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무엇이든 › [칼럼니스트No.1120 ] 섣달 그믐날 신새벽에 내린 눈

이재일 | 2005.01.08 12:11:34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2004년 12월 31일

이재일 (정보통신 칼럼니스트)

첫눈이 내렸다. 그것도 부산에서. 그리고 12월31일 날이 밝기 전인 새벽에. 다른 때처럼 조금 온 게 아니다. 제법 많이 내렸다. 아파트 화단에 서있는 나무 위에도, 주차장에 세워진 차량 위에도 수북히 쌓였다.

부산에서의 눈은 거의 경악에 가깝다. 몇 년에 한번씩 볼 수 있는 것이어서 그렇다. 이 때의 경악은 '두려운 놀람'이 아니라 기쁨의 그것이다. 기쁜 놀람-. 그것처럼 가슴을 뛰게 하는 것도 없을 것 같다.

필자로서는 오늘 아침처럼 부산에서 수북히 내린 눈을 보기는 40년만의 일이다. 2000년 1월에 한번 큰 눈이 내렸지만, 당시에는 일본에 가있는 바람에 볼 수가 없었다. 아쉬움이 얼마나 컸던지 모른다.

1964년 2월이던가? 그 때 많은 눈이 내렸었다. 부산에 눈이 쌓인 것은 필자의 기억으로는 1950년대 초반 6·25동란 중인 어느 해 설날 전에 한번 내린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리고 거의 50년 만에 쌓인 눈을 보지 못했으니 불운(?)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오늘 오전 7시. 사무실로 가기 위해 집밖을 나서자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기쁨의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곧 바로 아내에게 휴대폰을 걸었다. '밖에 눈이 엄청 왔으니 내다 보라'고. 출근시간이 8시까지이지만, 이런 날엔  2시간 정도 늦어도 용납이 되므로 10시쯤 도착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차를 몰았다.

'오늘, 눈 위를 달리는 나의 운전솜씨를 보여줘야지!' 이렇게 마음먹고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큰길로 나왔다. 눈 자주 오는 서울생활 33년에 운전경력 20년이니까 자신이 있었다. 목적지는 경남 양산시 웅상읍 소주리. 거리는 정확하게 30㎞. 주행시간은 보통 1시간 가량. 그래서 소요시간을 평소의 2배로 잡았던 것이다.

예상은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큰 길, 작은 길, 샛길을 누비며 사무실에 간신히 당도한 것은 정확하게 3시간 30분 뒤인 오전 10시30분. 그러니까 2시간 반이나 지각을 한 셈이다. 모든 차량들이 '거북이'가 됐으니 어쩔 수 없었다. 비슷한 시간에 여러 명이 허겁지겁 도착하는 모습들이었다. 물어보니 적게는 3시간, 많게는 4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필자가 이른 아침 눈을 본 순간,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온갖 더러움으로 찌든 이 세상을 새하얗게 탈바꿈시켰으니 마음까지 깨끗해지는 듯했다. '그래, 이 눈이 당동벌이(黨同伐異)로 대변되는 올해의 마지막 날 꼭두새벽에 우리 인간들이 저지른 잘못과 어리석음, 반목, 질시, 불화 등 모든 죄과를 덮어주려 하는구나!' 하얀 눈을 처음 보는 순간의 마음은 그랬다.

그러나 곧이어 닥친 출근전쟁-. '장난'이 아니었다. 전쟁이라는 말로도 모자랄 정도였다. 눈길 운전이 서툰 부산사람들인지라 엉금엉금 기는 것이었다. 거의 꼼짝도 못하는 상황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신새벽의 하얀 눈'이 우리에게 기쁨을 준 것도 잠깐이었다. 결국은 몇 시간씩의 고통을 안겨줄 뿐이었다.

필자는 운전석에서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워낙 서행을 하니 그럴만한 여유는 있고도 남았다. '눈이 내려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은 것은 어디까지나 눈가림이다. 더러운 실체는 그 밑에 숨겨져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은 하양이지만 가려져 있는 것은 검정이 아닌가. 그렇다. 오늘 아침의 눈은 우리에게 이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결국 흰눈은 우리 모두가 지금 어디에 서서 무엇을 보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되새겨볼 것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었다.

'각성하라!'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눈은 그때부터 이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잘못을 깨닫고 반성하지 않으면, 새롭게 출발하지 않으면, 너희들은 망하고 말 것이라는 메시지를 하얀 색깔로 눈이 부시게, 그리고 강력하게 던져주고 있었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우리는 입버릇처럼 지난 한해를 '다사다난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2004년은 정말 더럽고, 부끄럽고, 어이없고, 황당한 각종 사건·사고로 얼룩진 한해였다. 기쁜 소식보다 나쁜 소식이 훨씬 많은 한해였다. 정치·경제·사회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상황'의 연속이 아니었던가. 그나마 문화부문에서 많은 성과를 올린 것은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원래 눈은 그 자체가 순수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흴 수가 없다. 그리고 정확하다. 눈의 종류마다 모양을 조금씩 다르지만 반드시 육각형을 이룬다. 조물주가 정교하게 만든 걸작품이다. 그런데 요즘의 눈은 스스로는 순수를 유지하기 힘든다. 세상이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발생시키는 매연 같은 물질들은 대기를 더럽히면서 눈도 오염시킨다. 그래서 그냥 눈이 아니라 '산성눈'으로 만든다. 그래서 옛날처럼 눈을 맞는 기분이 꼭 좋은 것만도 아니다. 밖에 늘어놓아야 하는 황태나 한천 등 말릴 것들은 산성화된 눈 때문에 품질이 어떻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낳기도 한다.

오늘 아침에 내린 하얀 눈-. 그 눈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고,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 자연의 선물이었다. 자연이 주는 선물은 너무나 고귀한 것이다. 이걸 그냥 받아서는 안 된다. 보답을 해야한다. 그렇게 하려면 서로가 얼굴 붉히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내가 먼저 양보하고, 내가 많이 이해하면 세상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교수신문'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四字成語)'는 앞에서 언급한 '당동벌이(黨同伐異)'이다. 그 뜻이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끼리 한패가 되고, 다른 의견의 사람들은 배척한다'는 뜻이어서 모든 국민들이 '옳다'하며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내년에 가서도 당동벌이가 계속된다면 큰일이다. 그렇게 되면 정치가 완전 실종되고 경제는 바닥으로 추락해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어지러웠던 갑신년의 마지막 해를 쳐다보면서 '다른 점이 있더라도 같은 점을 취하면서 서로의 의견을 좁혀나간다'는 뜻을 지닌 '구동존이(求同存異)'가 '2005년의 사자성어'로 선정되길 간절히 기원해본다.

                 - 2004.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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