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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i Choi | 2021.03.10 23:42:17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시인의 하나님

시편 59:1~17
하나님의 은총과 평강이 죄악을 멀리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내기 위해 애쓰는 하늘 백성 위에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시편 역시 앞편과 같은 ‘다윗의 믹담 시, 인도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입니다. 이 시편의 배경은 ‘사울이 사람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킨 때에’로 명기하는데 사무엘상 19:11~17의 내용을 상기하게 합니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에 대하여 시에 정확한 표현이 기술되지 않아 억울한 자가 하나님의 성전에 피하여 부르는 노래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시인은 힘의 불균형이 가져온 사회 현상을 슬퍼하며 약한 자의 고통을 한탄하며 악인의 심판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잘못도 없고 죄도 짓지 않았지만 힘이 약하다는 한 가지 이유로 차별받고 쫓기는 신세가 되어 눈물을 흘리는 가련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인류 사회는 언제부터 힘의 숭배가 시작되었을까요? 처음 인류는 평등하게 태어나 품부 된 삶을 살았습니다. 죄가 들어오면서 사람은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그 상태를 칼뱅Calvin Jean, 1509~1564은 ‘전적 부패’라고 했습니다. 자력으로는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절망의 상태를 말합니다. 죄는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도 망가트렸습니다. 그렇게 힘에 대한 숭배가 시작되었습니다.
시인은 강자를 개로 비유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해만 지면 돌아와서 개처럼 짖어대며 성안을 여기저기 쏘다닙니다”(6, 14, 공동번역)를 반복합니다.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가, 빈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울어댑니다.”(15, 공동번역) 악인을 채워지지 않는 주린 창자를 가진 개로 비유합니다. 유대 사회에서 개는 치욕적인 대상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짐승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내가 보는 나와 하나님이 보는 내가 다를 수 있음을 성찰합니다. 거친 세상을 열심히 산 것밖에 없는데 하나님의 원수가 될 수 있음을 유의하여야 합니다. 힘의 논리로 살면 영락없이 그렇게 됩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다투면 하나님은 어느 편을 들어주실까요? 작위적 질문 같지만 그 답변 속에 답하는 이의 영성이 담깁니다. 김동호 목사는 ‘의인’의 편을 드신다고 하여 질문을 비켜 갔습니다. 해방신학에서는 하나님을 약자와 동일시하는 존재로 이해합니다. 이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5) 하신 주님의 가르침과 상통합니다.
루마니아 출신으로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엘리 비젤Elie Wiesel, 1928~2016은 자전적 소설 《밤》에서 수용소를 탈출하다 붙잡힌 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교수대에 달린 두 명의 어른은 곧 숨을 거두었는데 소년은 쉽게 숨이 끊어지지 않아 고통스럽게 바둥거렸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유대인들이 깊은 탄식과 함께 묻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십니까?” 그때 비젤의 내면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하나님은 저 교수대에 매달려있다.”
하나님, 세상은 강자의 하나님을 칭송합니다. 교회도 성공한 자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부자들의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억울한 자의 편을 드십니다. 약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적어도 시편의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불편부당한 분이 아니십니다. 약한 자의 안타까운 한계를 보시며, 힘이 모자라 억울한 처지에 내몰린 이의 눈물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그 하나님이 너무 좋습니다. 힘의 숭배에 휩쓸리지 않는 의지를 제게 주십시오.
찬송 : 337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https://www.youtube.com/watch?v=Vyr8FGYMRV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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