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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의 때를 사는 성도들의 자세 ①

무엇이든 묵상............... 조회 수 1163 추천 수 0 2012.01.09 19: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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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마가복음 16장14절)

 

부활하신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 제자들은 로마 병사들과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꼭 잠그고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믿고 의지하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때 그들은 극한 충격과 절망을 겪었습니다. 엠마오의 제자가 표현한대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눅24:21),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랫동안 기다린 '메시아'로 믿고 따랐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마10:28)

이 베드로의 고백은 사실입니다. 당시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분을 메시아로 믿는다는 것은 엄청난 헌신와 결단이 요구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쉽지 않은 헌신으로 주님을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의지하고 사랑하던 영광의 메시아가 갑자기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 곧 이스라엘의 왕이 오히려 이방인들의 형틀에 달려 죽는 것을 그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앞으로 더욱 깊이 다루겠지만 당시 유대인들이 바라던 메시아상과 예수님의 여정은 사뭇 달랐습니다. 역시 유대인인 제자들은 그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도 받아 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짙은 슬픔과 상처로 가득한 그 풍경 속에 갑자기 예수님이 살아서 나타나셨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몹시 놀랐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놀라는 그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구운 생선을 드시기도 하셨습니다.

 

참으로 감격적인 상봉의 시간인데 마가는 예수님이 그들을 꾸짖으셨다고 기록했습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좀 봐주시지 않고 왜 혹독하게 책망하신 것일까요? 사실 제자들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과 부활하심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본 여인들이 전하는데도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도 그들은 이상하게 귀와 눈, 심령이 굳어져 믿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믿음을 상실'했고 '마음이 완악하여' 돌짝 밭과 같이 되었습니다.

 

이 부끄러운 제자들의 모습은 마치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형과도 흡사합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18:8)

이것은 예언적인 말씀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때에 대하여 하신 '열 처녀의 비유' 중에서 신랑을 기다리던 이들이 "신랑이 더디옴으로 다 졸며 잘새"(마25:5)"라고 하셨습니다.

 

이것도 매우 두려운 예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마지막 때 교회는 어둠 속에서 분별력을 상실하고 깊은 영적인 잠을 자고 있습니다. "이렇게 뜨겁게 열심히들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는 안목과 본질은 우리의 안목과는 무척이나 다릅니다. 하나님 나라는 외양이나 형식, 규모가 아닌 그 진실과 중심을정확히 살피십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지 않으면 큰 낭패를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 경외하는 자라면 지금 이 시대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복음서의 부끄러운 구절을 늘 기억하고 있는데, 그것은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막14:50)라는 구절입니다.

 

제자들의 처음 열정와 확신의 모습들로는 도무지 이런 풍경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안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와 유대의 군인들, 십자가라는 환난이 닥치자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이유는 제자들의 연약함을 판단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 또한 얼마든지 이런 부끄러움에 처할 수가 있음을 상기하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직 우리는 진정으로 환난다운 환난을 통과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제시대에 대부분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한동안 그것을 지적하고 회개하는 운동이 일각에서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교회가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강하게 반대했으나 일제가 강하게 억압하자 결국 교단과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종용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총, 칼의 위협 앞에서 그토록 지켜온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져버린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수가 있을까? 라고 생각할테지만 만일 우리가 그 시절에 살았었다면 우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현실을 아직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대부분은 믿음을 버리고 여러가지 합리적인 이유를 만들어 우상 숭배를 했을 것입니다. 그 때는 교단의 대표들이, 목회자들이 앞장서서 그 태양신 앞에서 절을 했습니다.

 

이것은 실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엄청난 배교(背敎)의 행위였습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 하나님을 배반하는 악한 행위였는지를 깨닫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성전 문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스물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 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게 예배'하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보았느냐 유다 족속이 여기에서 행한 가증한 일을 적다 하겠느냐 그들이 그 땅을 폭행으로 채우고 또 다시 내 노여움을 일으키며 심지어 나뭇가지를 그 코에 두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도 분노로 갚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에스겔 8:16-18)

 

이것은 이스라엘이 태양신에 숭배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에 대한 두려운 말씀입니다. 이것과 신사참배는 동일한 형질의 우상 숭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예배하던 성전을 등졌다 는 것이 배교의 전형입니다.

 

'배교'란 '하나님을 등(背) 지고 다른 우상에게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대신 절하고 섬긴 우상은 놀랍게도 '동방의 태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가 바로 '동방요배'((東方遙拜)인데, 그것이 동방 태양신인 천황을 향해 절을 하는 것입니다. 이 '태양신'에게 절을 한 것은 이스라엘의 배교와 너무나 흡사했고, 그 본질이 동일했습니다.

 

심지어 일본의 학자들 중에는 자기들의 조상과 섬기는 신사, 태양신이 북이스라엘에서 흩어진 10지파가 흘러 들어와서 만든 것이란 주장까지 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신사의 구조와 제사의 형식, 신도(神道) 의 내용조차 성막이나 이스라엘의 제사구조와 흡사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조금은 극단적인 주장일 수 있지만 무시할 수 없는 영적인 연결고리에 전율한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영적인 것들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언제나 연결성을 가집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계14:8)

오래전 사라진 바벨론 성은 여전히 귀신들의 처소로서 마지막 심판때까지 남아 있음을 성경은 증거합니다. 이 하나님을 대적한 바벨의 원형은 전 세계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듯 이 태양신의 구조도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하고 배교에 이르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 영역이 전세계 열방으로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남과 북에 그 참혹한 고통을 가져온 전쟁은 교회의 신사참배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것을 무어라 확증할 수 없으나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직 배교를 강요당한 적도 없고 목숨 걸고 신앙을 지켜야 하는 환난을 겪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을 처참히 고문하거나 수용소에 가두어 고통을 준 북한의 실상이 앞으로 다가올 환난의 그림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언젠가 이 민족의 통일과 회복을 위해 오래 기도하고 섬긴 한 선교사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먼 얘기, 남의 얘기처럼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제 곧 그런 시절이, 현실이 바람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저도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달아 보고 그 진정성을 검증할 환난이 결코 멀지 않았습니다. 상상하지도 못한 불의 시련을 성경은 명확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등불이 내 길의 빛이 되도록 깊이 살펴야 합니다.

 

무슨 두려움과 불안을 조장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그 말씀에 집중하고 절대 복종하는 충성이 열리지 않으면 진정 상상하지 못한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저는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봅니다.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냐 보라 여호와의 노여움이 일어나 폭풍과 회오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여호와 의 진노가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그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끝날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렘 23:16-20)

 

예레미야 당시 많은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평안하다 평안하다"라고 하며 여호와의'심판'과 '끝날'은 없다고 거짓 위안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은 안일함 속에 우상을 섬기고도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메세지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그 말씀, 하나님의 크고 두려운 진리가 아닌, 자신들의 생각에서 버무려진 것입니다.

그것은 예전의 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땅의 교회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저는 성령님을 깊이 만난 후에야 나 자신이 얼마나 진리를 알지 못하고 불순종 하고 있었는지를 절절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나름대로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을 꾸려왔다고 생각했으나, 내가 얼마나 불순종하고 있었는지를 그제서야 발견하였습니다.

 

그 불순종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그 말씀으로 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의 형식과 진실과 애씀을 가졌으나 많은 부분이 내 생각, 경험, 전통적인 이해로 채워져 있음에 무척 놀랐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벧후 3:4,5)

 

베드로는 무엇보다 교회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을 경고합니다. 그것은 세상은 앞으로도 그대로 있을 것이고 재림이나 대환난 같은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무슨 괴악(怪惡)한 자들이 아니라 다만 '정욕을 따라 행하는 자들',즉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된 것이 아닌, 자신의 자아로부터 기인한 생각들에 따라 행하는 이들입니다.

 

오히려 그런 이들은 세상적인 안목으로 더 세련되어 보이는 지성적인 사고를 하는 자들일 수가 있습니다. 또한 반대로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종말이나 현상에만 치우치는 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고 깨어 순종하지 않으면 정욕으로 사는 것이고 미혹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일부러 잊으려는 행위라고 합니다.

 

말이나, 대환난, 휴거같은 말들은 치우친 이들의 소산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내게 있었습니다. '666과 짐승의 표'나 '휴거', '무화과나무의 비유'같은 종말의 예언에 집착하는 것을 마치 성령의 외적인 은사나 표적에만 지나치게 집중하는 사람들을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성령세례' 처럼 성경이 명확히 말하는 것임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후로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에 깊이 마음을 열고 복종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희가 끝날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렘 23:20)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바벨론이 침략해와 처참히 살해하고 포로로 사로잡혀 가서야 그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참으로 그저 막연하게 판단하거나 흘러 가다가 이런 날이 우리에게도 당도하지 않기를 기도하는 바입니다. 주님의 재림과 심판을 환난에 처해서야 깨닫는다면 그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이 성경의 현실은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과 너무나도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부흥과 회복, 성령의 기름부음, 그리고 세상이 더 좋아질 것 같은 넘치는 하늘의 축복들, 성장들만을 말합니다.

 

물론 성경은 그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세상이 가면 갈수록 더욱 힘겨워지고 고난이 중첩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 부흥과 기름부음은 환난 날을 위해 부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를 믿는 자라면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이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 의 시작이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 24:6-13)

이것이 우리 시대의 실상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에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20)고 당부하셨습니다. 우리는 말씀의 어느 한 부분을, 나의 유익과 필요에 적용시키는 것만을 취해서는 안됩니다. 자기의 평안과 안위, 필요를 위해서 먼저 말씀을 취하는 죄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의 본질과 뜻, 그 마음에 주목해야 하고 경외함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라" (요14:23)

참으로 놀랍고 중요한 우리 구주 예수님의 마음이요 진리입니다. 이 종말에 대한 말씀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심각하게 주신 마지막 메세지입니다. 예수님은 곧 고난을 당하실 그 절대절명의 시간에 이 말씀을 매우 깊고 중요하게 하셨습니다.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의 의도와 뜻을 깊이 만져야만 합니다.

 

재림에 대한 관심은 신랑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척도와도 같습니다. 진정 말로만이 아닌, 주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그분의 다시오심이 그 영의 들끓는 기름부음이요, 갈망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나, 축복, 자아실현에 관한 다른 것들은 적극 취하면서 이 마지막 당부같은 부담되는 것은 슬쩍 피하고자 하는 음험한 욕망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 사랑을 검증하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더욱 알아보겠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마25:24-26>

 

이 '달란트의 비유'는 마지막 날의 심판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은사, 사명과 거룩의 소명들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기만 하고 열심히 장사하여 결실하지 못하면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그것이 곧 '죄'이고 그런 자는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 달란트를 받은 이들은 신앙을 가진 이들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정도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면 구원을 받고 휴거를 하고 환난을 당하지 않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 24:29,30)

 

여러가지 생각해 볼만한 부분이 많은 구절이지만 예수님은 '환난 후에' 구름 타시고 오실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환난을 통과해야 하는 성도들의 모습이 성경에도 많이 나옵니다.

 

마지막 때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이론들이 많으나 성경 전체를 살피면 그 날을 깨어 적극적으로 예비하지 않으면 환난에서 넘어짐을 경고합니다. 강력한 성령의 충만과 깨어 충성하는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을 주님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극단적으로 책망하십니다.

 

성경엔 '부작위'(不作爲, omission)와 '작위'(作爲, commission)의 죄가 있습니다. 작위의 죄는 의도적으로 스스로 범죄하는 것입니다. 부작위의 죄는 하나님의 말씀 은사, 축복을 방치하고 적극 순종하여 누리지 않는 태만의 죄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히2:3)

이 말씀도 두려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그 십자가와 부활, 그것을 통해 이루어 주신 놀라운 구속의 영광, 은총, 유업을 그저 적당히 이해하고 적극 누리거나 증거하지 않으면 '보응'(報應, 심판)을 받게 됩니다.

 

성령세례를 받고 나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닫게 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 때에 대하여 말씀하신 '달란트'와 '열 므나'의 비유는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달란트는 금화의 일종으로 '금'이 상징하는 '거룩'이나 '성령의 신성한 은사'와 연관됩니다. '은'은 '구속'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열므나는 각 사람에게 동일하게 한 므나씩 주시는 것입니다.

 

달란트와 달리 십자가와 보혈, 구속의 은총은 예수를 믿는 이들에게 동일하게 주시는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구속의 영광과 권능과 승리를 키우고 깨닫고 능력으로 역사되게 하지 않으면 '악한 종'이 되어 심판을 받습니다.

 

십자가와 보혈의 능력이 막연한 이해가 아닌 능력으로 내 삶에 나타나지 못하면 마지막 때에 패하고 맙니다.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계12:6)

 

이 예수님의 마지막 때에 대한 말씀들은 불신자들의 이야기도 아니고 단지 비유라는 형식에 불과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저 적당히 주신 은혜와 은사를 가지고 묻어만 두어도 심판을 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명령을 적극 듣고 그것을 믿음의 반석으로 서게 하지 못하면 무너집니다.

"그 때에 나더라 주여 주여 한다고 천국(하나님 나라, 혼인잔치)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진리)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 가리라"(마7:21)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제자들이 불의의 창수(영적공격, 시험)에 휩쓸려 예수님을 다 버리고 도망가게 된 실패의 원인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그리스도, 메시아)로 부르면서도 자기들의 관념이나 원하는 것들만 믿고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들의 생각, 전통, 이해가 더 크고 앞서 있기에 믿음의 반석위에 서지 못하여 바람이 불고 비가 오자 무너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누히 십자가를 지실 것과 제삼일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시지만 심령 깊이 새겨지지 않았고 믿지 못합니다.

 

그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재림에 대한 말씀, 대환난과 징조들에 대한 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아니기에 회피합니다. 무수한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듣고 예배와 추구를 하지만 여전히 '믿음없음'에 처할 수가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재림과 마지막 때에 대하여 더욱 그렇습니다.

주님의 이 종말에 관한 말씀은 비유나 상징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아이티나 칠레, 일본에 사는 이들이 겪은 지진과 쓰나미처럼 실제적인 환난이 될 것입니다.

 

저는 그 뉴스를 보면서 처음으로 그들이 맞닥뜨린 현실과 나를 동일시해 보았습니다. 그 전에 인도네시아의 쓰나미나 중국 스촨성 지진같은 수십만명이 한 순간에 죽는 그런 재앙을 보면서도 나의 마음은 안타깝게 여길 뿐 주님 오시는 발자국 소리인 것에 대해서는 무감각 했습니다.

 

그러나 이 재난을 보면서 내 안의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남의 일이 아닌 너무나 절절한 나의 엄청난 고통의 현실로서 다가왔습니다.

 

저는 그전에 이런 것들이 마치 남의 일인양 무감각하게 되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말씀들이 너무나 실제적으로 만져집니다. 성령님이 그 눈을 열어주십니다.

 

많은 이들이 믿는 성도들을 환난과 죽음, 고문, 배교를 강요하는 일에 집어넣을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생각이나 주장이 아니라 성경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먹을 것 때문에 계시록에서 말하는 '짐승의 표'를 받는 배교를 하게 될 것입니다. 가족과 생존을 위해서 하나님을 저주하고 우상에게 절하는 일들도 생길 것이라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것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부담되는 말씀들도 반드시 깊이 새겨야만 합니다.

 

'요즘같은 자유주의 세상에 그것이 가능할까?

아마 그것은 예수님 당시나 오래전 과거같은 시대에 대한 말씀일거야."

 

'저도 한동안은 그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상의 환난도 순식간에 가능해질 수 있음을 느낍니다. 성경을 다시 진리의 성령님께 가르침을 구하면서 명확히 읽어야 합니다.

 

신뢰받는 사역자인 존 비비어(John Bevere)는 "불법이 성하므로 사랑이 식어진다"(마24:12)는 구절을 들어서 이 환난을 겪는 이들이 신앙인들이라고 했습니다.

 

'불법'과 '사랑'이란 개념은 크리스찬들에게 해당되는 용어라는 것입니다. '불법'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삶' (마7:23)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사랑'은 '아가페'(Agape)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사람들이 가진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가진 자들은 불신자가 아닌,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세상 끝에 대한 말씀은 유대인 제자들에게, 또 오늘 우리에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주님의 말씀은 이스라엘과 마지막 때 교회에 닥칠 일들로 읽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식어지고 서로가 환난 가운데, 배교를 강요하는 가운데 처해지는 현실이 홍수같이 닥쳐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읽거나 듣지만 진정으로 믿는 자들은 매우 드뭅니다. 제자들이 그랬듯이 그저 남의 이야기처럼 생각합니다. 그것을 수없이 읽고 듣지만 진정으로 믿음으로 그 때를 대비하는 이들은 보기 힘듭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 을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 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24:40-44)

 

이 말씀을 다시 꼼꼼히 살피다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에서 '밭'이라는 것은 말씀의 씨를 뿌리고 헌신하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지경입니다. 두 사람은 그 밭에서 씨를 뿌리거나 밭을 갈거나 행하는 이들입니다. 즉 나름대로는 헌신한 성도들입니다.

 

'맷돌'을 가는 것은 '곡식을 갈아 양식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도 신앙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 중에 그 날에 한 사람은 혼인잔치에 들어 가고 한 사람은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열처녀가 다 등불을 들고 신랑(예수님)을 기다리지만 다섯명만 들어갑니다. 이 말씀을 읽는 순간 두려움과 전율이 나이 영혼을 엄습했습니다. '이렇게 그저 막연히 추구하고 애쓰고 흘러갈 때가 아니다. 더욱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말씀의 본질을 발견하고 깨어 그 날을 예비해야만 합니다.

 

'마지막 때, 다시 오시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내 안에 그런 성령님의 음성이 가득 부어졌습니다.

 

종말이나 재림에 대한 나눔은 누구나 즐겨하기 어려운 피하려는 부분입니다. 많은 논란과 비판이 예상되는 영역이지요. 그러나 진리의 성령님이 내 안에서 그것을 강권하십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오직 충성 뿐입니다. 부족하지만 이 작은 충성이 내 사모하는 영광의 구주가 오시는 길에 작은 예비가 되기를소망합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마24:45-47)

 

여기서 '때'라 함은 '마지막 주님의 다시 오실 그 때'입니다. 성경을 정확히 그 하신 말씀 그대로 읽고 그 위에 분연히 서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들었으면서도 부활을 믿지 못해서 책망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재림에 대한 말씀을 읽고 듣지만 진정한 믿음으로 취하지 않는다면 심각한 일입니다.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을 생각하면 '요셉'이 떠오릅니다. 그는 다가올 풍년과 흉년의 때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지혜롭고 치밀하게 그 때를 예비하여 환난을 이기게 했습니다.

 

이 시대는 교회들이 온통 부흥과 성장, 자기의 풍년만을 구하는 시절입니다. '환난과 흉년의 때'에 대하여 깊은 고민과 말씀의 진정성, 지혜와 총명을 가진 청지기를 보기 드문 때입니다.

 

다니엘처럼 깨어서 지혜와 총명,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등불을 예비해야 합니다. 지금은 그 마지막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야 할 절박한 시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과 경외함으로 깨닫고 복종해야 할 재림의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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