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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열 목사 | 2019.11.28 21:07:1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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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심과 인류 보편의 가치


누구나 다 그렇듯이 나도 정의가 반드시 이긴다고 믿는다. 하지만 정의는 단번에 불가역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밀물에도 파도가 들락날락하는 과정이 있는 것처럼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는 늘 불의와의 힘겨루기가 있게 마련이다. 어느 시대나 정의를 굽게 하려는 시도가 있다. 시대의 의인들이 조금만 방심하면 탐욕으로 오염된 인간의 죄성이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고 만다. 그나마 세상이 조금씩이라도 정의와 자유가 확장되는 것은 깨어있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시진핑은 중국몽(中國夢)을 통하여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을 꾀하고 있다. 중국공산당 창당 100돌이 되는 2021년에는 고대 중국인들의 이상사회였던 ‘소강사회(小康社會)’를 실현한다는 것인데 이를 현대사회에서는 의식주 문제를 해결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리고 중국 건국 100돌이 되는 2049년에는 사회주의의 현대화를 완성하여 세계 초일류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위대한 꿈을 가진 나라가 홍콩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경찰력으로 막고 있고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 홍콩에 인민해방군으로 진압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중국몽이 개꿈임을 증명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요즘 대학교에서는 홍콩 시민의 민주화 시위를 지지하는 한국 학생들의 대자보가 중국 유학생들에 의하여 훼손되는 일이 잦다고 한다. 대자보를 설치한 한국 학생들과 중국 유학생들 사이에 말다툼과 실랑이도 벌어지는 모양이다. 중국 유학생들은 한국 학생들을 향하여 ‘남의 나라 문제에 간섭하지 말라’며 언성을 높이기도 한다. 모르기는 해도 중국 유학생들은 이를 애국심이라고 이해하는 것같다. 하지만 이 문제는 애국심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보편의 가치에 대한 문제이다. 중국인의 애국과 한국인의 애국은 충돌할 수 있지만 인류 보편의 가치는 국경을 초월한다. 그런 문제에 한국 학생의 입장이 있고, 중국 학생의 입장이 따로 있다고 보는 생각은 틀렸다. 적어도 보편의 가치와 공공의 질서에 대하여서는 누구나 모두 공감할 수 있어야 대학인이고 지성인이다. 중국 유학생들이 한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배울 것은 학문만이 아니다. 이 사회의 민주적 질서와 도덕적 규범도 배우는 것이 마땅하다. 훗날 중국에 돌아가서 그들 사회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해결하여 발전을 이루는데 한국 유학 기간에 보고 듣고 익힌 것들은 매우 유익한 자산이 되도록 해야 한다. 적어도 자기 의사를 표현할 자유에 대하여 딴지를 걸거나 방해해서는 안된다.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에스파냐 출신의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를 꼽는다.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에 비견되는 그는 현대미술사의 전설로 불리는 존재이다. 미술사에서 그의 공적은 무엇보다도 르네상스 이후 벗어나지 못한 유럽 미술의 사실주의적 전통에서 미술을 해방시켰다는 점이다. 그의 이런 미술 혁명은 <아비뇽의 여인들>(1906~7)에 고스란히 담겨 세상에 드러났는데 이런 미술사의 흐름을 입체파(Cubism)라고 한다. ‘시각의 사실주의’에 머물러있던 미술을 ‘개념의 사실주의’로 이끄는 역할을 한 것이다.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피카소는 공부에는 흥미를 갖지 못한 모양이다. 피카소는 14살 때 바르셀로나의 미술학교에 들어갔지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19살의 피카소를 파리로 보냈다. 파리는 세계 최고의 화려한 도시였지만 피카소는 그 이면에 가려진 빈곤과 비참함을 경험하며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침울하였다. 그러나 피카소는 구석진 다락방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젊은 보헤미안무리에 합류하였다. 모네, 르누아르, 피사르의 작품을 접했고, 고갱과 고흐, 세잔의 그림을 연구하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탐구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아프리카 식민지 확장에 혈안이 되어있었고 많은 문화재들을 거의 약탈수준으로 빼앗아오고 있었다. 피카소의 작품에는 당시 프랑스의 이런 사회상이 스며들었다. 미술은 진공에서 만들어지는 예술이 결코 아니다.


그의 작품 가운데 <게르니카>(1937)가 있다. 게르니카는 에스파냐의 도시 이름이다. 1937년 나치가 이 도시를 무차별 공격하므로 폐허를 만들었다. 피카소는 자기 조국의 참상에 울분을 터트렸다. 그 무렵 파리만국박람회가 열렸는데 피카소는 박람회의 에스파냐관에 <게르니카>를 전시하므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였다. 이미 명예와 부를 거머잡은 당대의 바람둥이 피카소에게 애국심이라는 개념이 다소 의아하지만 피카소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조국에 대한 사랑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그의 작품 가운데 <한국에서의 학살>(1951)이 있다. 총을 들고 있는 군인들은 살인기계 로봇처럼 무정하고 잔인하다. 그들에게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작품의 왼쪽에는 벌거벗은 여자와 노인, 아이가 있다. 전쟁 중에 일어난 살인과 강간과 처형, 그리고 굶주림에 속수무책 당할 수 밖에 없는 힘없는 인간들의 모습이다. 이 그림은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신천에서 서북청년단, 토벌대, 대한청년단 등에 의해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사회는 ‘공산주의자는 찾아내어 죽여도 좋다’는 분위기였다. 한마디로 미친 사회였다. 미친 사회를 조정하는 세력들은 국가의 공권력을 이용하여 무고한 양민들을 살해하였고, 이념 하나로 백성을 피아로 구별하여 만행을 저지르게 하였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자유 분망한 예술가 피카소가 조국의 안위를 걱정하듯 한국의 무례하고 잔혹한 전쟁을 고발한 것은 그가 보편의 가치를 추구하는 세계인이기 때문이다. 다행하게도 역사는 시민의 정치적 자유, 경제적 균등, 사회적 평등, 사상적 자유의 방향으로 조금씩이나마 나아왔다. 앞으로도 이 지향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이를 지지하는 건강한 시민이 존재할 때 가능한 일이다.


홍콩 시민의 민주화 열기를 응원한다. 일본 정부를 향한 위안부 할머니들의 사과 요구가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의의 지향성을 믿기 때문이다. 깨어있는 지성인이 존재하는 한, 그들의 하나님이 계시는 한 역사의 진로를 막을 수는 없다.

최광열(하늘교회 목사)


Ki-deok Nam 홍콩의 민주화를 보며 서구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과 유물 파괴, 노예제도로 인한 인권 파괴, 그리고 우리 사회의 과거와 현재의 단면을 보는 목사님의 시각에 경의를 표합니다. 많은 역사가들이 자기들이 보고싶은 부분만 보고, 평하고, 자랑스러워 해서 불편했던것이 사실입니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할머니들께 사과나 인정하지 않는 모습과 기독교가 공산주의자들에게 가했던 폭력과 살상을 무시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는것이 공통된 모습이라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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