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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i Choi | 2024.02.06 08:38:28 | 메뉴 건너뛰기 쓰기
루저의 기도
시편 102:1~11
좋은 부모를 통하여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넉넉한 살림살이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하고 싶은 일을 유감없이 하며 산 사람은 괴팍한 부모를 통하여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고난을 경험하며 거친 세상을 산 사람에 비하여 세상을 보는 안목이 긍정적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라 경쟁에서 뒤져본 적이 없고 실패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어서 고집이 세고 독선적이며 남을 이해하는 일에 편협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려서부터 고난을 체휼하며 실패를 밥 먹듯 한 사람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동정하고 이해하며 독립심과 의협심이 강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란 하나의 공식만 적용되는 산수가 아니라 복잡하고 난해한 고차원의 방정식과 같습니다. 좋은 것이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이 꼭 나쁜 것도 아니라는 오묘한 삶의 원리를 가늠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인생을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한 모양입니다. 고난과 실패가 아프기는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하여 인생의 깊이가 깊어지고 도량이 넓어지기도 합니다. 고난의 깊이는 인생의 깊이와 비례합니다.
오늘 시편의 표제어는 ‘고난 당하는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의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로하는 기도’입니다. 성경이 승리하고 성공한 위인을 칭송하는 영웅전이 아니라는 사실이 반갑습니다. 만일 성경이 영웅을 찬양하는 책이고, 그리스도교가 승리자의 기반에 서 있다면 성경은 폐기되고 교회는 몰락하였을 것입니다. 성경이 영원불멸의 책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이유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우리와 똑같은 성정의 사람으로서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였다는 점이고, 독자 역시 고달픈 인생살이에 이리 체이고 저리 체인 낙오자와 실패자라는 점에 있습니다. 세속화된 시대에도 교회가 동네마다 존재하는 이유 역시 그리스도교 전통이 승리와 성공보다 실패와 절망을 품는 능력이 뛰어나고 낙오자의 한숨과 안타까움을 품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수들이 종일 나를 모욕하고, 나를 비웃는 자들이 내 이름을 불러 저주합니다. 나는 재를 밥처럼 먹고, 눈물 섞인 물을 마셨습니다.”(102:8~9)
시인은 욥처럼(욥 30:11,19,21) ‘주님께서 저주와 진노로 자신을 던졌다’고 묘사합니다(10). 하나님은 인생이 기댈 마지막 언덕입니다. 사람은 오해하고 왜곡하고 돌을 던져도 하나님만은 진심을 알아주고 억울한 자의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그런 하나님으로부터 마저 버림받은 시인의 처지가 참 딱합니다. 시인의 고통은 악인들에 의하여 받는 고통 때문만은 아닙니다. 악인들이 ‘네가 믿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하나님을 조롱하고 자신을 모욕하는 이 형편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시인은 슬픔을 양식 삼고 하루하루를 버틸 뿐입니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만은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기를 기대하지만 하나님은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십니다(욥 30:20).
주님, 교회는 어깨를 거들먹거리는 성공자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낙오자와 실패자를 위한 자리여야 합니다. 언젠가부터 주객이 전도된 모습이 속상합니다. 4.16 유가족과 10.29 유족들의 가난한 마음을 위로하는 교회가 되기를 두 손 모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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