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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i Choi | 2023.02.13 07:20:03 | 메뉴 건너뛰기 쓰기

기다릴 것인가, 걸을 것인가?
문학과 예술의 현대성이 주는 질문

노벨문학상 수상작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사무엘 베케트(1906~1989)는 인생을 기다림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작품에서 블라드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오지도 않는 고도(Godot)를 마냥 기다립니다. 작가는 고도가 어떤 존재인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관객들은 고도의 이름이 영어와 프랑스어의 합성어 ‘God+Dieu’로 이해하려고도 하지만 작가는 굳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연극의 배경은 어느 한적한 시골길,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서있는 언덕 아래입니다. 누구인지도 모르고, 언제 올지도 모르는 고도를 기다리다 지친 에스트라공은 기다림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그럴 때마다 블라드미르는 구원자로 올 고도를 기다리자며 에스트라공을 설득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사는 무의미한 말장난이 대부분입니다. 에스트라공은 연극이 시작할 때부터 얼굴이 엉망인 채로 등장하지만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과거가 없기 때문에 과거의 미래인 현재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미래를 기다립니다. 그렇게 기약 없는 기다림이 계속되는 중에 포조와 럭키가 잠시 등장하곤 사라집니다. 오랜 기다림으로 하루가 저물 무렵 고도의 전령인 소년이 등장하여 ‘고도가 오늘은 못 오고 내일은 온다’고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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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남부지역에 숨어 지내면서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작가의 경험을 반영한 것이 분명합니다. 베케트는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돕다가 독일군에게 발각이 되어 보클루즈에 피신하고 있었습니다. 피난민들은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 지루한 시간에 베케트는 피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 이야기가 끝나면 다른 이야깃거리를 찾아야했는데 이것이 ‘고도를 기다리며’의 이야기 꼴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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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역사에 전례가 없는 대규모의 처참한 전쟁을 두 번이나 겪으면서 예술은 전에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낯선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런 흐름의 시작을 ‘모더니즘’이라고 불러도 무방합니다. 이 흐름에 편승한 작가들은 자기 작품을 독자, 또는 관객에게 객관적으로 설명하거나 강요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독자가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듣고 싶은 대로 듣는 일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작품의 의미와 목적을 관객에게 모조리 맡깁니다. 작품 속에 숨겨놓은 작가의 의도를 독자가 ‘보물찾기’처럼 탐색하는 재미는 진부한 시대가 된 것입니다. 작품의 완성, 또는 목표는 작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판단에 따른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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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문학뿐만 아니라 조형예술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우리가 난해하다고 여겨지는 미술이 대개가 그렇습니다. 큐비즘, 포비슴, 추상표현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미니멀리즘, 팝아트 등으로 불러지는 미술과 피카소(1881~1973), 뒤샹(1887~1968), 달리(1904~19 89) 등의 작품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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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 예술가 가운데 스위스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가 있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불안한 시대정신과 허무에 빠진 인간 실존을 작품화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시대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렘브란트와 고흐의 자화상과는 결이 다른 ‘나는 누구인가?’의 질문을 무겁게 던집니다. 군더더기로 감싼 채 살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기에 충분합니다. 특히 ‘걸어가는 사람 1’(1960)은 비정상의 가늘고 길고 엉성한 인체를 통해 인간의 고독한 실존을 극명하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걸음’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인간이 걸을 때, 자신의 몸무게를 의식하지 않고 가볍게 걷는다. 거리의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무게가 없다. 어떤 경우든 죽은 사람보다도, 의식이 없는 사람보다도 가볍다. 내가 보여주려는 건 바로 그것, 그 가벼움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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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메티는 1953년 1월 3일, 파리의 바빌론극장에서 ‘고도를 기다리며’가 초연되었을 때 2막의 설치미술을 맡은 바 있습니다. 전쟁의 참화를 목도한 두 예술가의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입니다. 전쟁을 통하여 기존 가치의 무력감을 느낀 두 예술가는 전통의 틀과 격식을 배격하고 새로운 창작의 길을 모색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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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려야지”
기다림에 지친 에스트라공이 기다림을 포기하자고 할 때마다 블라디미르가 한 말입니다. 우리도 고도를 기다립니다. 고도란 ‘구원자’일 수도, ‘평화’일 수도, ‘죽음’일 수도, ‘소박한 꿈’일 수도 있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시간의 한계를 가진 인간에게는 괴로운 것이지만 그것 또한 희망입니다. 기다림이 습관이 되고 있는 즈음에 우리의 기다림이 멈추면 엄청난 무게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멈추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쉬지 않고 걷는 것, 그것이 베게트의 기다림을 넘는 자코메티식의 기다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진리와 평화와 정의, 기다리겠습니까? 걸으며 마중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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