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무엇이든 › 오늘날 세상에 비치는 기독교인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7 | 2012.10.17 18:49:53 | 메뉴 건너뛰기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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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기독교는 이제
더 이상 본받을 만한 대상이 아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목회자들의 부끄러운 모습들이
매스컴을 타고 있다.

거룩함을 완전히 상실한 채
세상에 잠식되고 하나가 되어버린
그리스도인이 범람하고 있다.

대적자들은 전세계에서
기독교의 치부를 찾아내어 기사화한다.

일반 신자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은 기독교인 이라고 밝히는 것을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생각할 정도이다.

기독교는 이제
모두에게 만만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기독교가
나락으로 추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깊이 없는 성장’ 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한국에는 지금 할 수만 있다면 교회 건물을 더 크게 지으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가
빚을 지면서까지 교회를 확장한다.

그것도 건축비의 30%, 50%가 아니라
80% 이상을 빚을 내어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다.

심지어 은행을 먹여 살리는 곳은
교회라는 소문이 들릴 정도이다.

개인의 경우,
80%의 빚을 내어 집을 짓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왜 이렇게 하는 것인가?

그것은 담임목사의 ‘잘못된 믿음’ 때문이다.

교회를 크게 지으면 지을수록
건물에 비례하여 성도가 채워질 것이다,
라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 교회에 채워지는 성도는
새롭게 전도되어 입교한 초신자가 아니다.

그들은 대부분 작은 교회에서 큰 교회로,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수평 이동한 사람들인 것이다.


결국 건물을 크게 지어서
자신의 교회에 성도수를 많게 하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탐욕이라고 불릴 만 하다.

새로운 선교지역을 개척하기 보다는
더 큰 헌금 빨대를 만드는데 열심이다.

그들은 큰 건물만 남긴체
텅 비워져버린 유럽교회의 망한 모습을
닮아가고 싶은 것일까?


바울은 삶은 복음 전도자, 개척 선교사,
교회 개척자의 모습이다.

바울의 목표는 회심자들을 얻고,
교회를 세우고,
그런 다음 떠나는 것이었다.

물론 목회자, 교사의 모습도 있지만
그것은 단지 작은 이미지에 불과했다.

한국 교회가 교회 건물이라는 성을 쌓고
후손에게까지 세습까지 해주면서
“평온하다, 평안하다” 하는 동안,
교회는 선교의 야성을 잃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 결과, 기독교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 당해버렸고
결국 선교는 막히고 말았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잊어버린 체,
자신이 왕이요,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목회자가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면서
결국 교회는 성령의 능력 조차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성도들 또한,
맹목적으로 목회자를 따르는 사람과
그리스도를 모르는 형식적인 신자들이
교회의 자리를 채워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스도인의 성숙이란,
하나님께 ‘사랑으로 예배드리고’
사랑하기에 순종하면서
그 분과 성숙한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잘 아는 교인들은
얼마 없는 것 같다.


안타깝지만, 지금의 교회들의 중심에 있는
그리스도의 자리에는
예수님이 아니라 담임목사가 차지하고 있다.

담임목사의 말을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며,
그것이 주님의 축복을 받을만한 일이라고 잘못 가르쳐왔다.

목회자는 단지 주님의 종일뿐,
지도자나 통치자가 아닌 것이다.

교인들에게「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려주고」
마음에 감동이 와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해주어야 할 설교 자리에는
축복 설교, 세상 성공,
또는 정치적 이야기 등이 채워져 있을 뿐이다.

수백억 수천억의 교회 수입을
교회건축비 또는
목사 지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선교와 구제를 위해 사용하였다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이 아니라
교인들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할수 있게 되도록
기도하며 연구하였다면,
단지 무늬만 성장하는 수평이동이 아니라,
새신자들로 교회들은 채워지며
주님의 사랑 안에서 모든 성도들이
한 지체, 한 마음이 되며
하나님 나라는 더욱 확장되었을 것이다.


부흥의 원리는 분명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부흥하거나 쇠퇴하게 된다.

하나님이 실제 존재하시는 나의 아버지이고,
그 분은 나를 살려줄수만 있다면
자신의 귀한 친아들조차 십자가에 제물로
바칠수도 있었으며,
예수님 또한, 나를 구원할수만 있다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고문받더라도 상관없었다, 라는
하나님의 진심을 마음에 새기고
그 하나님의 진심어린 사랑에 감격하는 사람이
서서히 많아질수록,
교회는 부흥할수밖에 없다.

이제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신
사랑하는 주님을 위한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한 힌두인 교수는 크리스챤인 그의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슬림 출신의
이스칸다르 야디드 목사의 말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오늘날 이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아 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명예롭게 고난받을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교회 성도들은
어째서 제자처럼, 바울처럼,
그리고 초대 교회 성도들처럼
날마다 하나님께 감격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일까?

왜 세상 사람들처럼 똑같이
돈을 좋아하고 탐욕스럽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며 세상 문화를
따르는 것일까?

목회자들은 어째서 당시 예수님을 못박아죽인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 장로들처럼
자신이 최고인줄 알고
스스로 높아지고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그들 자신이 스스로
대제시장이나 서기관이나 장로들과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목회자의 신분증과 같은
섬김과 낮아짐의 모습을
오늘날 찾아보기 힘든 것은 왜일까?

그리스도인의 명예와 영광인
박해와 고난을
오늘날 한국교회는 왜 멀리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고난 같은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직 축복, 오직 형통만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부와 건강, 잘 먹고 잘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원하시는 것이다,
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교육의 기초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이다.

이 마음 없이 받는 교육과 행동과 노력은
하나님의 뜻과 아무 관련이 없을 뿐더러,
하나님께서 원하시지도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진심’ 을 원하신다.

“너를 너무 사랑해서
너를 위해서라면
나는 회당에서 주먹질과 침뱉음도 당할수 있었고,
멸시와 욕설도 받을수 있었고,
갈고리 채찍을 맞으며 고문당할수도 있었으며,
그 무거운 십자가도 짊어지고 갈수 있었고,
나무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어줄수도 있었다.

내가 너에게 바라는 건 다른게 아니다.

부디 ‘내 사랑을 받아달라는 것’ 이다.

이 ‘나를 좀 알아달라는 것’ 이다.

너를 구원해주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수 있었던 나를 말이다.”

라는 주님의 진심을 알아가는 것.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원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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