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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주훈 목사 | 2022.03.27 18:37:13 | 메뉴 건너뛰기 쓰기
<목사 안수/임직>
“루터가 만든 목사 임직 예식(rite of ordination)은 완전히 새로운 것입니다. 로마교회에서 이것은 성례전이지만, 루터교회에선 그저 이름만 같고 단순한 예식일 뿐입니다. 로마교회에서 사제서품은 한 남자를 기독교 세계 내 어떤 특정한 신분 혹은 계급 안으로 편입시키지만, 루터교회에서 목사 서임식은 교회 공동체가 특수한 기능을 위임하는 예식입니다. 로마교회에서 사제서품은 후보자에게 미사의 희생제물을 변화시킬 능력을 주입하는 시간이지만, 루터교회에선 임직 예식을 통해 설교와 성례 집례의 과제를 위임합니다. 루터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제입니다. 즉 성직을 위한 유일하고 참된 성례전은 오직 세례 밖에 없습니다.” [LW 53, 122.]
종교개혁 중반기인 1530년 후반이 될 때까지도 목사로 부름 받는 공적 예식에 루터는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가톨릭의 사제서품식이 아닌 개신교 목회자를 세우는 특별한 예식이 필요하다는 동료들의 요구가 빗발치자 루터는 비교적 늦은 시기인 1535년이 되어서야 예식서 초안을 만들었고, 이를 루터교회 전체가 사용하게 된다. 이 초안을 다시 다듬은 게 지금 루터교회에서 목사 서임식에 사용하는 1539년판 ‘목사 서임예식서’이다.
루터에게 이 예식의 원칙은 ‘복음적이어야 한다’는데 달려있고, 여기서 ‘복음적’이라는 뜻은 ‘세례 받은 신자는 모두 사제다’라는 ‘만인 사제직’을 의미한다. 로마 가톨릭에서 사제서품은 ‘주교의 안수를 통해 은총이 주입’(gratia infusa)되어 사도권이 계승되는 것으로 가르치지만, 루터교회에선 ‘안수를 통한' 사도권 계승을 거부하고, 대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의 부름(위임)에 의한 임직, 즉 설교와 성례전 집례의 위임에 방점을 둔다. 주교의 안수권이냐, 교회 전체의 소명이냐가 서로의 구분하는 기준점이다. 따라서 가톨릭의 사제서품식과 루터교회의 목사 서임식은 그 의미와 방법에서 큰 차이가 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사제서품식에서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주교의 안수’에 있다. 주교가 손을 머리에 올려 안수할 때 하늘의 은총이 서품자에게 임하고, 그 은총은 떡과 잔을 변화(화체)시킬 수 있는 능력이 된다. 이 능력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성례전의 은총이기에 주교와 교황 외에는 그 능력을 박탈할 수 없게 된다. 로마 가톨릭 평신도가 사제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는 이유이다.
이에 비해 종교개혁 전통에선, 주교의 안수뿐 아니라 어떤 안수 행위도 은총을 주입하는 과정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목사 서임식에서 안수는 교회가 직무를 위임하며 그 일을 성실히 이루어가길 비는 교회의 중보기도일 뿐이다. 가톨릭과 달리, 루터교회를 비롯한 개신교회에서 서임식의 핵심과 절정은 ‘복음의 말씀과 교회의 중보기도’에 있다.
이 같은 종교개혁 신학의 임직 이해는 16세기 교회 안에 큰 파장을 몰고 온다. 왜냐하면, 교회 전체가 목사 임직의 주도권을 갖는다는 건, 교회가 목사를 세울 수도 있고 해임할 수도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가톨릭에선 상상 못 할 일이지만, 종교개혁의 전통 아래 있는 개신교회는 이 사실을 오히려 자랑으로 삼는다. 그만큼 교회를 위한 목사의 책임이 막중하며, 목사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진실과 성실, 섬김의 도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소명하는 것이 목사 임직인 동시에, 이를 위반할 경우 언제든 교회에서 쫓겨날 각오를 공적으로 다지는 것도 목사 서임식이라 할 수 있다.
가톨릭교회에선 어떤 경우든지 안수행위를 할 때 한 가지 원칙이 고수된다. ‘동일한 영의 안수’가 그것인데, 예를 들어 사제 서품 땐, 사제 이상의 영을 소유한 이들, 즉 사제 주교 추기경 교황이 안수할 수 있고, 사제로 서품받지 않은 사람은 서품 때 안수 위원에 들어갈 수 없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부제의 임직 안수 땐, 부제 이상이 참여할 수 있지만, 부제로 임직받지 않은 사람은 안수자에 들어갈 수 없다. 우리 식으로 하면, 목사 안수 땐 목사 이상급이, 장로 안수 땐 장로 이상급만 안수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은 바로 이런 교회 내 위계 구분을 거부한다. 그런 것이야말로, "교회가 스스로 쌓아 올린 담"[루터,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고함>]이라고 할 수 있다. 루터교회를 비롯한 모든 개신교회의 임직 안수에서 이런 구분이 사라지게 되는데, 종교개혁의 정신에 따라 영의 위계적 구분은 거부되고, 세례받은 모든 신자는 동일한 영의 소유자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목사 안수에 평신도가 교회의 대표자로서 안수 위원이 되는 건 신학적으로 매우 자연스럽다.
실제로, 종교개혁 전통을 공유하는 장로교회와 루터교회에서 목사 임직 시 목사와 장로가 함께 안수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1539년 루터가 만든 목사 서임 예식서에 이런 이해가 정확하게 담겨 있다. 루터는 예식서 앞머리를 이렇게 시작한다.
“..... 둘째, 집례자(Ordinator)와 목사 또는 장로(presbytery)들은 임직되는 목사 후보자 앞에 서십시오. 그리고 모두 제단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다섯째, 장로들이 목사 후보자 머리 위에 손을 모두 올리면(안수), 이제 집례자는 또렷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십시오. ‘함께 기도합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LW 53, “The Ordination of Ministers of the Word”(1539), 124].....
여기 언급된 “장로”는 교회의 대표를 뜻한다. 루터교회엔 원래 장로제도 자체가 없었으니 더더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데, 여기서 ‘장로’는 오늘 우리 식으로 하면, 교단의 대표이며 동시에 목사를 세운 지교회 공동체의 대표를 뜻한다. 아주 쉽게 말해, 교회에서 내놓을 수 있는 지도자다. 그러니 당시 '장로'는 지금 우리에게 목사일 수도 있고 장로일 수도 있고 권사나 집사일 수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장로가 누구인지 루터교회 역사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자. 첫 번째 사례는 1523년 루터교회 최초의 목사로 부름받은 요하네스 부겐하겐(Johannes Bugenhagen)의 경우에서 찾을 수 있다. 비텐베르크 시(市) 교회는 성직자 대표, 대학교 교수 대표, 시의회 의원 대표들로 구성된 청빙위원회를 만들어 부겐하겐을 목사로 청빙하고, 임직 예식 때 그들이 안수했다. 주교나 사제만 안수하지 않았다는 게 중요하다. 이 세 부류 교인들의 청빙과 안수는 ‘신앙, 지성, 사회적 인격’이라는 세 가지 요건이 갖춰진 사람을 교회가 소명하여 세운다는 상징적 의미이다.
두 번째 목사는 1525년 서임 받은 게오르그 뢰러(Georg Rörer)인데, 서임식에서 그의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한 사람은 루터를 비롯하여 담임목사 부겐하겐과 평생 안수받지 않은 신학 교수 멜란히톤, 비텐베르크 시장, 그리고 시의회 담당 판사까지 안수 위원에 참가하게 된다. 이 장면은 개신교회에서 ’만인 사제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부겐하겐의 사례와 같이 교회의 부름을 받는 임직자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 잘 보여주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덧붙여야 할 것은 명칭에 관한 문제이다. 목사를 세우는 예식을 보통 ‘목사 안수식’이라고 부르지만, 이 명칭은 여러모로 문제가 있어 보인다. 오랫동안 관습처럼 문제의식 없이 그렇게 불러왔지만, 엄연히 ‘안수식’과 ‘임직’은 다릅니다. 세계 기독교 어디서도 목사를 세우는 예식을 ‘안수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외래어 표기인 “Ordination”은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하는 안수식이 아니라 교회가 특정한 임무로 배치하는 ‘임직(任職)’, 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직무를 내려주는 ‘서임’(敍任)이라고 해야 옳다.
언어는 사유의 열매이고, 존재의 집이다. 명칭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 양식을 규정한다. ‘안수식’이라는 명칭은 안수의 순간을 부각하여 가톨릭의 사제서품을 떠올리게 만든다. 또한, 그렇게 세워진 목사는 안수를 받아 신분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정작 중요한 서임 때 주어진 ‘말씀’과 (임직자를 위한) 교회의 ‘중보기도’는 잊고, 안수만 더 크고 위대한 순간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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