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묵상나눔 › 시인과 부인 사이

Navi Choi | 2023.02.13 07:17:31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시인과 부인 사이
마태복음 10:24~33
이집트 파라오 앞에서 아브라함은 사라를 아내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창 12:13~20). 그랄 왕 아비멜렉 앞에서도 같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창 20:2). 아름다운 아내를 가진 나약한 남편, 생명 보전을 위해 진실을 왜곡하는 모습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보는 것은 유쾌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진실을 말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같은 경우에 처하였습니다(창 26:6~7). 아브라함의 실수를 반복하는 이삭에게서 역사가 주는 교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비의 실수를 아들이 반복하는 그 수치스럽기 그지없는 일을 대물림하는 현상을 나무라고 핀잔하며 역사의 교훈을 망각한 처사를 비난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도리어 아브라함 부자의 부전자전은 한계상황에 처한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며, 생존이 목적이 되는 시대에는 누구라도 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슬프고 우울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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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에 대한 랍비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1907~1972)이 전하는 메시지는 심금을 울립니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희생당해서는 안 된다. 만일 적들이 모여있는 여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모두 욕보지 않으려면 너희 가운데 하나를 우리에게 보내라’고 한다면 그들이 와서 모두를 욕보이게 할지언정 어느 한 여자를 뽑아서 욕보게 해서는 안 된다”(『누가 사람이냐』, 종로서적, 137). 랍비의 말이 가슴을 치지만 쉽지 않은 일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도 없습니다.
엔도 슈사쿠는 『침묵』에서 시인과 부인을 요구받는 예수회 출신 선교사 로드리고를 조명합니다. 로드리고는 붙잡혀 고문당하는 교우들을 풀려나게 하는 방법으로 배교를 요구받습니다. 성화가 부조되거나 그려진 후미에를 밟아야 했습니다. 제자의 길을 걷기로 다짐한 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일입니다. 교우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배교 말고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고민합니다. 그때 “나를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후미에를 밟습니다. 아, 우리의 주님은 배교자의 편에 서 계신 듯합니다. 그런 주님 앞에 순교가 영광이라는 말은 언어도단처럼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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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주님에 대한 나의 시인이 나에 대한 주님의 시인이 될 것입니다. 사실을 말해도 진실하지 않는 세상에서 주님은 진실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영원을 포기할 수 없는 자로서 진실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새삼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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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믿고 오롯이 왕의 길을 따라 살기를 애쓰는 하늘 백성에게 주님의 이끄심과 돌보심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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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진실을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삶은 위선으로 얼룩지기 다반사였습니다. 말은 발랐지만 삶으로 다 살아내지를 못햇습니다. 오롯이 진실한 말과 삶을 견지할 힘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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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 : 336 환란과 핍박 중에도 https://www.youtube.com/watch?v=56Pi6dduQIw
2023. 2. 12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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