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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목사] 반역하는 지도자 vs. 슬기로운 지도자

묵상나눔 윤용 목사............... 조회 수 44 추천 수 0 2020.07.11 08:03: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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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하는 지도자 vs. 슬기로운 지도자]

(이사야 1:21-31)

지도자는 중요하다....
어떤 지도냐에 따라 공동체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두 종류의 지도자를 대조하신다.

1. 반역하는 지도자

(사 1:23, 새번역) 너의 지도자들은 주님께 반역하는 자들이요, 도둑의 짝이다. 모두들 뇌물이나 좋아하고, 보수나 계산하면서 쫓아다니고,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지 않고, 과부의 하소연쯤은 귓전으로 흘리는구나.

'반역하는' 이라는 표현이 지도자에게 어울릴까?
지도자 자체가 가장 높은 위치인데
성경은 왜 '반역'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반역'이란 자신보다 높은 존재에게 하는 것이다.
즉 지도자에게는 더 높은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말이다.

반역하는 지도자가 되고 도둑의 짝이 되는 이유,
그래서 뇌물이나 좋아하고 보수나 계산하면서 쫓아다니는
패역하고 비루하고 지저분한 지도자가 되는 이유는,
자신보다 더 높은 존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더 높은 존재는 누구일까?
'하나님'일까?
그건 너무나 당연하지만
연결되는 구절은 다소 의외다.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지 않고,
과부의 하소연쯤은 귓전으로 흘리는구나'
라고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지도자보다 높은 존재는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하게 백성이 되어야 하고
백성 중 가장 아픈 존재인 '고아와 과부'가 되어야 한다.

백성이 지도자보다 높다.
가난하고 소외받고 아프고 슬픈 존재가
이 땅에서 제일 높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자신이 가장 높다 생각하고
뇌물이나 좋아하고,
어디를 가든 받을 보수나 계산하는 자는
결코 지도자가 되어선 안 된다.

정치지도자도 마찬가지고,
종교지도자도 마찬가지다.

뇌물 받기에 혈안이 된 정치지도자는
자신보다 더 높은 존재가 없다고 오해하기 때문에
그런 짓을 마음껏 저지른다.
자신보다 더 높은 존재인 '하나님'이 계시고
자신보다 더 높은 '법'이 있고
자신보다 더 높은 존재인 '백성'이 있는데
그 모든 존재를 깡그리 무시하고 돈만 좋아한 자들이
과거에 정치지도자가 되어 이 나라를 얼마나 망쳤는지 모른다.

교회에서 월급을 수천만원, 심지어 수억을 받으면서도
청년부 헌신예배 설교를 하면서
또 수백만원을 강사료로 받는 목사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다.

넘치도록 많은 액수를 매월 사례로 받으면서
교인 심방 한번에 수천만원을 받는 유명 목사도 있다고 하니,
그들은 자기보다 높은 존재인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분명하고,
자신보다 성도들이 더 높다는 사실,
자신이 성도들을 위해 세워진 존재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악한 지도자들로 인하여
어떤 나라가 되고 어떤 교회가 되고
어떤 공동체가 될까?

(사 1:21, 새번역) 그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녀가 되었습니까? 그 안에 정의가 충만하고, 공의가 가득하더니, 이제는 살인자들이 판을 칩니다.

정의를 모르는 공동체,
공의를 무시하는 공동체,
살인자들이 판을 치는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다.

2. 슬기로운 지도자

(사 1:26, 새번역) 옛날처럼 내가 사사들을 너에게 다시 세우고, 처음에 한 것처럼 슬기로운 지도자들을 너에게 보내 주겠다. 그런 다음에야 너를 '의의 성읍', '신실한 성읍'이라고 부르겠다.

하나님이 한 공동체를 회복시키실 때
가장 중요하게 하시는 일은
그 공동체에 '슬기로운 지도자'를 세우는 일이다.

슬기로운 지도자가 세워지고 나면
그 공동체에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그 공동체가 '의의 성읍', '신실한 성읍'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슬기로운 지도자란 어떤 지도자일까?
능력있는 지도자가 아니고,
힘 있는 지도자도 아니고,
리더십 있는 지도자도 아니고,
돈 많고 학벌 좋은 지도자도 아니라
'슬기로운' 지도자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슬기'다.
'슬기'는 '지혜'인데,
어떻게 해야 지도자는 슬기(지혜)로워질까?

(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지혜와 지식을 얻는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일까?

(시 119:98)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하나님의 계명, 즉 하나님의 말씀과
늘 함께 하는 것이 사람을 지혜롭게 한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여 말씀이 알게 하는 삶의 원리를 알아가고
그 삶의 원리들을 자신의 일상에 적용해 나가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 슬기로운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슬기로운 지도자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일까?
돈일까? 명예일까? 성공일까?
그런 것이 될 리가 없다.

(잠 3:14)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를 얻는 것,
말씀을 통해 슬기를 얻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슬기로운 지도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면
자신이 돈보다 지혜를 사랑하는지,
은과 금과 성공보다 슬기로운 지도자가 되길 더 원해서
말씀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고,

백성이나 교인의 입장이라면
정치지도자나 목회자가 돈을 좋아하는 반역하는 지도자인지
지혜를 사모하는 슬기로운 지도자인지를
잘 분별해야 할 것이다.

이 분별력은 있으면 좋은 정도가 아니다.
없으면 공동체가 함께 망하게 되고,
있으면 공동체가 참된 생명으로 충만하게 된다.
없으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분별력이다.

3. 나는?

슬픈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세계적으로 악하고 강포한 자들이 지도자가 되고 있는 세상,
그나마 정상적으로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이
이 땅에 세워졌다 싶은데,
그 지도자들이 마음껏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지 못하도록
수구세력들이 갖가지 음모와 거짓을 일삼으며 막는
슬프고 아프고 괴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 와중에 더 악한 자들은
더 큰 죄를 짓고도 뻔뻔하게 활보하고 다니는데
그나마 덜 악한 지도자는 목숨을 던져버리는 슬픈 시대다.

나는 가능하면 지도자 안 하고 싶었다.
그 무거운 책임이 나같은 소시민에게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적합하지도 않다 여겨서
신자답게 살아가는 평신도로 살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리 살아도 '신자다운' 삶을 살기 어려웠다.
신자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런 삶을 서로 도전하는 공동체가 있어야 하는데,
다녔던 교회에서 서로 신자다운 삶을 도전하기 위해
말씀을 묵상하고 나누는 모임을 만들려고
부단히 시도하고 또 시도했었다.

그런데 번번히 실패했다.
되는 듯 하다가 되지 않았다.
생각보다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 드물었고
말씀에 갈급한 사람은 더 드물었다.

말씀을 삶에 적용해보고자 애쓰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일개 집사가 아무도 시키지 않는 묵상 세미나를
목사님 찾아가서 허락받아서 하고,
세미나 끝나면 묵상 나눔 모임을 하고,
일대일 성경공부를 했던 것은
우선은 내가 살기 위해서였고
말씀 공동체로 함께 성숙해 가고 싶어서였다.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일반신자로서 그 일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씀 사역을 하고 싶어서,
말씀으로 삶을 나누는 공동체를 세우고 싶어서
무작정 부산의 삶을 정리하고
경기도로 올라와서 신학공부를 했다.

'지도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없었다.
교회를 세웠을 때에도
내가 '지도자'가 아니고 싶었다.
그냥 함께 걸어가는 공동체이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도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
그저 주일에 설교 한 번 듣는 것으로 끝내버리는
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많이 슬펐다.

교인들이 거의 다 떠나버린 한번의 실패를 경험하고
다시 교회를 시작했을 때
나는 '지도자'로서의 힘을 가져야 하나 싶었다.
목에 힘을 주고 권위를 보여주고
경고나 협박의 말을 설교하는 그런 짓을 해야 하나 싶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런 것을 할 재주가 없었다.
나 자신이라도 살자 싶었다.
남은 3명의 성도들만이라도 말씀의 사람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돕자 싶었다.

그리고 한 사람 붙들고 일대일 성경공부를 했고
말씀에 삶을 걸자는 설교를 거의 매주일 했다.

똑같이 했을 뿐인데
이제는 한 분 한 분 말씀을 사랑하는 분들이,
말씀에 갈급하여 허덕이는 분들이,
목회자들에게 상처를 받아서 갈 곳을 찾지 못하는 분들이 오셨다.

말씀을 묵상하고 나눔을 하는 일이
조금씩 조금씩 되기 시작했다.
기뻤다. 행복했다.

그런데 나는 역시 '지도자'는 아닌가 싶다.
이렇게 행복하고 감사한 상황이 되어도
이 말씀의빛교회를 더 크게 키운다거나
말씀의빛교회를 더 부흥시킨다거나 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대신 작은 믿음과 중요한 목표가 하나 생겼다.
'말씀에 삶을 걸면 하나님이 나를 굶기시지는 않는구나'
하는 작은 믿음이었고,
'삶이 끝나는 날까지 타락만 하지 말자'
라는 중요한 목표였다.

그 작은 믿음과 중요한 목표로 인해서
나는 지금도 오직 한 가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에 삶을 거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할 뿐인데
놀랍게도 성도들이 한 분 한 분
말씀의 사람이 되어가시는 것을 본다.
볼 때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싶어서,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난다.

교회를 이전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교회가 가진 금액을 가지고서는
서울 안에서는 장소를 얻기 힘든 상황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다지 큰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건물주이신 집사님의 회사 사정이
너무나 잘 이해가 되었기에 섭섭함도 전혀 없었다.

그렇게 결정하시고 집사님 마음이 불편하지 않으시길
간절히 소원하는 마음 뿐이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상황을 알리고
교회를 이전할 장소를 함께 물색해 보자고 했다.
하루 저녁 동안 나도 여기저기 알아보았다.

베드로전서에서 이사야로 본문이 바뀐 다음 날 아침 묵상에서
여지 없이 나의 깊은 내면을 건드리시는 하나님을 만나면서
내가 지도자가 아니라 주님이 나보다 높은 지도자이심을,
내가 지도자가 아니라 성도들이 나보다 높음을,
나는 그저 성도들의 신앙의 진보를 돕는
조력자요 섬기는 자일 뿐임을 깊이 확인했다.

살 것 같았다.
말씀이 나의 내면을 만지시고
회복시키시고 새롭게 하시는
이 삶을 매일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싶었다.

교회의 장소는 어디가 되었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행복을 누리도록
최선을 다해 돕다가 내 삶이 마무리되면 되지 싶었다.

그리고 준비해서 마지막 체리 심방을 하러 갔다.
1시간 20분 동안 운전해 가면서
새로 등록하신 성도와의 만남이 설레었다.

운전해 가는 중에 전화가 왔다.
건물주이신 집사님이셨다.
매장으로 사용하는 건물의 다른 곳을 비워서
회사의 부족한 공간으로 사용하기로 했다고 하신다.

교회를 이전하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다.
교회를 불편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다른 방법을 찾아내신 듯 해서
죄송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했다.

회사의 필요, 직원들의 불편을 덜어주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앞으로도 부담 갖지 말고 교회에 말씀해 달라고 했다.
교회가 조금 불편한 것이 낫지
직원들이 불편을 감수하라고 하면서까지
교회가 그곳을 지키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슬기로운까?
모르겠다.
사실 관심이 없다.
슬기로워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날 자유롭게 하지 못할 것 같다.

그냥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고
그 모든 과정에서 서로를 오해하지 않고
이익과 손해의 관점으로 상황을 보지 않으려 할 뿐이다.

나도 성도들도 그저 말씀 하나에 삶을 걸고
담담히 걸어가길 소원할 뿐이다.
다른 것이야 좀 불편하면 불편한대로
조금 좋은 상황이면 감사하면서,
모든 관심을 말씀과 함께 하는 삶을
행복하게 누려가는 것에만 집중하길 간절히 바랄 뿐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긍휼히 여기시길,
주께서 한국 교회를 긍휼히 여기시길,
수많은 성도들을 긍휼히 여기시길,
무엇보다 나를 긍휼히 여기셔서 끝까지 타락하지 않고
이 길을 행복하게 걸어가길 소원하는 아침이다.
윤용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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