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묵상나눔 › [하루에 시편 한 편씩 읽기(3)]주님, 나를 대적하는 자들이 어찌 이렇게도 많습니까?

김요한 | 2021.08.06 23:02:16 | 메뉴 건너뛰기 쓰기
* 이 글은 학문적으로 구약성경 시편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아침에) 산책을 하면서 가볍게 묵상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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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시편 한 편씩 읽기(3)]
“주님, 나를 대적하는 자들이 어찌 이렇게도 많습니까? 나를 치려고 일어서는 자들이 어찌 이렇게도 많습니까? 나를 빗대어 ‘하나님도 너를 돕지 않는다’ 하고 빈정대는 자들이 어찌 이렇게도 많습니까? 그러나 주님, 주님은 나를 에워싸주는 방패, 나의 영광, 나의 머리를 들게 하시는 분이시니,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소리 높여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는 그 거룩한 산에서 응답하여 주십니다”(시3:1-4).
나는 한국교회를 생각할 때면 감정이 복잡해진다. 돌이켜 보면, 나는 슈퍼맨 혹은 메시아 콤플렉스까지는 아닐지라도 어쩌면 혹시 ‘소년(소녀) 가장 콤플렉스’ 비슷한 것이 있지 않았나 싶다. 목사의 아들로 성장하면서 지독한 가난을 맛봤던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목사만큼은 안 되려고 했다. 그러나 본래 내가 원했던 길들이 자꾸 막히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는 길에 들어섰다. 마음을 가다듬고 제대로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한 이래로 늘 내 마음에는 한국교회에 대한 ‘무한 책임’ 비슷한 의식이 강력하게 자리했다. 한국교회의 성패가 내 수중에 달리기라고 한 듯, 늘 교회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에 몸살을 앓았다. 그것은 마치 옛날 가난한 집안의 장녀 혹은 장남이 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동생들 공부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과도한 책임감 같은 감정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산 세월도 있었다. 그 시절 동안 오직 한국교회가 더욱 성숙하고 신령해질 수만 있다면 개인적으로 어떤 헌신도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한국교회를 향해 사무치게 뜨거운 열정을 불사를수록 한국교회로부터 돌려받은 것은 진실 이상의 비난, 험담, 욕설, 모함, 조롱이었다. 근 10년 동안 한국교회 일각에서 나를 향해 던진 비방과 모함은 내 심장에 큰 상채기를 남겼다. 인간의 혀는 신체에서 가장 부드럽고 연약한 살점으로 이루어졌지만 그것이 돌연 날카로운 칼로 변할 때 혀는 세상의 어떤 강철로 주조된 검보다 더 싸늘하고 살벌하다. 나를 개인적으로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내가 작게나마 한국교회를 위해서 바쳤던 수고는 고려하지 않고, 그저 나와 신학적-정치적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마녀사냥을 감행했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독점한 것처럼 굴었고 따라서 나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자인 것처럼 함부로 폄훼하고 단정했다. 또는 교회를 숙주 삼아 곰팡이처럼 피어 있는 종교 귀족들은 내가 교회를 개혁하려는 모든 시도 자체를 불온하게 간주하고 어떡하든 나를 교회라는 울타리 밖으로 몰아내려 했다. 그런 모습을 반복해서 접하며 나는 기독교에 대해 여러 번 좌절하고 환멸하며 염증을 느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내가 중년의 나이를 먹기까지 지금껏 살면서 받은 모함과 비방은 99%가 교회 안에서 행해졌다는 것이다. 나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로부터는 별다른 어려움을 겪은 기억이 거의 없다. 나의 원수들은 대부분 교회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교회는 (언제나) 내게 지상 최대의 골칫덩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전히 기독교인으로 남아 있는 것, 그리고 내가 지금도 가슴 한켠에 한국교회를 긍휼히 여기고 그 교회를 향한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은 바로 ‘기도’에 있다. 감히 말하건대, 지난 세월 동안 나는 단 하루도 기도를 쉬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송곳처럼 뾰족한 돌덩이가 가득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나, 날카로운 이빨을 이죽거리는 하이에나들의 울부짖음이 가득한 광야를 지날 때도, 언제나 나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나의 고단한 삶을 굽어살피소서. 나의 억울함을 신원하소서. 주님만이 나의 방패이며 요새이심을 보이소서.” 나는 늘 그렇게 기도했다. 이 기도가 없었더라면 나는 진즉에 중병에 걸려 산송장이 되었든지, 또는 가슴에 시퍼런 멍이 들어 무신론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지금도 여전히 기독교인일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내가 수많은 대적자들의 비방과 모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기도가 나를 살렸다. 기도가 생명의 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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