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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환균 | 2023.08.31 09:06:33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예수님의 역사적 부활, 왜 그리 중요한가?
영원한 손실
“무단횡단의 종착지는 건너편이 아닙니다”, “그깟 졸음에 목숨을 거시겠습니까?” 도로에 내걸린 현수막 구호들이다. 죽음 이후 무엇이 기다리는지를 안다면 이런 표현조차 너무 여유롭다. 빨리 죽는 것도 손해지만 그조차 사후의 영원한 손실에 비하면 약과다.
부자연스러운 죽음
유명인의 부고 기사에는 그의 생전의 업적이 실린다. 그런데 정작 그가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었다는 말이 없다. 사람들도 여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사람은 다 원치 않는 죽음을 일방적으로 당한다. 그래서 죽어도 결코 자연스럽게 계속 죽어 있지 못한다.
안 믿는 이유
사람은 타인의 죽음은 믿어도 자신의 죽음은 안 믿는다. 왜 그럴까. 실제로 사람은 결코 죽지 않아서다.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이 의식은 죽어 없어질 성질이 아니다. 영혼과 분리되어 흙으로 돌아간 단백질 덩어리 역시 약간의 시차만 둘 뿐 영원히 안 없어지는 건 똑같다.
가장 큰 문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실은 죽는 것보다 영원히 안 죽는 것이 영원히 가장 큰 문제다. 지옥의 고통은 지금처럼 상처받고 흠집나기 쉬운 연약한 사람의 몸으로는 못 견딘다. 그래서 죄인도 영생불사하는 부활의 몸을 새로 받고는 영원한 불못에 던져진다.
이것만으로도
내가 하나님이라면 영원히 진짜 사람도 되고 진짜 하나님도 되는 성육신 사건을 찜찜하게 여겼을 듯싶다. 예수님은 몸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님이시지만 시공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셔서 내 몸과 똑같은 사람의 몸을 입으셨다.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신기하고 감사한가!
실패한 리더(?)
예수님이 죽기 직전에 제자들은 다 도망갔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실패한 리더였다. 부활이 없었다면 무엇이 제자들에게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예수를 전하게 했을까. 무엇이 로마 카타콤에서부터 유럽을 정복하고 지금 한반도에까지 우후죽순 교회가 생겨나게 했을까.
믿고자 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역사적 부활을 믿지 못해 만들어낸 가설들이 많다. 십자가에서 죽은 듯 잠깐 기절했다가 무덤에서 다시 깨어났다거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숨겨두었다거나, 스승의 환영을 보았다는 주장들이다. 먼저 믿고자 하지 않으면 끝내 믿음을 가질 수 없다.
평범한 기적
2천 년 전 한 중동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한 후 하늘로 가 있다가 다시 지상에 온다는 말은 얼마나 황당한가.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sky)과 우주 공간(space)를 지나 천국(Heaven)에 올라가 계신다. 지금 내가 기적적으로 공중에 떠 있는 지구에 실려 사는 거랑 뭐가 다른가.
전직 목수의 현직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승천해 가신 천국이 없다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그분을 믿고 죽은 수많은 신자들의 마땅한 거처 또한 없다. 전직 목수였던 예수님은 지금도 천국에서 건축공사장의 감독처럼 성도들이 거할 집 짓는 일을 부지런히 맡고 계신다(요 14:2-3).
천국에도 있다
천국에도 내가 좋아하는 숭늉이 있을까. 내가 믿기로 죄나 사망과 관련된 것 말고 이땅의 자연과 문명을 포함해 모든 좋은 것은 천국에도 다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과 승천은 천국이 단순히 영의 상태가 아니라 몸의 상태, 자연의 상태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천국의 숲
“숲이 참 좋다. 천국의 숲은 얼마나 더 좋을까!” 가족과 함께 등산하며 내가 내뱉은 말이다. 천국의 울창한 산림과 생명수 강과 대도시들, 진귀한 동식물들, 하나님의 보좌와 천사들... 지옥 가는 것도 문제지만 영생의 천국을 놓치는 건 영원히 더 큰 문제다.
영육일원론
기독교는 영육이원론이 아닌 영육일원론을 가르친다. 하나님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고, 그 사람의 영혼과 몸을 모두 대속하시려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데서도 알 수 있다. 천국을 이땅에서 앞당겨 경험하는 신자들이 지금 몸으로 하는 모든 일이 거룩하며 영원하다.
그때부터
세상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 죽음, 부활이 다 아득히 먼 옛날의 전설이나 종교적 우화처럼 들린다. 어느 날 성경이란 한 종교 경전 속에 갇혀 있던 그 이야기가 지금 내 삶에 그 무엇보다 생생한 현실이 될 때 비로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 그때부터 모든 일상이 예수가 된다.
문외한 VS 전문가
세상사람들은 이땅의 삶에서는 기독교인들보다 더 능란하지만 죽음이나 그후의 삶에는 문외한이다. 기독교인이 세상사람들을 궁극적으로 감동시키거나 변화시키는 길은 하나다. 죽음을 정복하신 부활의 예수님을 죽음에 종노릇하지 않는 각자의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함께 죽고 함께 사는 믿음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가 중요하다. 내 죄를 용서해주신 십자가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그 십자가에서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의 새생명으로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사는 것까지에 이르는 믿음이 참된 구원의 믿음이다.
-안환균, <빛과소금>(두란노) 2018년 4월호 '키워드 단상 변증'
왜 많은 사람이 ‘예수’로 인해 실족하는가?
난 포기 안 할 거니까
내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뜨겁게 만나기 전 아주 힘든 구도의 방황기를 보낼 때 어두운 골목길을 걸으며 종종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난 절대 하나님 포기 안 할 거니까 하나님도 날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그때 그 기도를 하나님은 몰래 듣고 계셨다.
진짜 미스터리
인류역사를 통틀어 최대 미스터리는 예수님이다. 그분이 이땅에 한 번 생존한 적이 있다면 ‘그런 사람이 있었구나’ 하고 그냥 지나치면 큰일난다.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이라 한 자는 C. S. 루이스의 말대로 사기꾼이거나 정신병자거나 진짜 하나님이거나다.
상식적으로 지나치면
예수님을 진짜 이상한 분이라고 느끼면서부터 그분을 제대로 알아가기 시작한다. 진짜 수수께끼 같은 존재라고 자각하면서부터 더 이상 그의 존재가 적당히 숨어 있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본색을 드러내게 만든다. 예수님을 상식적으로 지나치면 영원히 지나친다.
영원한 발자국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인류역사에 영원한 발자국을 한 번 남기셨기에 아무도 이 사실을 피해가지 못한다. 그분으로 인한 심판도 누구에게든 한 번은 지나간다. 하나님이 사람이 된 적 없다면 차라리 속 편할 뻔했다. 괜히 사람으로 태어나 애매히 엮이게 됐다.
사건의 전모
예수님 사건을 그가 불세출의 종교적 슈퍼스타가 되고 난 상황에서 보면 전모가 안 보인다. 교통도 정보망도 지금과는 딴판인 환경에서 깡촌 출신 무명의 순회설교자, 떠돌이 마술사로 불린 한 목수 청년이 눈에 들어오면 비로소 온갖 잡다한 포장이 벗겨진다.
주목받지 못한 뉴스
예수님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로마제국의 주된 관심사는 속국들 가운데서 정치적 민중 봉기가 일어나느냐 여부였다. 변두리 속국의 하나였던 유대땅에서 단순한 종교적 시비거리의 희생물로 처형된 한 천민 출신 선동가의 죽음은 한 줄의 뉴스거리도 되기 어려웠다.
비조작적인 실존 증거
1세기의 로마 역사가들은 주로 정치적인 주요 사건들만을 기록으로 남겼다. 예수님과 관련된 이야기는 그런 굵직한 사건들을 취급할 때 곁다리로 딸려들 경우 지나가는 말로 잠깐 언급되었다. 이보다 더 비조작적이고 사실적인 예수님의 역사적 실존 증거도 없다.
애매한 걸림돌
예수님을 제대로 알려면 그분을 한 사람의 평범한 역사적 존재로 인식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괜히 덤벙대며 이것저것 건드리다 말면 그분만큼 더 애매모호한 걸림돌도 없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눅 7:23).
한 발짝만이라도
예수님에 대해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실족하지 않는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무성한 시대에 그분에 대한 진실을 알기 위해 한 발짝만이라도 더 진지하게 나아와보지 않으려는 이들이 실족한다. 실족은 실족하지 않을 기회가 많았던 사람들에게만 일어난다.
근육질의 중동 남자
예수님이 이땅에서 목수였다는 건 낭만적인 그림이 아니다. 당시 목수는 돌이나 쇠, 목재로 자잘한 농기구를 만들고 크고 작은 건축 일까지 챙긴 막노동 잡역부였다. 주님은 성화 속의 여리고 온유한 이미지의 서양 남자가 아닌 단단한 근육질의 중동 남자였다.
문자 이전의 말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저 종교 경전 속의 어록이 아니다. 특정 시간에 특정 대상에게 실제로 공기를 가르며 전하신 말씀이다. 그것이 보편적인 구전으로 교회 안에 널리 가르쳐지다가 문자로 기록된 것이다. 기록되기 전에 더 생생히 살아 있었던.
구전의 위력
성경과 탈무드를 중심으로 암송을 중시한 고대 유대 문화에서 구전은 기록보다 더 정교하고 정확했다. 복음이 이방으로 전해지면서 기록된 문서를 중시한 헬라 문화에 적응시킨 전도매체가 복음서다. 그러나 복음서 이전에 교회 안에는 이미 완벽한 복음이 있었다.
신화일 수 없는 이유
어떤 존재나 사건을 신화로 만들려면 적어도 100년은 걸린다. 그러나 예수님 사건은 아주 짧은 시간에 수많은 목격자들에 의해 역사적 사실로 굳어졌고, 그를 죽인 자들이 살아 있을 때 공식 문서화되었다.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약 5:6).
모세 같은 선지자
예수님 사건에 대한 증인인 사도들의 공개적 전승은 구약성경을 기초삼았다. 모세 같은 선지자 예수님이 나실 때 모세가 날 때처럼 아기들이 죽임당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구약 십계명을 받았듯 예수님도 산에 올라 신약 산상수훈을 선포했다. 예수님은 역사다.
정말 안다면
온 우주를 만든 무한광대하신 하나님이 정말 볼품없는 목수로 이땅에 와 나를 위해 죽었다면, 그 사실을 누군가가 정말 안다면, 그는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르고 평생을 무명으로 살고 모든 걸 다 드려도 아쉽거나 아깝지 않을 것이다. 정말 그 사랑을 안다면.
-안환균, <빛과소금>(두란노) 2018년 5월호 '키워드 단상 변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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