고 싶어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서 기록의 중요한 메시지는 이 여인의 그 바닥을 친 자리에서 새로이 일어서는 용기에 중심을 두는 것 같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마침 자신의 동네에 왔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녀는 있는 힘을 모두 다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예수를 만나러 나갔습니다. 사람들로부터 하혈증 있는 부정한 인간이라고 받을 수 있는 비난도 각오하고, 기력이 없어 몇 번이고 자빠질 자신의 볼품사나운 꼬락서니도 각오하고, 누가 뭐라고 하든지 내 스스로 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처연한 각오로 예수를 따르는 군중 속으로 들어갔고, 밀치고 당기고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예수 가까이로 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의 옷자락이 보이는 곳까지 다가가게 됩니다. 여인은 저 옷자락만 만져도 내 병이 나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으로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고, 바로 그때 예수의 능력이 흘러나와 이 여인의 하혈증이 멈췄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하며 떠밀리는 군중의 상황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듯 한 질문을 합니다. 제자들도 이 무리들이 밀리는 상황에 누구를 어떻게 찾느냐고 예수께 되묻지요. 그 때 이 여인은 예수 앞에 나아와 자신의 상태와 과정을 낱낱이 고백합니다. 이 여인을 마주한 예수의 대답이 오늘 제목인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돌아가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새삼 깨달아야 할 몇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선 첫째로, 예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이 여자의 믿음은 어떻게 가능한 것이었을 까요? 이 여자는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라는 분이 병든 자를 고쳐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데.”

“예수라는 분이 가난하고 힘없고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신데.”

“예수라는 분은 세상의 권력자, 종교, 정치 지도자들에게 억울함을 당하는 보잘 것 없는 밑바닥 사람들을 편들고 도와주는 분이래.”

“예수라는 분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도 지극히 사랑하신데.”

“예수라는 분이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쳤는데 율법학자, 바리새파 사람들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종교와 율법의 전통을 어겼다고 비난하니까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다’고 당당히 말했데.”

“그 분은 사람을 억압하는 것이면 비록 율법이라도 또 전통이라도 다 버리고 사람을 우선으로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그렇게 말하는 분이래.”

이러한 소문들을 아주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예수의 소식은 이 여인에게 생명의 빛과도 같은 소식이었겠지요. 이 예수를 알고부터 이 여인은 ‘오직’ 예수 만나기를 고대하며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예수가 자신의 동네에 들어왔다는 소식에 그만 정신없이 전력을 다하여 그 예수를 만나기 위해 수많은 군중 속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옷자락을 보고 저 옷자락만 만져도 내 병이 나을 텐데 하는 믿음으로 예수의 옷자락을 만진 것이라 상상해봅니다.

 

이 여인은 예수의 인간사랑을 알았고, 능력을 알았고, 예수가 이루려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기에 그가 치유를 통해 자신을 한 온전한 인간으로 새롭게 해방시켜 줄 구원자임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만나기에 온 정성, 용기와 도전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여인의 용기의 원천은 예수에 대한 인지, 곧 앞에서 말한 예수에 대한 그러한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생각할 점은 예수의 옷자락을 만져 치유 받은 후 예수가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는 물음 앞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여인이 ‘두려워하여 떨었다’고 합니다. 이 두렵고 떨림이란 표현은 어떤 공포감이라기보다는 신의 나타남 앞에선 인간의 경외심의 모습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해석합니다. 이 여인은 어떤 경외심을 가지고 예수 앞에 나아가 자신의 모든 것을 진솔하게 내어 놓습니다. ‘치유 불가능한 병에 걸려 돈도 다 없어지고 친구도 의지할 곳도 없는 신세이고 부정한 죄인이 되어 멸시, 경멸당하는 신세인데 예수 당신의 소문을 듣고 당신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 나음을 얻겠다고 생각하여 옷자락을 만졌노라’고 그 모든 경위를 낱낱이 고백합니다. 치유를 받은 이 여인의 태도는 경회감과 진솔함, 진정성을 갖는 인간의 순수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정말 예수를 만났고, 그로부터 치유를 받은 은혜를 받은 사람의 모습은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속속들이 자신을 돌아볼 줄 알며, 하나님 앞에 경외심을 가지고 인간 앞에 순수하고 진솔한 모습을 가지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이 이야기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야 진정 치유된 온전함을 얻는 것일 테지요.

 

셋째로 이 여인의 믿음은 여인이 사회적 규율, 규정, 전통, 관습들이 사람을 억압하는 것이라면 과감히 그것들을 깨뜨리고 넘어서는 자유함을 보여줍니다. 이 여인은 예수가 그런 분임을 알았고 그래서 자신도 예수의 새 질서를 용감하게 따랐습니다. 하혈증에 대한 율법의 금기사항들이 예수와의 만남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을 억압하고 정죄하는 전통과 관습에 용기 있게 도전하고 버릴 것, 무시할 것들을 용감하게 버렸고 무시했습니다.

 

우리는 전통과 미래지향의 경계선에서 항상 주저합니다. 그러나 분명하고 지혜로워야 진정한 치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버릴 것을 버리는 현명함과 용기를 가져야만 치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넷째로 이 치유이야기에서 특별한 것은 치유사건에 대한 예수의 결론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것입니다. 기적이나 치유는 하늘의 초능력으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 여인의 믿음에 의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치유와 구원이 하나님의 능력만이 아니고 여인의 마음과 행위가 함께 작용한 결과라는 것, 다시 말해 일방적 신적 구원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상호적, 쌍방적 치유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여인의 진솔한 자기고백을 듣고 이렇게 생각하셨을 것 같습니다. ‘이 여인이 이미 예수자신을 깊이 알고 있고, 예수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잘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라고. 그렇기 때문에 이 여인은 예수를 만나기 위해 모든 것을 뒤로하고 전통도 넘어서고 온 힘을 다해 찾아 왔다는 것을 예수는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12년의 중한 병에 걸렸던 여인, 그는 예수가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에 예수의 옷단만 만져도 나을 것이란 대단히 놀라운 믿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통과 관습을 깨뜨릴 용기를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는 이 여인의 진솔한 자기고백과, 자신을 이해하고 알아보는 인지능력과 그리고 사람을 억압하는 전통과 규정과 관습을 넘어서려는 용기를 보았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이 여인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치유와 구원의 과정의 상호적 작용의 오묘함을 드러내 보여 주셨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제 새길의 이야기를 나누어 봅니다. 새길의 상처들은 어떤 것들일까요?

 

우선 기존 제도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새길을 만들면서 부정당하고 따돌림 당한 상처들이 있습니다. 기존교회들은 대단히 위험하고 잘못된 교회라고 하면서 “아! 그런 교회는 다니지 마!” 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분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정통(?)으로부터 위험시 하는 교회를 선택한 분들이 당하는 어려움과 상처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진 상처는 또 ‘서로 어울리지 못 함’ 입니다. 이곳에 온 사정들도 이유들도 가지각색입니다. 알알이들 모였습니다. 각각 자기가 가장 옳기도 하고, 다름을 용납하기 힘들기도 하고, 이런 곳이겠구나 생각하고 왔지만 아니구나 하고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끼리끼리 만남에도 때론 이리 저리 상처를 주거나 또는 받게 됩니다.

 

또 우리는 치유경험 보다는 상처 경험이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전 다니던 교회에서 누구와 충돌하여서..., 또는 목사님이 너무 이상해서..., 사실 상처 준 경험도 많고 상처 받은 경험도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상처 낼 일이 생기면 피합니다. 두려워하고 쉽게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합니다.

 

우리는 헤어짐의 상처도 많이 받고 있지요. 어찌 어찌 정들어 서로 의지하겠다 싶었는데 이런 저런 사유로 떠나가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피난처라 은유하였지만 잠시 쉼터에 왔다가 자기 갈 곳으로 떠나가는 떠돌이 형제자매들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받지요.


‘없음’에 대한 상처가 있습니다. 교회 건물도 없고, 목회자도 없고, 그래서 집도 없고, 부모도 없는... 고아처럼, 누가 돌봐주고 다독여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고, 내 자리는 내가 스스로 찾아서 서고 앉아야만 합니다. 외롭기도 하고 의지할 곳도 없습니다. 훗날 이 교회가 어떻게 될지 아예 생각하지 말자고 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다음세대를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고민도 됩니다. 미래도 막연하고 불안합니다. ‘없음’에 대한 불안은 노년들에겐 안정된 사후를 그릴 수 없음도 생각될 수 있습니다


대 사회적 인식도 제각각이라 사회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함에도 조심하고, 때론 입을 아예 다물기도 합니다. 사회문제에 마음을 모으지도 못하고 한 목소리를 내지도 못합니다. 수련회에서 하나가 된 듯한데, 돌아가면 또 그대로입니다.

 

우리의 치유는 어떤 것일까요?

 

저는 오늘 이 혈루병 든 여인처럼 우리도 소문 듣고 온 예수 만나기에 전력하면 치유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여기 많은 분들이 새길에서 새롭게 말하는 예수 소문 듣고 모였지 않습니까? 어떤 책을 읽다가, 혹은 인터넷을 보고, 새길의 예수 소문 듣고 왔다고들 합니다.

 

참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 우리를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예수, 우리가 새롭게 만날 수 있는 하나님, 예수, 성령을 진정으로 찾아 만나도록 전력해 봅시다. 새길에서 그동안 소문내고 퍼뜨린 예수가 누구인지 그 예수, 그 하나님이 참 진리임을 깨닫고 그 분 만나기에 우리 전부를 내어 놓아 봅시다. 한국 기독교의 잘못된 관습, 교리주의, 교권주의에 도전하고 넘어서 나갑시다. 잘못된 것이다 생각하면서도 도전하지 못하였던 것들에 용기를 내어 도전해 봅시다. 버릴 것은 버리고 무시할 것은 무시합시다.

 

우리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여기서 또 그리워하고 되돌아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머물까, 떠날까를 더 이상 고민하지 말고 이제 여기 눌러앉아 새길의 미래를 같이 만들어 봅시다.

 

새길 미래 만들기의 첫 과제로 저는 청년들을 살리기에 모두 힘을 합하여 노력해 봅시다. 일촌도 만들고 삼촌도 만들고 누나도 만들고 오빠도 만들고, 함께 새길의 가족을 세워나가 봅시다. 새길 미래가 바로 나의 미래가 된다 생각하고 새로운 새길의 차원을 창작해 봅시다. 이런 몸짓들을 통해 서로 용납하고 사랑하고 인정하고 신뢰를 쌓아 나갑시다. 그 안에서 예수께서 우리를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이제 예수의 옷자락이 보일 것 같습니다. 그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새길이 치유받고 살아 날 것입니다. 새길도 새로워지고 우리도 새롭게 거듭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모든 것에 앞서는 것은 우리가 우리자신을 철저히 돌아보고, 나의 밑바닥을 진솔하게 다 드러내고 예수 앞에 낱낱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봄이, 나의 진정성이 바탕을 이루는 것이 우선될 때, “새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주님의 인정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성숙한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참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댓글 쓰기

목록 삭제
Copyright © 최용우 010-7162-3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