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무엇이든 › [6.25 아침에] 한국전쟁 깊이 톺아보기

조헌정 목사 | 2023.06.25 07:04:41 | 메뉴 건너뛰기 쓰기
[한국전쟁 깊이 톺아보기]
조헌정(향린교회 은퇴목사, 615남측위 상임대표 역임)
[목차]
1. 들어가면서
2. 왜 6월 25일인가?
3. 군사1급기밀에 해당하는 에치슨선언은 왜 했던 것일까?
4. 왜 스탈린과 모택동은 처음부터 도와주지 않았는가?
5. 왜 인민군은 서울 점령 후 전쟁을 멈추었을까?
6. 또 하나의 가정
7. 정전협정 작성에 2년이나 걸린 이유
8. 결국 전쟁의 혜택은 누가 입었나?
9. 나가면서
1. 들어가면서
올해 우리는 한국전쟁 발발 73년 그리고 휴전 70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이는 인류 역사상 동족간에 가장 긴 전쟁일지도 모른다. 남한은 지난 10년 이상 세계 최고의 자살율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수치는 OECD 국가 평균 두 배 이상임으로 앞으로 10년 동안은 이 지위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세계 최저의 출산율과 최고의 소득 불평등지수를 가진 매우 열악한 국가이다. 반면 동시에 남한은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에 7위의 군사대국이다, 이 상반된 수치는 정상적인 국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결과이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지만, 자살률 2위 국가가 또 하나의 분단국인 키프러스공화국임을 감안할 때, 가장 큰 요인으로 분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동족을 향한 극도의 적대감은 생명경시 현상을 낳고 이는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오백만 명의 사상자와 천만 명의 이산가족을 낳은 3년간의 치열한 전쟁이 없었더라면 설사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 지배정책(Divide and Conquer)에 의해 분단이 지속되었다 할지라도 남북간에 오늘날과 같은 뿌리 깊은 반목과 질시가 계속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록 정권에 따라 약간의 부침은 있을망정 과거 서독과 동독이 그러했듯이 남북교류는 끊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구촌 세계화 시대를 맞아 지난 20년 동안 몇 번의 남북정상회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직 대통령이 북조선을 향해 주적이라는 단어를 공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전쟁으로 인한 증오심이 국민들 속에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말해 남북통일은 아직 요원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대화조차도 끊어진 상황에서 평화통일은 하나의 신기루에 불과한 얘기이고, 무력통일 또한 핵무기를 비롯한 가공할만한 수많은 신무기가 쌍방에 존재하는 이상 민족 전체의 죽음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통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마음속 분단의 장벽을 허무는 일 외에는 없고, 이 마음속 분단의 장벽을 허무는 일은 한국전쟁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고 본다. 개인의 상처는 시간이 가면서 점차 잊혀가겠지만, 역사 인식이 잘못됨으로 인한 미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집단 기억을 통해 더 증폭되어가기 때문이다. 작년 6월 25일에는 유치원생들이 국군묘지에 가서 ‘결코 잊지 않겠다’는 현수막 아래 헌화하는 사진을 언론을 통해 보았다. 철모르는 아이들에게조차 증오심을 키워주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첫째, CNN, BBC 등등의 방송에서 코리아 관련 뉴스를 보도할 때, 한국전쟁이 남북분단으로 인해 생겨난 전쟁이 아닌,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북분단이 생겨났다고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얘기를 할 때가 많다. 둘째,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일어난 남북분단을 미소 냉전의 결과라고 교과서에서는 말하지만, 정확하게 말해 미국이 제안한 것을 소련이 받아들인 것이다. 소련은 본래 일본을 분할점령하기를 원했다. 셋째, 남한사람들의 친미/종미적인 경향은 한국전쟁시에 목숨을 걸고 남한을 지켜주었다고 하는 고마운 생각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는 병 주고 약 주기식의 제국의 교활함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몰역사성에 있다. 미국이 남한사람을 좋아해서 지켜준 것이 아니라, 당시 소련 공산주의 진영과의 대결 과정에서 코리아반도에서의 패배는 미국의 세계패권 전략에 결정적인 타격이 되기 때문이다. 코리아반도가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간다면 일본이 이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요 그렇게 되면 미국은 태평양과 인도양의 통제권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미국에게 있어 코리아반도는 세계패권유지에 있어 결정적인 요충지가 되는 것이다.
넷째,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김일성정권에 의해 일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남한사람 절대 다수의 생각이다. 그래서 남한에서는 625전쟁이라고 부른다. 6월 25일 새벽 김일성정권이 남침을 시작하였다는 것은 맞는 이야기이지만, 삼일 전 6월 22일 서부전선에서 국군의 해주 침공이 있었고, 멀리는 1948년 8월 15일과 9월 9일 남과 북에 각각의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후 1950년 6월 25일까지 약 1년 반이라는 기간동안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간에는 400번 이상의 크고 작은 전투가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이 기간동안 남한에서만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분단으로 인해 희생이 되었다. 38선은 물론이요 제주와 여수, 순천, 대구 등등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수많은 분쟁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생명이 희생되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의 시작을 단순히 1950년 6월 25일로 보는 견해는 너무나도 안이한 역사 인식이다.
해방/분단 이후 지난 78년 동안 남북은 서로에 대한 비난만을 일삼아 왔으며 이로 인한 역사 왜곡은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냈다. 예를 들면 남한의 많은 사람들은 13년 전 천안함침몰사건을 북조선의 어뢰공격으로 알고 있지만, 당시 민주당 추천 조사위원으로 참가했던 신상철대표는 처음부터 북한의 어뢰공격이 아닌 좌초에 의한 침몰을 주장해왔고, 이로 인해 조사위원 박탈은 물론 12년간의 재판을 받았지만, 2022년 대법원에서 무죄선고를 받았다. 침몰설에 하자가 없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남한 언론은 이를 전혀 보도하지 않고 있다.
지난 70년 동안 남한에서는 조금이라도 북조선에 대한 긍정적인 발언을 하는 순간 그는 빨갱이로 낙인이 찍혀 국가보안법에 의해 피해를 당해 왔다. 이영희교수나 강정구교수와 같이 학문에 기초한 객관적인 사실 이야기를 하더라도 ‘북한찬양’이라고 하는 올가미에 씌워 온갖 핍박을 가하고 있는 것이 남한의 정치 현실이다.
다섯째, 북조선에서는 한국전쟁을 ‘조선해방전쟁’으로 부르고 있다. NK에서는 국가의 출발을 1932년 김일성의 게릴라 항일투쟁에 두고 있다. 따라서 NK에서는 일본을 대신한 미국이라는 외세를 코리아의 영토에서 몰아내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삼을수 밖에 없다. 항일투쟁이 항미투쟁으로 이름만 바뀐 것뿐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남한과는 달리 북조선에서는 종전선언에 그렇게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이러한 입장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남북대화는 언제나 제자리에서 맴돌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필자는 역사학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남북화해와 통일을 위해 힘써 온 목사로서 한국전쟁에 관해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를 중심으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신학에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책들이 계속 나오면서 성서를 새롭게 읽게 되었고, 예수에 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다음의 책들이 나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였다. 1. 『부르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The Korean War: A History, 현실문화, 2010. 이하 ‘Cummings’) 2. A.B. Abrams의 『끝나지 않은 전쟁: 북-미 대결 70년사 I, II』 (Immovable Object: North Korea’s 70 Years at War With American Power, 민플러스. 2022. 이하 ‘Abrams’) 3. 오로지의 『두 얼굴의 미국과 한국전쟁』 (휴엔스토리, 2021. 이하 ‘오로지’) 저자 오로지는 역사가는 아니지만, 필자와 같은 시각에서 한국전쟁에 관한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해 여러 학자들의 자료를 인용하고 있다. 이중 그가 자주 인용한 John Merill 교수는 미국무성에서 30년을 일한 사람으로 제주43항쟁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한국전쟁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쓴 학자이다. 7년 전 워싱톤에서 NCCK 대표 20여 명의 목사들과 대담을 한 적이 있는데, 이때 그는 ‘미국 의회에 와서 증언하는 탈북자들은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다. 증언을 확인해 보면, 맞는 게 하나도 없다.’라고 발언을 하기도 했으며, 1949년 말 남한의 해군이 해주 인근의 북조선 해안중대를 기습하여 초토화시킨 사실을 은퇴한 남한 해군장성을 캘리포니아의 집까지 직접 찾아가서 확인한 바 있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2. 왜 6월 25일인가?
필자는 철책선에서 졸병으로 군생활을 했는데, 하루는 군사학 장교가 이런 말을 했다. ‘북한이 625전쟁에서 패배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시기를 잘못 정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6월 말은 아직 들판에 곡식이나 열매가 무르익지 않았을 때이기에 식량 조달에 어려움이 있고 보병전 위주의 재래식 전투에서 6월 말은 더위는 물론 장마가 시작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건 보통사람이 생각해도 전쟁을 시작하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니다. 굳이 해야 한다면 가을철이 최적기이다. 그래서 남한에서는 6월 25일이 선택된 이유로 군인들의 외출이 많은 ‘일요일’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일요일은 일 년에 50번이 넘는다.
당시 남과 북은 상대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많은 첩보원들을 보내었는데, 1950년 5월이 되면 북조선은 군대를 전방으로 이동한 상태였기에 남한에서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북조선 또한 침략을 위한 그 시기를 고려하고 있었다. 이미 4월에는 구체적인 날짜와 함께 남침에 대한 미정보부의 경고도 한 차례 있었다. 6월 25일 당시 북조선 후방에 있던 전 인민군의 3분지 1의 군인들은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는 6월 25일은 예정된 날이 아니라 급작스럽게 잡힌 날이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급한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필자 또한 자라면서 여러 경로로 6월 25일 며칠 전에 서부전선에서 국군이 38선을 넘어 해주를 공격했다는 이야기는 몇 차례 들은 바가 있었지만, 워낙 6월 25일 새벽 4시 남침을 굳건히 믿고 있었기에 이런 이야기에 별로 귀를 기울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10여 년 전 김종필전총리(당시 육군본부 정보장교,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초대 정보부장 역임)가 신동아에서 같은 주장을 한 것을 직접 읽어본 적이 있었다. 당시 이는 언론에도 대서 특별이 되었었다. 그래서 정확한 날짜를 확인코자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런 인터뷰가 아예 없었다는 주장부터 이 주장을 ‘치매’로 돌리는 등 가짜뉴스로 도배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필자 또한 당시에는 커밍스의 책을 읽기 전이었기에 이 인터뷰 기사를 읽으면서 이 분이 치매가 걸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기도 했었다. 그러나 커밍스 또한 이런 전투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고(39-40쪽), Abrams는 보다 정확한 자료를 제시하고 있는데, 6월 25일 북조선방송에서 남한군이 해주를 침략했음을 보도했고, 같은 날 남한 방송 또한 같은 내용을 방송했다.(98쪽 이하) 물론 지금 남한 당국이나 언론은 이런 사실을 모두 부정하고 있다.
당시 38분단선은 도로에는 금이 그어져 있고 양쪽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어 그 경계가 분명했지만, 그 외 들판과 산, 강, 바다는 그 경계가 분명치 않았고, 설사 도로라 하더라도 부분 전투를 통해 금을 새로 그으면 그게 바로 새로운 38분단선이 되었다. 그리고 서로 싸워서 분단이 된 것이 아니라 외세에 의해 분단이 되었기에 양 정부는 모두 통일을 국시(國是)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으며, 각각 미국과 소련의 지원 속에서 서로 다른 정치사회경제 체제를 갖고 있었기에 무력으로 상대를 점령하는 길 외에 통일의 다른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원론적으로 말하면 무력에 의한 통일 시도는 김일성정권 보다는 이승만정권이 훨씬 더 절실했다.
“이승만은 협상의 가능성을 ‘양보’라거나 ‘재앙으로 가는 길’이라며 일축하고 무력통일을 강하게 주장했다. 1950년 6월 7일 노스코리아의 김일성수상이 8월에 전국적인 선거를 실시하자며 이를 논의하기 위해 6월 15일에서 17일까지 해주에서 회의를 개최하자고 요구했다. 이 요구는 이승만과 미국이 모두 강경하게 반대하여 거부되었다. 나흘 후 DPRK는 통일에 관한 회의를 시작하자는 평화의식으로 대표 3인을 남측에 파견했지만, 이 또한 이승만에 의해 즉각 거부되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제대로 감당할 수 없는 군사력 증가를 우선시했고, 1949년 여름에는 군 병력 규모를 10만 명으로 증강하여 북조선에 대해 수적 우세를 확보했다. 이대통령과 ROK의 군부 지도자들은 노스코리아를 상대로 분쟁을 개시하려는 의도를 갖고 38선을 넘어 빈번히 도발을 감행한 사실이 서방 및 국제 관측자들의 보고서에서 확인되고 있다.” (Abrams, 62쪽)
당시 주한미군군사고문단 단장 윌리엄 로버츠장군은 “거의 모든 접전은 38선 북쪽으로 돌출한 지점에 주둔한 남한 소부대가 야기한 것이었다. 남한부대들은 북쪽으로 자주 침공했다.”(63쪽) 일본군 포병장교 출신인 김석원준장이 이끄는 서부전선의 남한군 수천 명이 수시로 38선을 넘어 공격을 개시했다. 북의 군사력이 점차 증강하자 남쪽의 일부 정치인들과 군인들은 선수를 쳐서 평양 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심을 점점 잃어가고 있던 이승만정권은 전쟁만이 자신을 구원할 도구였다.
1948년 5월 UN의 감독하에 치러진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통해 입법부가 구성되었는데, 당시 투표권은 도시의 지주와 납세자에 한정되었고, 농촌에서는 원로들이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투표했고, 무장경찰과 우익청년단체들이 투표소 주변을 장악했다.(커밍스, 172쪽) 당시 남한에서는 미군정이 후원하는 과격한 청년단체 특히 서북청년단의 암살과 협박 거기에 일제의 부역자들이 그대로 경찰이나 군인으로 복무하는 상황에서 민중이 갖는 실망과 반감은 엄청 컸었다. 이로인한 군인들의 반란은 여순항쟁에서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었다. 1949년에는 남한군 2개 대대 전 병력과 전함 1척이 월북한 사건도 있었다.(Abrams, 103쪽) 미군정이 후원한 이승만정권이 얼마나 인기가 없었는지는 총선 결과가 말해주는데, 불과 전쟁 한다라 전인 1950년 5월에 실시된 2대 총선에서 이승만의 집권당인 자유당이 얻은 결과는 210석 중 22석에 불과했다. 이 또한 불법적인 관권이 수없이 개입한 결과였다. 이는 미군정청이 친일부역자들 곧 일본왕을 위해 죽겠다고 혈서로 맹세한 조선 출신 일본군 장교들과 독립군을 처형한 순사들을 중용함으로 인해 국민들의 반감을 살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감추기 위해 미군정의 손과 발이 되어 멀쩡한 사람도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워 무자비하게 처단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미국 또한 맥카시즘이라는 반공 빨갱이 선풍이 몰아치고 있던 시기였다.
반면 북조선이라는 국가의 두드러진 특성은 모스크바의 인위적인 창조물이 아닌 코리아 민족주의 운동의 계승이었다.(아브람스, 42쪽) 이는 동유럽에서의 통치와는 다른 방식이었다. 남한 학자 김남식은 “북한의 인민정권은 해방 이후 자발적으로 조직된 인민위원회들을 기반으로 삼았다. 인민위원회는 중앙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조직이 되었다.”(42쪽) 오히려 소련 군정 아래에서 평양 정권은 소련 친화적인 인사들을 숙청하였다. 본래 소련은 조만식장로를 정부 수반으로 생각하고 있다가 김일성에 대한 민중의 열화같은 지지와 친탁통치에 대한 그의 완강한 태도를 보고 입장을 바꾸었다.
이승만정권의 경제정책은 실패했고 부패가 극심했다. 당시 국가 예산의 3분지 1이 미국의 보조금이었는데, 대다수의 돈을 개인이 착복했다. 그리고 북조선의 소작인 농부들은 토지개혁 후 토지를 소유하게 되고 수확의 25%를 세금으로 내는 것으로 그쳤지만, 남한은 여전히 거의 대부분이 소작농이었고 수확의 70%를 지주가 가져갔다. 그리고 외화벌이로 미군을 상대로 한 매춘을 장려하여 외화의 25%가 여기에서 나왔다. 그로인해 두 국가간의 경제 격차는 점점 벌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남쪽의 민심은 점점 북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 여론조사에 의하면, 남한사람들의 70% 이상이 북쪽 사회주의를 선호하고 있었다. 게다가 민중 폭동도 자주 일어났다. 제주43항쟁, 대구항쟁, 여순항쟁등이 대표적이었다. 미국은 남북이 평화적으로 통합하게 되면 원조를 철회하겠다고 협박하고 1950년 2월 의회를 통해 대한원조법안을 통과시켰다.(아브람스. 61쪽)
어떻게 보더라도 미국의 한국 점령은 실패라고 볼 수밖에 없다. 미국은 30여 년간의 잔인한 식민 통치로부터 막 벗어난 한반도에서 비극적인 분단을 고착화시켰으며, 인민위원회 등을 통하여 나타난 주민의 자유스러운 정치 참여를 막았으며, 경찰과 관료들을 장악하고 있던 우익 세력등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또한 미국의 정책은 좌우익 간의 대립을 심화시켜 결국 5년 후 한국전쟁으로 치닫게 했던 것이다.(오로지, 225쪽 재인용 존 메릴, 『한국전쟁의 기원과 진실』)
3. 군사1급기밀에 해당하는 에치슨선언은 왜 했던 것일까?
지금까지의 얘기는 한국전쟁을 남북간의 내전으로 보았을 때이다. 이제 국제전의 입장에서 그 원인을 살펴본다. 우선 한국전쟁과 관련한 직접적인 원인은 소위 말하는 에치슨선언이다. 1950년 1월 12일 미국무장관 에치슨은 워싱톤 프레스센터에서 ‘한반도가 미국의 태평양방어선에서 제외되었다’는 공개발언을 한다. 북조선이 남침을 준비하는 그 시기에 이 발언의 의도는 도대체 무엇인가? 당시 미국은 미군을 남한 땅에서 철수시키고 군사고문단 500명만 남겨 놓은 상태였으며, 이승만의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한미방위조약 체결을 거부한 상태였다. 북조선의 입장에서는 무력통일을 시도할 때, 관건은 미국이 참전할 것인가 아닌가에 있었다. 당시 미국은 일제를 항복시킨 가공할만한 원자폭탄을 500기나 갖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의 참전이 전제된 상황에서 북조선은 결코 전쟁을 시작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미국이 애치슨선언을 통해 한반도의 내전에 참전하지 않겠다고 하는 공개 발언이 나온 이후, 스탈린이나 모택동은 김일성에게 전쟁물자 지원을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들 또한 내전 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았기에 전쟁을 반대할 명목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에치슨 선언과는 달리 유엔을 통해 3일 만에 전쟁 참여를 한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전쟁 얘기를 듣자 “한국전쟁이 우리를 구원했다.”고 말했다.(70쪽) 북조선의 전면 남침은 미국의 계략에 넘어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화해통일위원장 시절 미국무성의 소위 북한인권대사라고 불리는 로버트 킹(Amb. Robert King)을 세 번 만난 적이 있다. 한 번은 김영주 NCCK총무, 노정선 연세대명예교수, 필자 그리고 당시 미연합감리교의 사회부 총무였던 Jim Winkler목사(그는 후에 미국교회협의회 회장을 역임했다) 이렇게 4명이 면담을 한 적이 있다. 이때 킹대사가 한국전쟁에 대한 북조선의 책임을 묻는 얘기를 꺼내자 필자는 에치슨선언 얘기를 하면서 이건 미국의 계략이 아니었던가? 하고 반문을 하였다. 이때 킹대사는 “It was a mistake.”라는 발언을 연이어 세 번이나 한 적이 있다.(지금도 노련한 정치인이었던 그가 왜 이렇게 솔직한 답변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마도 몰몬교 신자로서 목사 네 명 앞에서 거짓을 말하기에는 너무 부담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하고 추측을 해본다.)
1950년 6월 18일 남한 언론에는 공화당 국무부장관 후보인 덜레스가 38분단선을 방문하고 망원경으로 북쪽을 바라다보는 사진을 대서특필한다. 북쪽의 입장에서는 남쪽으로부터의 공격이 곧 있을 것 같은 징후를 느낀다. 그리고 6월 22일 서부전선에서는 국군이 해주를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였다. 게다가 그 이전에는 전혀 없었던 일인데, 24일과 25일에 걸쳐 남한군 절반의 군인을 대거 휴가와 외출로 내보낸다. 북조선의 침략이 예상되는 일촉측발의 위기의 순간이었고 당시에는 군비상경계령이 실시되던 상황에서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여기에 더하여 24일 저녁에는 공개적으로 미군과 고위 한국군 장교들을 위한 거대한 파티를 연다. 인민군의 입장에서 보면 25일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였다. 당시 남한군은 지금도 그러하지만, 철저하게 미 군사고문단의 지휘 아래에 있었던 시절이었다.
4. 왜 스탈린과 모택동은 돕지 않았는가?
한국전쟁은 이승만정권의 생존 보장에 중요하게 작용하면서 동시에 이미 아이젠하워대통령이퇴임국회연설에서 지적한 바 당시 미국의 산업은 2차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군수산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결국 한국전쟁은 미국에 경제적으로 크게 기여를 한다. 반면, 모스크바와 베이징에는 엄청난 난관을 초래했다. 채 1년이 되지 않은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국민당이 장악한 대만을 탈환해 내전을 끝낼 기회의 창이 닫히는 것을 뼈아프게 지켜봐야 했다.”(아브람스, 77쪽) 만약 이때 중국공산당이 대만을 점령하였다면, 모택동정부는 장개석정부에 이어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를 바로 꿰찰 수 있었으며, 소련 또한 미국이 오끼나와를 이용했던 것처럼 대만을 이용할 수 있었다.
소련 또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중국보다 더 큰 손해를 보았다. 당시 미국은 경제불황에 들어갔지만, 오히려 소련의 사회주의 국가경제는 더 나아지고 있었기에 세계에 더 큰 영향력을 주고 있었고, 그러기에 세계 평화유지를 원했다. 그러기에 김일성의 끈질긴 군사지원 요구에도 스탈린은 거의 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5. 왜 인민군은 서울 점령 후 전쟁을 멈추었을까?
인민군은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후, 최소 3일에서 7일간을 서울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 탱크가 한강을 건넌 날짜는 7월 5일이었다. 서울에서 진격을 멈춘 것이다. 이에 대한 해석으로는 김일성은 이승만에게 통일에 관한 대화를 제안하고 기다렸다는 주장과 강원도쪽에서 내려오는 인민군이 국군의 저항에 부딪혀 늦게 합류했기 때문이라는 주장 그리고 한강철교가 끊어졌기 때문에 이를 복구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한강에 부교를 띄우는데, 한 주간 이상이나 걸린다고 하는 것 또한 비상식적이고, 대전이나 부산을 가기 위해 꼭 한강을 건너야만 갈 수 있던 것도 아니었다. 우회하는 길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다면 이 기간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8일 서울 점령 당시 미국은 유엔을 통해 참전을 결정하였다. 어쩌면 김일성은 박헌영의 주장대로 서울만 점령하면 민중혁명이 일어나 저절로 통일이 될 것으로 기대했을 수도 있다. 무력통일보다는 남쪽인민혁명에 의한 자주적인 통일이 더 떳떳한 통일의 방식이었고 그렇게 된다면 미국의 참전은 그 정당성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약 이때 인민군이 서울에서 멈추지 않았더라면 전쟁의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6. 또 하나의 가정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지자 소련군은 퇴각하면서 여러 무기들을 남겨두고 갔다. 인민군은 이를 기반으로 전쟁을 준비했다. 그런데 전쟁 중에 무기제공이 있었는가? 지금까지의 결론은 인민군이 소지한 무기는 2차세계대전 중에 사용되던 무기들이었으며 그 이후에 소련에서 개발한 신식 무기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스탈린은 애초부터 미국의 참전을 염려하여 전쟁을 반대했다가, 애치슨선언과 1950년 4월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비록 몇 개 밖에 되지는 않지만 원자폭탄을 소유하면서 비록 미국이 참전하더라도 원자폭탄 사용을 자제하리라고 여겨 김일성의 남침 요구에 마지 못해 동의를 하면서도 전쟁 중에는 어떤 물자도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모택동의 지원을 받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모택동 또한 대만 점령에 목표를 갖고 있었기에 애초부터 전쟁에 대해 반대를 했으며, 미군이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오자 방어차원에서 전쟁에 참여를 한 것이지, 처음부터 전쟁에 참여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낙동강전선에서 인민군이 멈춘 이유는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 때문이 아니라 병참 조달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 두 나라 중 한 나라만이라도 처음부터 인민군의 전력에 도움을 주었더라면 전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맥아더 또한 만약 중국이 14후퇴 시기가 아니라 그 이전에 보다 적극적으로 북을 지원했더라면, 전쟁은 미군개입 이전에 끝났을 것이라고 얘기한 바 있다.
7. 정전협정에 2년이나 걸린 이유?
14후퇴 이후 전선은 이전의 38분단선에서 정체가 되었다. 그리고 정전협정이 시작되었다. 3주 안에 끝날 것으로 여겨졌던 협정은 2년이나 질질 끌게 되는데,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이 기간동안 미군 폭격기는 하루도 빠짐없이 북조선의 모든 도시와 마을들을 공격하여 초토화시키고 말았다. 당시 투하한 폭탄의 양은 63만 톤으로, 이는 5년간에 걸친 태평양전쟁에 투하한 50만 톤보다 많았으며 이로 인해 북조선은 '달의 표면'처럼 변하였다. 22개 주요 도시 중 18개 도시는 최소한 50%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모든 도시와 마을은 40∼90%가 파괴되었다. 당시 미 국방부 검열관들이 폭격의 끔찍한 현실을 미국 국민이 모르도록 감추었으며 이 폭격으로 인해 북조선은 일종의 '유격대 국가'로 변해갔다.(커밍스)
필자가 본 한국전쟁 기록영화에도 평양시를 내려다본 미군 폭격기 조종사가 관제탑에 이렇게 말한다. “There is no more target, Roger.” 평양의 모든 건물이 파괴되어 있었기에 가지고 간 폭탄을 어디에 투하해야 할지를 몰랐던 것이다. 한 미군 장성은 말하기를 북조선은 구석기 시대로 돌아갔으며 복구에 100년 이상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고려대 최장집 교수는 "한국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북녘 인민들이었다."고 말한 바 있으며 피카소는 '조선에서의 학살 (The Massacre in Korea)' 이란 제목의 게르니카 벽화를 통해 미군들이 황해남도 신천 군민 4분의 1에 달하는 무고한 양민을 잔인하게 죽인 사실을 고발하였다.
미국의 무차별 폭격이 가져온 또 다른 이야기이다. 희대의 이중 간첩이라는 별명을 지닌 George Blake의 이야기이다. 그는 1948년 11월 서울에 온 영국 부영사이다. 러시아어를 전공한 탓에 영국 정보국에 발탁이 되었다. 파송 당시 상관이 코리아에 곧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가지 않겠다고 하자 영국은 미국과 소련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국이라 전쟁이 일어나도 외교관 신분으로 곧 풀려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외교관들은 다 피했지만, 서울에 머물던 영국 외교관들은 피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영국이 유엔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여하자 졸지에 포로가 되어 3년간의 포로생활을 하였다. 하루는 북조선 북단의 아주 작은 마을에 있었는데, 당시 마을에는 젊은 사람들은 모두 전쟁터에 나가고 노인들과 여성들밖에 없었는데, 미군폭격기로 인한 극심한 참상을 보고 자신이 잘못된 진영에 속해 있음을 깨닫고 비밀리에 소련군의 첩자가 될 것을 약속한다. 이후 포로교환으로 귀국하였다가 다시금 베를린에 정보원으로 파견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오랜기간동안 이중첩자의 역할을 하다 반역죄로 감옥에 있다 영국인 양심수의 도움을 받아 탈옥하여 6개월을 숨어 있다가, 러시아로 탈출하여 영웅 대접을 받았다. 2020년 12월 24일에 사망하였다.
8. 결국 전쟁의 혜택은 누가 입었나?
Martin Walker라는 영국 기자는 Korean War를 가리켜 “유럽에서 백인들 간의 싸움으로 시작된 냉전의 대가를 갈색, 검은색, 노란색 피부를 가진 제3세계 사람들이 치른” 것이라고 했다.(오로지 148쪽)
1952년 밴 플리트장군은 한국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한국전쟁은 미국 입장에서는 축복이다. 코리아가 아니라면 또 다른 지역에서 한국전쟁과 같은 전쟁이 있어야 했다.”(오로지 225쪽) 당시 미국은 2차세계대전 직후 군수공장들이 문을 닫게 되어 실업률이 높아져 경제불황에 빠져 있었는데, 이를 다시 활성화시킴으로 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군사비 지출은 전년도에 비해 4배가 넘었고, 징병제를 실시함으로, 이는 결국 베트남전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고, 유럽에 나토군사동맹이 결성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미국의 산업은 최소 3분지 1 이상이 군수관련산업이다. 곧 전쟁으로 먹고사는 괴물국가이다. 오죽했으면 카터 전대통령 또한 미국 역사 242년 동안 전쟁을 하지 않는 기간은 불과 16년에 불과하다고 자탄을 했을까.
결론으로 한국전쟁은 미국 경제살리기가 주요 목적이었다. 작금의 우크라이나 전쟁 또한 이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미국과 러시아는 오래된 탱크와 재래식 미사일과 유효기간이 지난 포탄의 소비처를 필요로 하고 있었고, 이에 미국은 젤렌스키로 하여금 나토가입을 유인하고 국경 근처의 친러그룹을 핍박함으로 인해 러시아의 침략을 야기시켰다. 프란체스코 교황이 말했듯이 이는 오래전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지금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원조하는 것은 재래식 무기이지 최신식무기가 아니다. 러시아 또한 최신식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민간인 지역을 포함 논밭이나 숲속 엉뚱한 곳에 미사일이 떨어지는 것은 유효기간이 지난 고물들이기 때문이다. 두 나라 모두 전쟁을 오래 끌기 위한 전략이 숨어 있다. 구식무기들이 모두 소비된 후에야 정전협정이 시작할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이차세계대전에서 쓰인 폭탄보다 더 많은 양을 투하했으며, 심지어 라오스에도 폭탄 투하를 하였는데, 지금 라오스 전 국토 99% 지역에는 8천만 발의 포탄이 땅속에 박혀 있어 매년 3백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낳고 있다. 도대체 이 많은 포탄들은 왜 터지지 않았던 것일까? 그건 유효기간이 지난 것을 쓰레기로 처리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만 한국전쟁으로 덕을 본 것은 아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국가들 그리고 태평양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한국전쟁시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남과 북의 국민들이 세계 패권국가들의 이러한 전략을 알아채고 평화의 길로 나아가지 않는 한 불필요한 희생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현재 미국 군사무기 수출의 절반을 남한과 일본, 대만 이 세 나라가 차지하고 있다. 코리아에 평화의 기운이 돌면 이 세 나라의 무기수입은 급격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지금도 북악마화로 인한 희생은 결국 남한사람들이다. 국방비 예산의 절반만이라도 민간복지로 돌릴 수 있다면 국민기본소득의 확대는 물론 전국민교육무상화 정책까지 실현할 수가 있을 것이다.
9. 나가면서
지금 세계는 미국식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가운데 여기에 저항하는 중국, 러시아, 이슬람국가들과 쿠바, 베네주엘라, 북조선 등등의 사회주의 정책을 실시하는 국가들이 존재하고 있다. 현재 남미는 거의 모든 나라에 사회주의 정책을 실현하려는 좌파 정권들이 실권을 잡았다. 북유럽나라들의 경우는 복지형 사회주의 국가들로 미국식 자본주의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미국식 시장금융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허용하여 부의 불평등이 너무 높아 자칫하면 민중폭동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현재 미국에서 일어나는 매년 수천 건의 총기난사는 이러한 불만들이 분출되는 사회적 현상이다. 여기에는 인종차별까지 연계되어 있다. 흑인들이 백인들에 비해 4배 이상 살해당할 위험이 높다. 이는 마치 히틀러가 백인우월감을 부추겨 유대인들을 학살한 것과 비슷하다. 트럼프전대통령은 2년 전 대선결과에 불복하여 민중폭동을 조종하였고, 지금도 거짓뉴스를 남발함으로 보수공화당원들을 집결시켜 다음 대선을 준비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언론자유의 국가인가?
반면 소련식 공산사회주의는 개인의 재산 소유를 금지한다는 것이 약점이다. 이는 소련 공산주의의 몰락을 통해 증명이 된 바 있다. 따라서 개인 자유와 집단 평등의 가치가 균형을 맞춘 경제제도가 앞으로 인류가 지향해야 할 체제이고 현재는 북유럽국가들이 대표적이다. 다만 북유럽국가들의 경우는 인구가 작고 자원이 풍부한 나라들로 제3세계의 가난한 나라들과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미국 펜실베니아대학의 사회학과 Sam Richard 교수는 본래는 남미 역사와 문화 전공이지만, 지난 몇 년 동안 한국문화에 심취하고 이에 관련한 유튜브 동영상이 몇 개 있다. 2022년 그는 ‘세계기후위기를 해결할 첫 번째 주자로 남한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4가지 이유를 들었다. 1. 공동체중심사회 Community well-being uplifts individuals 2. 효율적인 교육시스템 Efficient system of educating youth 3. 공익을 위한 규칙준수 Willingness to follow rules that benefit the collective 4. 세계적인 소프트파워 Soft power and the global stage
리차드교수는 북조선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을뿐더러 관심도 없고, 그의 동영상을 여러 개 보았지만, 분단 혹은 통일이란 단어 또한 한번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데 리차드교수가 언급한 네 개의 장점은 남과 북을 원론적인 의미에서 비교하자면 1, 2, 3번은 모두 북조선이 앞선 분야이고, 4번 또한 일정 분야에 있어서 세계적인 수준을 갖고 있다. 자체의 인공위성 발사와 핵무기 개발을 이미 10년 전에 완성한 국가이다. 그것도 70년 이상 미국으로부터 극도의 군사경제 제재를 받고 있는 최악의 상황에서 이룩한 일이다.
남과 북은 5천년의 역사를 공유한 하나의 민족공동체로서, 작금의 세계를 양분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서로 다른 체제를 하나로 엮어낼 때 그 시너지 효과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고, 리챠드교수가 지적한 대로 당면한 지구의 과제를 해결해낼 국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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