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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 2018.05.23 15:46:28 | 메뉴 건너뛰기 쓰기

[기자칼럼]저 정도면 나쁘지 않다

박병률 경제부

2018.05.21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별세했다. 사람에 대한 진짜 평가는 사후에 이뤄진다고 한다. 그의 부고 기사에 달린 댓글과 트윗글을 쭉 읽어봤다. 고인을 폄훼하는 내용을 찾아보기 힘들다. 망자를 추모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하더라도 재벌총수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후한 적이 있나 놀랍다. 드루킹 댓글조작 사건으로 의미가 많이 퇴색되긴 했지만 댓글이 여론의 리트머스 역할을 한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돈도 많은 양반이 저 정도면 나쁘지 않다. 타 회사나 권력자들이 갑질하는 것에 비하면 진짜 양반이다.” 베댓(공감을 가장 많이 받은 베스트댓글)이 된 이 두 문장에는 구 회장에 대해 호의적인 시각이 압축돼 있다.

 
구 회장은 다른 재벌기업 총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세간에 덜 알려졌다. 평소 행보도 조용했지만 생전 포토라인에 한번 선 적 없고 갑질이나 그룹 승계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적이 없었다.기업인에 대한 사후평가는 개인의 삶과 함께 제몸처럼 일군 기업에 대한 종합평가다. 그가 23년간 경영해온 LG는 어떤 기업일까. 냉장고를 잘 만들고, 디스플레이와 2차전지에 강점이 있는 회사. 이동통신을 갖고 있지만 스마트폰은 별로인 회사. 그리고 만년 하위팀 LG트윈스의 구단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 정도 범주를 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일반인들에게 기억되는 기업 이미지는 훨씬 긍정적이다. 온라인상에 회자되는 말 중에 “LG가 또…”가 있다. LG가 좋은 제품을 만들고도 제대로 홍보하지 않는다며 누리꾼들이 나서서 홍보를 해주면서 시작된 말이다. LG전자가 스켈레톤의 윤성빈 선수를 2015년부터 응원했다는 것이 뒤늦게 알려졌을 때도 누리꾼들은 이런 댓글을 달았다. 지난달에는 LG전자가 방화복 전용 드럼세탁기를 만들어내 안전센터에 무상으로 기증했다는 현직 소방관의 글이 올라왔다. 이 글에 붙은 댓글은 “LG홍보팀 또 일 안 하냐”였다.


의로운 일을 하다가 피해를 당한 사람의 기사 뒤에는 으레 붙는 댓글이 있다. “LG가 의인상을 꼭 주세요.” LG는 2015년부터 국가와 사회정의를 위해 희생한 의인 72명을 선정해 지원했다.그라고 완벽했을 리는 없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 흘린 노동자도 있을 것이고, 재벌기업 LG에 복장 터진 중소하청업체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흉보다 칭찬이 많은 것은 그 정도면 잘 산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바라는 재벌의 역할은 완벽이 아니다. ‘그 정도’면 된다.


현 정부 들어 재벌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높다. 재벌개혁을 요구하면 한쪽에서는 매우 불편한 시각으로 바라본다. ‘기업 죽이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시민들이 바라는 재벌개혁은 엄청난 것이 아니다. 경영을 투명하게 하고, 일감몰아주기 그만하고, 중소기업도 함께 살 수 있도록 길을 좀 터달라는 것이다. 기업을 승계할 때는 법대로 세금을 따박따박 내고, 직원을 내 가족처럼 대해달라는 것이다. 더불어 재벌의 성장과정에 정부와 시민의 지원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당부도 있다. ‘그 정도’만 해주면 박수쳐줄 시민들이 많다.


연로한 재벌총수들이 많다. 이미 병상에 있는 총수들도 있다. 사후 구 회장과 같은 평가를 받을 인물이 얼마나 될까. 단기간에 성과를 낸 대단한 기업은 많지만 국민의 사랑을 받는 위대한 기업은 드물다. 구두쇠 스크루지는 미래의 유령과 함께 밤사이 자신의 미래를 보고서 개심했다. 어쩌면 구 회장은 존경받는 기업인이란 어떤 모습인지를 몸소 보여줬는지도 모르겠다.


“국민과 사회로부터 존경받는 기업이 됩시다. 사업구조를 고도화하고 경영 시스템을 혁신하더라도, 사회로부터 인정과 신뢰를 얻지 못하면 영속할 수 없습니다.” 고 구 회장이 지난해 신년사를 통해 한 말이라고 한다. 구 회장의 영면을 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5212046025&code=990100#csidxbad642f7ff3f1db8344e84a167cd95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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