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무엇이든 › [칼럼니스트No.1108 ]인터넷으로 찾아낸 L씨의 짝사랑

이재일 | 2005.01.08 11:21:11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이재일 (정보통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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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네티즌 L씨에게는 평생토록 흠모하고 있는 한 여성이 있다. 초등학교 동창생인 P씨이다. 그의 모교는 5학년 때까지 남녀가 섞여서 반을 이루었는데, 그 여학생과는 4·5학년 때 같은 학급이었다.

그녀는 인기가 매우 높았다. 그럴만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우선 얼굴이 예쁜데다 공부를 잘했다. 그리고 노래도 잘 불렀다. 이른바 '재색을 겸비한' 여학생이었다. 요즘 말로 얼짱, 공부짱, 노래짱이었으니 같은 반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L씨는 5학년 때까지 공부를 그리 잘하지 못했다. 성적표에 '수'는 몇 개 없었고 '미'보다는 '우'가 좀 많을 정도였다. '양'도 있었다. 석차가 아마 중간에서 약간 위쪽이 아니었나 싶다.

그녀의 자리는 공교롭게도 그의 앞이었다. 그의 성적이 시원치 않았던 것도 공부시간에 그녀만을 쳐다보는데 정신이 없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귀엽다"며 그녀를 안아주는 담임선생님을 무척이나 미워했다. 그는 지금도 그랬던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고 있다.

모든 점에서 뒤떨어졌으니 그녀와 대화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L씨는 그녀를 일방적으로 '짝사랑'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조금만 친했더라도 '첫사랑'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놈의 성적이 시원치 않았으니….

6학년이 되면서 남학생과 여학생은 3개반씩으로 분리되었다. 그는 2반이었고, 그녀는 4반이었다. 다행히도 모의고사 때는 2반과 4반이 강당에서 시험을 함께 치렀다. 그 때는 중학교도 입학시험이 있었던 때라 모의고사를 자주 쳤다.

선생님은 성적이 좋으면 남녀학생들이 보는 가운데 각 과목마다 메달을 달아주었다. 그는 그녀 때문이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야 했다. 덕분에 이따금 과목 1등을 하여 메달을 받는 기쁨을 누렸다. 실력은 날이 갈수록 좋아져, 모든 어린이가 선망하던 중학교에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다.

당시는 어머니날이라는 것이 있었다. 오늘날의 어버이날은 이날을 발전적(?)으로 개명한 것이라고 하겠다. 어린이들은 어머니날에 학예회를 가졌는데, 상당기간 연습을 해야 했다.

6학년 때였다. 그는 합창부문에 뽑혔다. 노래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으나 누구든 한가지는 맡아야 하기에 선생님이 그냥 노래를 하라고 했던 모양이다. 오후가 되면 합창연습을 했다. 그런데 그가 짝사랑하는 여학생이 지휘를 맡게 된 것이 아닌가. 그의 가슴이 뛴 것은 물론이었다.

합창단이 어머니날에 불렀던 노래의 제목은  "구름이 구름이 하늘에다 그림을 그림을 그립니다"로 시작되는 강소천님의 동요 '구름'이었다. 그는 지금도 어머니날만 되면 그녀의 지휘에 따라 노래연습을 했던 일이 아련한 추억으로 떠오른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그녀와는 이별(?)해야 했다. 그는 K중으로, 그녀 역시 공부 잘하는 여학생이 다니는 P여중으로 진학했다. 다시 3년 뒤 둘은 역시 부산의 최고 명문인 K고와 P여고에 합격했다. 그는 고교시절에 멀리서 그녀를 딱 한번 본 일이 있다. 그러나 벙어리 냉가슴만 앓았을 뿐 아무런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용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는 고교 3학년 때 '늦바람'이 났다. 자기 동네에 N여고 1학년 K양이 이사를 왔는데, 적당한 키에 얼굴도 예쁜 편이었지만 마음이 착해 보였다. 다른 친구들도 그녀를 은근히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로가 합의한 끝에 그가 책임(?)지기로 했다. 난생 처음 연애편지를 쓴 것도 그녀 때문이었다. 한용운님의 시구(詩句)를 인용했다. 문장이 좋아서였는지, 남학생이 마음에 들어서였는지 몰라도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짝사랑해왔던 P양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사랑에 취해(?) 공부를 소홀히 한 나머지 대학입시에 낙방했다. 그러자 K양은 절교를 선언했다. 그는 그 이유를 아직도 모르고 있다. 다만 대학에 떨어진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었나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더 좋아하는 남학생이 나타났는지도 모른다.

이후 그는 3수 끝에 대학에 들어가고, 군대도 갔다오고, 복학도 했다. 대학시절에는 좋아하는 여학생도 있었으나 애써 멀리 한 채  "공부만이 살길"이라며 책과 씨름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듯이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S신문사 수습기자로 입사했다. 이 때가 1973년 1월이었다.

그 뒤로도 몇몇 다른 여성과도 만나고 결혼할 뻔한 경우도 있었지만, 인연이 안 닿아서인지 나중에는 헤어졌다. 그는 마침내 34살 노총각의 나이에 친지의 중매로 지금의 아내를 '운명적'으로 만난 뒤 곧바로 결혼하여 현재 1녀1남을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런데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던 지난 10월 어느 날이었다. L씨는 갑자기 초등학교 동창생인 P씨가 생각났다. 불현듯 오래도록 짝사랑했던 그녀가 떠올랐던 것이다. 증세(?)가 심했던지 꿈에도 자주 나타났다. 얼마나 보고 싶으면 그런 꿈을 꾸는지 몰랐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짝사랑과는 분명히 다른 감정이었다.  

초등학교 때도 대화 한번 제대로 못한 사이지만 꿈에서는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녀를 꿈에서 보면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다. 그의 사랑하는 아내가 들으면 "이혼하자"며 호통을 칠지 모르지만, 그건 분명히 사실인데 어떡하랴.

24년 동안 신문기자 생활을 했던 L씨는 시간만 있으면 컴퓨터로 칼럼을 쓰는 e-시사칼럼니스트이다. 그는 60을 바라보는 나이인데도 자신을 '老티즌'이라고 부르면서 인터넷시대의 명암에 관해 칼럼을 쓰고 있다. 쉰세대 논객이라고 해야겠다.

며칠 전이었다. 그는 갑자기 무릎을 쳤다. "왜 아직도 그것을 몰랐느냐"며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기도 했다. 인터넷에서는 검색을 통해 '저명인사'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의 신상정보를 알아낼 수 있다. 그런데도 만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서 이런 방법을 전혀 생각 못한 자신이 미웠던 것이다.

L씨는 그녀가 분명히 '음대교수'라고 믿고 있었다. 그것은 20년 전쯤 서울 세종문화회관 옆을 지나다가 P씨의 사진과 함께 피아노독주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 담긴 포스터를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그녀의 직책은 모 여자대학 음대교수라고 되어있었다.

그는 그 뒤 초등학교 동창생들과 함께 그녀의 연주회에 가서 꽃다발이라도 전해주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이성에 대한 감정을 떠나서 같이 공부했던 동창생이 어엿한 대학교수가 되어 피아노독주회를 갖는다는 사실은 얼마나 흐뭇한 일인가.

이런 기억을 바탕으로 L씨는 인터넷사이트에 있는 인명검색사전에 그녀의 이름과 직업을 적고는 엔터를 쳤다. 동명이인 4∼5명의 간단한 이력이 화면에 떴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자세히 훑어보았다.

L씨는 너무나 기뻤다. 자신이 찾는 P씨에 대한 내용이 개략적이나마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좀 더 상세한 내용과 사진을 보려면 회원에 가입하여 소정의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아무렴, 마다할 리가 없는 일이었다.

또 한번 설레는 마음으로 절차를 밟고는 사이트에서 시키는 데로 클릭하면서 찾아 들어갔다. 드디어 그가 바라던 내용이 그녀의 얼굴사진과 함께 나타났다. 너무 놀라고 기쁜 나머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름, 출생 년월일, 직업, 소속 등 기본 정보 외에 직장주소 및 전화, e-메일주소에다 학력과 경력, 저서 등이 비교적 상세히 적혀있었다. 그녀는 현재 S여대 음대학장으로 재직중이며, 그동안 독주회만 10여차례나 한 훌륭한 음악가임을 알 수 있었다.

L씨가 드디어 인터넷을 통해 그가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마음속의 연인을 찾아낸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1958년이었으니까 꼭 46년만의 일이었다. L씨는 이때처럼 "인터넷을 배우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그녀를 만나볼 마음도 없고, 용기는 더욱 없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자신을 기억해줄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e-메일주소를 알게 되었으면서도 한마디도 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L씨는 그저 한평생을 살아오면서 간직하고 있는 순수한 마음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그는 지금 기나긴 세월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한 여인의 근황을 알게 해준 인터넷에 대해 한없이 고마워하고 있다.

                 - 2004.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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