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묵상나눔 › [윤용목사]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윤용 목사 | 2020.07.07 19:18:56 | 메뉴 건너뛰기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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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베드로전서 4:1-11)

1. 신자의 삶의 특징...

신자의 삶의 특징을 두 가지 대조로 말할 수 있다.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이라는 대조다.
무엇을 하지 말고 무엇을 해야 할까?

(벧전 4:2, 새번역) 이제부터는, ②육신으로 살아갈 남은 때를 인간의 욕정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 ②이 세상에서의 삶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욕정대로 사는 삶'이고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다.

이 말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방탕과 정욕과 술 취함과 환락과 연회와 가증스러운 우상숭배에 빠진
지나간 삶에서는 빠져 나오고,
뜨겁게 사랑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벧전 4:3, 8, 새번역) [3] 여러분은 지난날에 이방 사람들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였으니, 곧 방탕과 정욕과 술 취함과 환락과 연회와 가증스러운 우상숭배에 빠져 살아 왔습니다. 그것은 지나간 때로 충분합니다. [8]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렇게 간단히 명령문으로 적은 이 삶이
과연 쉬울까?' 하는 문제다.

'방탕한 삶을 그만 살아야지'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 삶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고,
'뜨겁게 사랑해야지'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사랑하는 삶이 쉽게 된다면 정말 좋겠지만,
결코 그 삶이 쉽지 않다는 것에서
신자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한다.

2.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리 봐도 미운 짓만 하는 원수같은 인간이 있는데,
그 사람을 '사랑해야지.' 라고 생각해서 사랑이 될까?
'주님. 저 사람을 사랑하게 해주세요.'라고
뜨겁게 기도하면 사랑하게 될까?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그런 방식으로는
그 원수같은 인간이 더 미워진다.
잘못은 그 인간이 했는데,
그 인간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기까지 해야 하니,
그 인간에 대한 미움은 더 커질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하다.

방탕과 정욕과 술 취함에 빠진 사람이
그 삶에서 벗어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오늘만 하고 그만해야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인데,
며칠만 지나면 다시 방탕과 정욕과 술 취함에 빠진다.

이런 일은 말말 한다고 해서,
명령만 한다고 해서,
단순한 결심만 한다고 해서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베드로의 말에서 중요한 힌트를 얻는다.

(벧전 4:11, 새번역)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답게 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사람답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모든 일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습니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듯 말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사람답게 봉사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힘과 능력과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는 것이
방탕에서 벗어나고 뜨겁게 사랑할 유일한 방법이다.

당연히 반박을 할 수도 있다.
명령문을 듣고, 또는 '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근거해서
자신의 의지를 발동해서 기어코 해내고야 마는
선한 사람이 있지 않느냐는 반박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자신은 의지를 사용해서 해내었기 때문에
자신처럼 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정죄하고 판단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문제다.

정죄하고 판단하고 손가락질 하는 마음이란 교만이다.
자신은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교만한 마음이
그 사람 속에 자리잡을 수밖에 없다.

의지가 강해서 무언가를 해내고야 마는 사람은
사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는 것의 의미도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다.

자신의 결심과 의지만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방탕에서 벗어나야 하고
하나님의 주시는 힘으로 뜨겁게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말하고 봉사하게 되는 것이
신자의 올바른 삶이다.

3.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일까?
그냥 추상적이고 공허한 소리로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라고 말한다면
그건 참으로 무책임한 말이 될 수 있다.

성도 각자가 하나님의 힘으로 라는 개념에 대해서
추상적으로 생각만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결국 방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뜨겁게 사랑하지도 못하는 상태로,
마치 방탕에서 벗어난 것처럼 위장하고,
사랑하는 척 위장하는 것에만 능숙한 사람이 되기 쉽다.

그런 사람이 바리새인들이었고
그런 사람을 향해 주님은 '회칠한 무덤'이라고
심각한 책망을 하셨다.

회칠한 무덤이 되지 않아야 한다.
외식하는 바리새인처럼은 살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진실한 삶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까?

직장인 한 분을 심방했었다.
밤 늦게 퇴근하고서
말씀을 30분 정도 묵상하는데
그 시간에 자신의 죄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기 때문에
그 시간이 너무 좋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제가 고객들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고객들이 아픔이 많은데 그 사연들에 관심이 별로 없고
그냥 일만 처리하려 하는 제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그때 내가 이렇게 대답을 했다.
"형제님. 그 많은 고객을 다 사랑하려 한다면
형제님은 일을 하지 못할 겁니다.
고객은 고객으로 대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형제님이 잘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 분과 어제 다시 심방을 했다.
식사 중에 그 분이 이렇게 말을 했다.
"목사님과의 그 때 대화가 충격이었습니다.
보통 목사님들이라면 '형제님. 더 사랑하려고 노력하세요.'
정도의 대답을 했을 것 같은데,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씀하시다니
깜짝 놀라면서 마음에 자유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자유를 느꼈지만
저는 고객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더 애쓰게 되더군요.
신기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강요와 의무를 지우는 방식으로는
사실 별 교화를 얻지 못한다.
목사가 모든 설교에서 '~해야 합니다.'를
계속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면,
그래서 그런 설교가 효과가 있어서 교인들이 변하고 있다고 여긴다면
그건 큰 착각일 가능성이 높다.

교인들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 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의무나 짐을 부과하는 것은
전형적으로 바리새인들이 하는 짓이다.

(마 23:2-4, 개정)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모세의 율법으로 명령하고 의무는 지우면서
사실 그들 자신도 율법을 지키는 것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악한 자들이
서기관이요 바리새인들이었다.

왜 바리새인들은 의무는 지우고 자신은 행하지 않을까?
그건 비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세요." " ~ 해야 합니다."
등의 용어를 남발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그렇게 실제로 행해 보고
그것들을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자신의 몸으로 느꼈다면,
그렇게 쉽게 의무를 지울 수가 없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여서 무엇을 해야 한다고
외칠 수는 더더욱 없다.

목소리를 높여서 의무를 지우는 말을 하고
명령문을 사용하는 말과 설교를
상습적으로 반복하는 사람이라면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외식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실제로 실천을 하고 있다면,
방탕과 탐욕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발버둥을 쳐보았고,
뜨겁게 사랑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쳐보았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힘쓰고 애써보았다면
쉽게 명령문을 사용할 수가 없다.

그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이요,
사실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방탕에서 벗어나고
뜨겁게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이 가능하려면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서' 해야 한다.

행동의 변화 이전에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그건 의무를 지워서 될 일은 전혀 아니다.

4. 나는?

말씀을 묵상하면 된다.
말씀이면 충분하다.
말씀에 삶을 걸면 된다.
말씀이 다 한다.
등의 말을 나는 자주 한다.
그리고 나는 이 말들을 믿는다.

그렇지만 내가 하지 않으려는 것이 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의무로 지우는 일이다.

나는 '말씀의빛교회 성도라면
의무적으로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라는 개념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의무로 해서
말씀을 묵상하면서도 큰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을
제법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말씀에 대한 나쁜 기억만 쌓여서
결국 말씀의 아름다움과 능력을
깎아 내리는 주범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인 대화의 시간에는
말씀을 묵상하라는 명령문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말씀을 묵상해서 나에게 일어난 좋은 일을 말할 뿐이다.

설교에서도 명령문을 사용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의무로 부과하지도 않는다.
말씀을 왜 묵상해야 하는지,
말씀을 묵상하면 어떤 좋은 점이 있는지,
어떤 변화와 성숙을 경험할 수 있는지를
말씀에 근거해서 설명하는 것에 집중한다.

말씀 묵상이 생명을 얻는 통로라고 믿는 목사로서,
말씀을 묵상하면 방탕에서 벗어나고
말씀을 묵상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믿는 목사로서,
나는 성도들이 말씀을 묵상하게 만들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할까?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말씀 묵상만이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씀에 근거해서 차분히 설명하는 설교를 하고 강의를 한다.
나의 설교와 강의를 듣고 나서
말씀을 묵상할지 하지 않을지는
청중들 스스로 결정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 나는 무엇에 집중하고 무엇에 목사로서 삶을 걸어야 할까?
너무나 분명한 한 가지가 있다.
말씀 묵상이 주는 혜택과 장점과 좋은 점을
말씀에 근거해서 잘 설명했다면,
말씀을 묵상해서 그런 것을 내가 몸으로 누려가는 것이다.

내가 한 설교와 강의가 거짓말이 아님을
나의 삶으로 실천해가는 것만이
목사로서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 믿는다.

그래서 나는 강요나 의무 지우는 일을
성도들에게 하지 않는다.
말씀을 스스로 묵상하도록,
말씀의 은혜를 누려가도록 설교하고 도울 뿐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나는 말씀을 묵상한다.
그래서 말씀 묵상에 대해서는 할 말이 점점 많아진다.
말씀 하나에 삶을 걸어서
너무나 많은 것을 누려왔기 때문이고,
지금도 누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 나눠 먹으라고 선물 받은 체리를 가지고
성도들을 한 분 한 분 만나고 있다.
만날 때마다 감사의 눈물이 난다.

나는 그저 말씀 묵상이 주는 혜택을 설교할 뿐인데,
그리고 내가 말씀이 주는 은혜와 혜택과 변화를 누려갈 뿐인데,
성도들의 삶 속에 말씀이 자리잡아 가는 것을,
말씀이 주는 깊은 은혜와 혜택을 스스로 누려가시는 것을
교제를 통해서 듣고 보기 때문이다.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의 바른 관점을 알아가고
말씀에 삶을 거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잘못된 삶에서는 벗어나고
사랑의 마음은 점점 커져가는 성도들과 나의 삶이 되길,
말씀 때문에 한 걸음씩 성숙해져가는
이 아름다운 여정이 멈추지 않길
간절히 소원하는 아침이다.

윤용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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