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수필 › 고난이 삶을 파괴할 수 있을까?

Navi Choi | 2020.12.27 11:07:27 | 메뉴 건너뛰기 쓰기
고난이 삶을 파괴할 수 있을까?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시위는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린다. 1992년 1월 8일에 시작되었으니 곧 29년이 된다. 단일 주제로 개최된 집회로는 세계 최장기 집회 기록으로 매주 갱신되고 있다. 집회 1000회째가 되는 날인 2011년 12월 14일에는 ‘평화비’가 세워졌다. 김서경·김운성 부부 작가는 높이 130cm에 치마저고리를 입은 짧은 단발머리의 앳된 소녀가 손을 움켜쥐고 앞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청동상을 제작하였다. 소녀상은 일본 대사관을 향하고 있다. 옆에는 작은 의자도 놓여있어 소녀상과 함께 고난의 의미와 역사를 공감하게 하고 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재미있고 흥미를 유발하는 줄거리가 있는가 하면 아무리 읽어도 그 의미를 이해하기가 난감한 경우도 있다. 나에게 난해한 성경은 <욥기>이다. 그래서인지 나의 목회적 삶에서 욥을 호출하여 설교한 적이 몇 번 되지 않는다. 대충 ‘고난’을 빌미 삼아 이야기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욥과 같은 고난에 직면하지 않은 입장에서 고난의 전문가임을 자처하며 설교한다는 것이 어색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해 가을부터 기회가 되면 욥기를 다시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적 약자들이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하여 고통의 신음을 하여도 세상은 무심히 지나간다. 내가 욥의 삶을 보편의 삶으로 구체화한 것은 1990년 대 중반에 <고난의 행군기>를 겪는 북한 백성들을 가까이 보면서부터이다. 그들은 악행을 저지르거나 누구에게 원한을 가질만한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300만 명이 굶어 죽는 처참한 지경에 처했고, 정처 없이 고향을 떠나야 했다. 아이들은 부모를 잃고 꽃제비 신세가 되었고, 이웃 나라 중국에서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했다. 2009년에는 <용산참사>가 있었다. 과도한 공권력이 가난한 사람들을 죽음에 몰아넣었다. 정부는 공정한 법의 집행이라면서 의문을 품는 자들을 불온시하였다. 그때 <쌍룡차 사태>도 있었다. 자본주의의 탈을 쓴 악마에게 노동자는 먹잇감에 불과하다는 점을 실감하였다. 그리고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생때같은 아이들이 바다에서 숨졌지만 아직도 진실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피해자는 모두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이었다. 사회적 약자의 아픔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촛불을 든 시민들에 의하여 세상은 달라졌지만 사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제 강점기 세상을 호령하던 이들은 번마다 옷을 갈아입고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있다. 그 힘에 굴종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억울함과 모욕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욥기>는 이런 삶에 처한 사람들의 오래된 질문을 대변하고 있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부조리한 현실을 향하여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묻고 있다. 욥의 대변과 질문은 지금 여기의 문제이다. 기독교인에게 욥은 인내와 순종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존재이다. 고통스러운 삶의 자리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그는 흠결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고난에 처해졌다. 악행과 불경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고난 앞에 직면했다. 가진 것을 모두 잃어버렸고,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해야 했다. 이런 때에 고난받는 욥을 위로하겠다고 찾아온 친구들이 있었다. 친구들은 신상필벌(信賞必罰)과 인과응보(因果應報)과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말로 욥을 괴롭힌다. 욥은 친구들의 주장에 항변하며 인과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이 있음을 주장한다. 친구들과 욥 사이의 격론이 <욥기>의 주 내용이다. 과연 누구의 주장에 타당성이 있을까. 세상 이치가 모두 신상필벌, 인과응보, 권선징악으로 귀결되는가? 예레미야의 질문,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렘 12:1)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욥기>가 밝히고자 하는 것은 고난이 결코 삶을 파괴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고통이 아무리 크고 깊어도 신앙심을 훼손하지 못하며, 인간성을 파괴할 수 없다. 상식과 보편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이 비일비재하다. 무고한 사람이 간첩으로 내몰리는가 하면 죄없이 20년 옥살이를 한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꼭 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미꾸라지처럼 법망을 요리조리 빠져나가기도 한다. 사소한 문서 위조로 어떤 사람은 4년 징역형과 수억대의 벌금형을 받았지만 그보다 무거운 혐의를 받는 사람은 고의가 없다며 면죄부를 주고 있다. 상식과 인과율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지금 고난 앞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욥의 마음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힘겹지만 그 어려움을 잘 극복하기를 간절히 빈다. 이유 없이 당하는 고난에 이유가 생기기를 빌며 두 손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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