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무엇이든 › [칼럼니스트No.1114 ]부모 직업은 왜 적으라고 하나

이재일 | 2005.01.08 11:39:42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2004년 12월 24일

이재일 (정보통신 칼럼니스트)

1996년 4월, 오랜 고심 끝에 회사에 사표를 제출했다. 그 때는 IMF니 구조조정이니 하는 말이 없었다. 사표제출 이유는 '건강'이었다. 엄청난 스트레스와 육체적인 과로, 지나친 음주 등으로 몸이 쇠약해졌기 때문이다.

'기자폐업' 2년 뒤인 1998년 7월, 젊었을 때부터 생각해왔던 고향 부산으로의 낙향을 단행했다. 부산을 떠난 지 33년만의 일이었다. 아내의 반대도 없지 않았지만, "건강을 위해" 산과 바다, 그리고 강이 있는 내고향 부산으로 가겠다는 데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당시 필자의 나이는 54세. 장가를 늦게 간 탓에 딸내미는 대학 1학년이고, 아들놈은 고교 2학년이었다. 여기서 1년 전인 1997년의 3월의 일이었다. 그 때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퇴직금으로 살아가는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백수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들이 무슨 서류를 집으로 갖고 왔는데, 바로 '가정환경조사서'였다. 학교측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부모로서도 응당 그렇게 하는 일이어서 그것이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 문제가 생겼다. 바로 '부모 직업'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당하게 '신문기자' 또는  '언론인'이라고 썼는데, 이번에는 뭐라고 해야 된다는 말인가. 필자는 이 조그만 공간을 두고 한참이나 망설였다. 그 때만해도 완전히 '절필(絶筆)'한 상태인지라 적당한 답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무직'이라고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식에게 부끄럽고, 담임선생님에게 창피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일단 건너 뛰어 다른 사항을 먼저 기재했다. 그리고 다시 '부모직업'란으로 돌아왔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말에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것이 있다. 용맹하기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군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해병대 출신들이 자랑삼아 내세우는 슬로건이다. 실제로 주변에서 그러한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필자는 여기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사실 언론계에서도 "한번 기자는 영원한 기자"이라는 인식이 오래 전부터 전·현직 기자, 즉 언론인들의 뇌리에 박혀있다. 사람들은 행정관서의 장관이 자리에서 물러나도 '장관'으로, 군대의 장성이 전역을 해도 '장군'으로, 대학의 교수가 강단을 물러나도 '교수'로 부르며 예우를 해준다.

신문기자들도 현직을 떠난 사람들에게 부장이나 국장 등 근무당시의 직책을 불러주기도 한다. 그러나 성이나 성명을 붙여 '000선배'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 물론 기자들의 전통 때문에 '선배님'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냥 '선배'이다. 그 것만으로 선배언론인에 대한 최대의 예우가 되는 것이 기자사회의 독특한 관행이다.

이까지 얘기했으니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필자가 환경조사서에 쓴 답(?)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그렇다. 바로 '언론인'이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오랫동안 고민을 한 것이 억울(?)할 정도였다. "한번 기자는 영원한 기자"라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게 되니 왠지 기분이 뿌듯해졌다.

그리고 1997년 말 딸아이가 수능고사를 치른 뒤 대학에 제출한 입학원서를 쓸 때였다. "아빠의 직업을 무어라고 써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자기로서는 꽤 고민을 한 모양이었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놀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물론 바로 튀어나온 대답이 '언론인'이었다. 한번 기자는 영원한 기자, 한번 언론인은 영원한 언론인인데 망설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과연 언론인인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자문을 해본다. 대답은 언론인의 역할을 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필자는 1999년부터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정보사회칼럼(또는 e-시사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1985년부터 2년 동안 체신부에 출입하면서 '정보화사회'에 대해 나름대로 천착(穿鑿 : 어떤 내용이나 원인 따위를 파고들어 알려고 하거나 연구함)해온 터여서 이 분야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필자의 현재나이가 59살이니 남들이 보기에는 이런 글을 쓰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20년 정도를 '공부'했고, 앞으로도 할 생각이므로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다고 믿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우리 같은 나이의 '늙은 네티즌들'이 더 많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야 정보선진국이 될 수 있는 바탕이 튼튼해질 것이 아닌가.

최근 우리사회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필자는 이를 두고 '혁명적'이라고 부르고 싶다. 전국의 대학들이 일제히 이번 정시모집부터 입학원서에 '부모직업란'을 삭제했다니…. 여간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요즘처럼 그냥 놀고 있는 부모들이 많은 상황에서 '부모직업란' 때문에 고민하거나 속상해 하는 부모와 자식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번 조치는 반갑다 못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각 대학이 작성한 입학원서에는 부모의 직업과 직장연락처를 기재토록 강요(?)해 왔었다. 이런 관행은 따져보면 개인의 인권 및 사생활을 침해하는 일이고, 대학측이 학생들을 차별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 달 초 교육부에서 이런 것들을 없애줄 것을 권고했다고 한다.

그동안 부모의 재산 정도와 지위가 입학원서에 밝혀짐으로써 프라이버시가 침해될 우려뿐만 아니라 선발의 공정성이 훼손될 여지도 많았었다. 국가와 사회의 정보화가 심화될수록 인권이나 사생활 침해의 우려가 높아지는 마당에 교육부와 대학들이 이 같은 노력을 기울이는 일은 앞으로의 사회가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 2004.12.24

댓글 쓰기

목록 삭제
Copyright © 최용우 010-7162-3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