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태복음 › 영성적 상상력으로

김부겸 목사 | 2016.07.05 22:18:21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마10:40-42
설교자
김부겸 목사
참고
수도원교회 http://blog.naver.com/malsoom/148844634

2012년 1월 22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10장 40절~42절

설교제목 : 영성적 상상력으로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을 의인이라고 해서 맞아들이는 사람은,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사람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0~42)】

 

  <성경 이야기>

  세상으로 나아가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그 제자들이 예수님 자신과 연결되어 있고, 또 예수님 자신은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즉 오늘의 초점은 ‘연결’입니다. 우리 인류는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고, 또 예수님은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류-예수-하느님’의 연결구도. 이 연결구도에 대해서 영성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동화 같은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문제점>

  이 연결구도는 기독교 신학의 핵심적 구도입니다. 특히 서양에 있어서. 그런데 이 연결구도가 단선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문제입니다. 서양의 기독교 신학전통에 따르면 그 ‘인류-예수-하느님’의 연결선이 단 하나라는 점, 그렇게 단선적으로 생각한다는 점, 그렇게 단선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태도들을 이단으로 내몰았다는 점, 그러나 영성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생각해 보았을 때 그 연결구도는 너무나도 많은 가능성과 다양성, 신비성을 샘솟게 할 수 있다는 점 … 뭐 그런 차원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영성적 상상력으로> 그럼 이제 영성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 연결구도를 다채롭게 해석해 보겠습니다.

  첫째, 서양의 기독교 신학자들은 ‘인간-예수-하느님’의 연결구도를 이야기하면서 하느님에게 이르는 길은 예수에게만 한정지었습니다. 즉 예수를 통하지 않는 ‘하느님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이단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통하지 않고도 하느님에게 이를 수 있습니다. 아니 좀더 세밀하게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을 본다고 했을 때, 그것은 예수라는 이가 온전하게 ‘비어(空)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공(空)의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을 온전하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영혼이 온전하게 비어 있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를 얼굴과 얼굴을 맞대면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를 통하지 않는’ 하느님 만나기를 이단시한 서양의 기독교 신학은 잘못된 것입니다.


  둘째, 인간-예수-하느님의 연결구도에서 서양의 기독교 신학자들은 단선적 접촉만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만나고, 또 우리가 하느님을 만난다고 했을 때, 그 접촉선이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영성적 상상력으로 보았을 때, 그 연결선은 복선(複線)입니다. 홀선이 아니고, 겹으로 된 줄입니다. 인간-예수-하느님의 연결선은 하나가 아닙니다. 그 연결선들은 감성과 이성, 의지와 논리, 직관과 침묵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논리로서 예수와 하느님을 만나고, 또 어떤 이는 감성으로서 만나고, 또 어떤 이는 직관으로서 만나고, 또 누구는 침묵으로서 예수님과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어떤 이는 논리로서는 예수님과 하느님을 못 만나고, 또 어떤 이는 감성으로는 도저히 못 만나고, 누구는 침묵으로는 절대로 예수님과 하느님을 못 만나는 차원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예수-하느님의 연결선은 겹으로 된 줄입니다. 홀 선이 아닙니다.


  셋째, 인간-예수-하느님의 연결선은 왕복선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에게 다가설 수 있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내려올 수 있습니다. 서양의 개신교 전통은 ‘절대은총’을 강조하는 나머지 인간이 하느님에게 다가설 수 있는 길을 막아버렸습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인간-예수-하느님의 연결선은 왕복선입니다. 오르고 내릴 수 있습니다. 올라갈 수 있고, 내려올 수 있습니다.


  넷째, 인간-예수-하느님의 연결선은 유형무형(有形無形)의 선입니다.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끊어져 있기도 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연결되어 있는 선(線)이 아니라, 때로는 끊어져 있기도 하는 선입니다. 왜냐하면 현재 끊어져 있어야만 앞으로 더욱더 튼튼한 길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길이란 모름지기 자기탐구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제대로 된 길이 되려면, 내가 낸 길이 되어야 합니다. 남이 낸 길은 내 길이 아닙니다.


  인간-예수-하느님의 연결선은 인류의 숫자만큼 다양할 지도 모릅니다. 그 길은 철저하게 ‘나’가 내야하는 길입니다. ‘나’가 내지 않는 길이란 허약하고 부실하며, 위선적이며 허구적입니다. ‘나’가 낸 길이라야 ‘나’에게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때로 ‘인간-예수-하느님’에 이르는 길 중에 한 두 곳을 끊어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끊어놓아야만 ‘나’가 그 없어진 길을 자기에게 맞게 뚫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 크게 자랑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 불쌍한 사람들, 평범한 사람, 바보 같은 사람, 평범한 사람 … 그러나 괜찮습니다. 그이들 뒤에는 예수가 돕고 있고, 그이들 위에는 하느님이 사랑의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평범한 인류 뒤와 위에 두루 퍼져 있는 신성한 아우라(Aura). 우리가 조금만 약간만이라도 영성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만 있다면, 우리 인류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으로 연결되는 신비로운 아우라의 길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성한 아우라 속에 깃들어 있는 행복한 영혼들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영성적 상상력으로’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하늘의 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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