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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투명함에 이르도록

한희철 한희철............... 조회 수 15 추천 수 0 2022.09.05 20:4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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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투명함에 이르도록
수원역에서 택시를 타고선 수첩에 메모해 둔 아파트 이름을 대자 기사는 별다른 질문 없이 바로 출발을 했어. 고등학교 3년 동안 학교를 다닌 곳이지만 그동안 수원은 너무도 많이 달라져 어디가 어딘지 짐작하기가 어려울 정도였지.
제법 동쪽으로 달린 뒤 한 아파트 단지 앞에 내려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교회를 찾을 수가 없었단다. 몇 개의 십자가 첨탑이 눈에 들어오긴 했지만 전화로 들었던 교회는 아니었어. 마침 신호등 앞 길가에서 나물과 몇 가지 곡물을 땅에 펼쳐 파는 할머니가 계셔서 인사를 드리곤 교회를 물었는데 할머니도 모르겠다 하시더라고.
잘못 찾아왔나 난감해하고 있을 때 너는 저만치에서 손을 흔들며 나타났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이었어. 그제야 가만 보니 높다랗게 선 아파트 단지 앞 나무 사이로 몰랐던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어.
새로 시작한 티가 곳곳에서 묻어나는 예배실에 앉아 잠깐 기도를 드리곤 짧고 좁은 통로를 따라 2층 서재로 올랐지. 한 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서재에 신을 벗고 고개를 숙여 들어섰을 때, 마음이 짠했단다. 여전히 너는 같은 자리,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었어.
신학공부를 마친 뒤 너는 줄곧 한 교회를 섬겨왔지. 조립식 예배당이 세워졌던 후미진 그곳이 재개발이 된다고 하여 막 자리를 옮겨왔을 뿐, 너는 무엇 하나 달라진 것 없는 삶을 살고 있었어. 20여 년이 지나도록 한 교회를 섬기고 있는 것도 그랬고, 여전히 같은 규모의 교회, 살아가는 모습 또한 그랬지.
오랜만의 만남이라 밀린 얘기가 많았지. 사람들은 목사들이 만나면 무슨 얘길 나눌까 궁금해 할지도 몰라. 무엇보다도 우리는 말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어. 이야기를 나누면서 새삼스러웠던 것은 누군가 목회자를 만나 말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이 얼마만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어. 목회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혹은 잡다한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흔하게 하면서도 정작 말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오히려 드문 것 같아.
이야기를 나누며 눈여겨보니 서재 책상 위에 놓인 책들도 거반 말씀에 관한 책들이더구나. 당연한 듯 목회자의 책상을 차지하고 있는 교회성장에 관한 책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어. 그 또한 너의 한결같은 모습이었지. 고지식하게 여겨질 정도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탄을 캐는 광부처럼 말씀의 의미를 캐내어 기록하고, 남모르는 시간 말씀을 되새김하는 삶을 줄곧 살아오고 있었던 거야. 점심을 먹으러 나간 시내 서점에서 우리가 서로 선물처럼 전한 책들도 거반 말씀에 관한 책이었으니, 나로서는 드문 만남을 오랜만에 갖는 셈이었어. 기교도 수식도 술수나 방책도 없이 규모와 높이에 눈이 먼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변함없이 말씀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문득 고마웠단다.
그 날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최근에 만난 책 중에 <어리석은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책이 있어. 제목이 대뜸 마음에 와 닿았는데 나에겐 책보다도 브레넌 매닝이라는 사람을 새롭게 만나게 된 계기가 되었어. 이미 몇 권의 책이 번역되어 그의 이름을 따로 기억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거야. 개신교와 가톨릭의 경계를 넘어서는 탁월한 강연과 저술을 통해 유럽의 그리스도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을 뿐 아니라, 개신교의 많은 영성저술가들과 지도자들이 그의 삶과 저서들로부터 깊은 영적 통찰과 영감을 얻고 있다는 저자의 소개가 책을 읽고 난 뒤에는 전혀 과장으로 여겨지지가 않았으니까.
그의 직업이 외과의사 혹은 조각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가 쓰고 있는 글은 생각의 깊이나 표현에 있어 어디 하나 허술한 데가 없었지. 괜한 과장이나 어색함 없이 가장 깊은 곳을 찬찬히 찔러 쪼개며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을 내내 떨칠 수가 없었어. 200여 페이지의 두껍지 않은 책이었고 내용 또한 명료하여 애매한 곳이 없었지만 책은 결코 쉽게 읽히지가 않았어.
밑줄을 그어놓고 생각에 잠겨 막 생각을 정리하려 할 때면 그는 또다시 메스인지 칼인지를 들이대곤 했는데,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퍼렇게 날이 선 그의 손길이 닿으면 워낙 깊은 곳 통증도 없이 교묘하게 자리를 잡아 나 자신도 모르고 있던 환부를 다시 한 번 마주하게 되곤 했지. 책을 읽으며 그런 느낌을 여러 번 받았단다.
우리의 깊은 내면을 찔러 쪼개며 다가오는 저자의 마음이 잘 담겨 있는 말은 책 속에서 여러 차례 강조되며 반복되고 있는 ‘투명함’이 아닐까 싶어. 투명함이라는 말은 자기기만 혹은 어정쩡함이라는 말의 반대편에 선 말일 거야. 동쪽이 나의 길이라 하면서도 서쪽을 등지지 못하는, 그러면서 동시에 동서로 가려고하는 어리석음과 어정쩡함, 철학에서 진리의 반대는 오류지만 성경에서 진리의 반대는 거짓이라는 지적은 얼마나 선명하게 와 닿는지.
투명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투명하지 못한 것이 우리 삶속에 어떤 모습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책속에서는 마치 병의 근원을 찾기 위해 집요하게 환부를 헤집는 의사처럼 낱낱이 지적을 하고 있어. 하나하나 같이 생각해 볼래?
관행이라며 자신의 사업 거래에 속임수와 조작을 묵인하는 반듯한 교인, 자기 몫은 감추면서 자신의 헌금에 자부심을 느끼고, 광희 상태의 죄책감 없는 삶을 당연한 현실로 여기고, 성경 해석의 통달을 거룩함으로 알고, 예수님의 영에 마음을 열되 피상적으로만 여는 거짓말쟁이들, 교회 갱신이라든가 변화를 위한 변화라면 선수지만 막상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생명은 옹호하지만 회교도와 죄인과 범죄자의 생명은 경시하고, 오늘 천국에라도 온 듯 흥분하다가 내일 죽을 듯이 침울해하는 순간의 기분파들, 믿음이란 먼지 앉은 전당포에 모아둔 독단적 선언에 불과하고, 그리스도의 불같은 포도주에 최대한 물을 많이 타고,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잘못된 삶에서 돌아서라는 소환장이 아니라 여태 살아온 대로 계속 살라는 결제 도장으로 알고, 자기 삶에 대한 지배와 통제를 버릴 마음은 없되 주님과 연합하여 살려는 모험은 내키지 않는, 자기 자신은 철저하게 육체 안에 거하면서 비판은 ‘성령 안에서’ 하는 일이 아니라며 외면하는, 적당히 가까이 서서 따뜻하게 불은 쪼이지만 절대 뛰어들지는 않는, 더 이상 말씀이 흥분과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나 아무 것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대신 경미한 탈선을 고치고 개선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영적 장난을 벌이는 도락가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식을 품되 자신을 지키지 않아 영적 정신분열증을 앓는, 그래서 하나님이 내 이름을 부르셔도 내가 내 이름을 몰라 대답하지를 못하는 사람들과 교인 수를 진정한 교회의 증거로 보는 교회들..... 숨이 턱 턱 막히도록 드러내는 그의 지적 속에는 우리의 알량한 모습이 담겨 있어 어디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데, 사실은 무엇 하나 그른 것이 없어 따로 숨을 데가 없다는 생각이 들지.
우리는 왜 투명하지 못한 걸까? 우리는 왜 일하시는 하나님의 창(窓)이 되지 못할까? 우리의 믿음 안에 있다고 고백하는 기쁨과 열정과 감사는 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일까?
무엇인가 투명함을 덮개처럼 가리고 있기 때문인데, 책에서는 그것을 인간의 3대 기본 욕망인 안전, 쾌락, 권력에 대한 우리의 집착이라고 말하고 있어. 안전과 쾌락과 권력을 추구하는 기본 욕망이 우리의 신앙 안에도 그럴듯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는 거야.
신앙을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거짓 안전으로 바꾸어 진정한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둔감하게 만들며(안전), 신앙을 다양한 영적 이벤트나 활력과 사기를 높여주는 듣기 좋은 메시지로 대체하며(쾌락), 신앙을 성공의 수단이나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방편으로 삼기도 하는 것이지(권력). 안타깝게도 이런 현상들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보게 돼. 신앙을 그럴 듯이 닮았지만 신앙이 아닌 모습을 말이야. 사이비(似而非)라는 말이 ‘비슷하지만 아닌 것’이라 한다면, 우리의 신앙 안에는 얼마나 많은 사이비적인 요소가, 투명하지 못한 것이 담겨 있는 것인지 모르겠어.
교회가 존재한 지 2천 년이 되었는데도 허다한 사람들이 아직도 기독교를 그냥 지나치고 있고, 때로는 악취라도 맡은 듯 고개를 흔들며 지나가고 있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무엇인가의 전조일 수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크게 고민하지를 않아.
“이미 믿음 쪽으로 가까이 왔던 많은 사람들이 악하고 거짓된 그리스도인들의 형편없는 삶에 놀라 달아나고 있다. 내 형제들이여,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은데 그리스도인들의 못된 모습을 보고 주춤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기독교 역사 초기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렇게 탄식을 했는데, 그의 탄식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지. 그를 탄식하게 만들었던 일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으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적 임재를 그리스도인들 속에서 찾아내기가 힘들어. 하나님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모범된 삶이라는 그리스도인의 확실한 표지를 더 이상 그리스도인에게서 찾기가 힘들게 되었어. “하나님이 최고로 중요하지 않다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했던 아브라함 헤셀의 말을 깊이 귀 기울여 듣지를 않는 것이지. 예수님을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았던 좋은 분으로 고백하며, 자신의 망가진 삶을 직시하지도 돌이키려고도 하지를 않는 것이야.
죄렌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던 두 부류의 그리스도인, 그분께 감탄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사람들 중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감탄하는 데에 머물러 있어. 예수님을 관람할 뿐 그분의 삶속으로 뛰어들지를 않는 것이야. 거룩한 삶을 위한 그분의 초대를 한낱 푸른 잔디밭의 소풍쯤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지.
그런 점에서 책의 맨 마지막에 자리 잡은 매닝의 다음과 같은 말은 얼마나 날카롭고 따뜻하고 눈물겨운 지적으로 다가오는지 몰라. 우리에게 정말로 부족한 것과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돌아보게 하지.
-내가 믿기로 우리들 대다수도 빌립을 찾아와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요12;21)라고 말한 헬라인들과 같은 심정일 것이다. 유일한 질문은 이것이다. “얼마나 간절히 뵙고자 하는가?”
적당한 마음이 아니라 절실하고 절절한 마음이 필요했던 거야.
예수님을 따라서 사는 삶의 모범인 투명함이란 ‘바보같이’의 뜻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주님은 내가 전에 없었던 바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라 말했지. 전에 없었던 바보가 되는 것, 주님의 부르심을 그렇게 이해를 하다니 놀랍지 않니? “세상에는 바보들,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들이 필요한 것 같다! 지구상을 변화시켜 온 사람들은 그런 바보들이기 때문이다”라 했던 케서린 드 휴엑 도허티의 말도 새롭게 들리고.
“주님을 놓칠 수 없습니다. 좋을 때나 궂을 때나, 승리할 때나 패배할 때나, 제 삶은 주님 없이는 무의미합니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바보들이 필요한 것이었어. 자기기만과 어정쩡함에서 벗어나 바보처럼 마음을 다해 그분을 따르는 투명한 삶, 생각해보니 우리는 본래 그 삶을 위해 부름을 받았어. 그런데 어느새 우리가 영악해져 가고 있었던 거야. 신앙 안에 신앙의 이름으로 자리 잡은 안전과 쾌락과 권력을 신기루처럼 좇으면서 말이지.
친구야, 우리 바보 같이 투명한 마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세상 풍조에서 서너 걸음 물러나 바보 같은 투명함으로 우리를 부르신 분을 따랐으면 좋겠구나. 하나님의 뜻 앞에서 천생의 바보였던 그분을 말이야.
주변을 따뜻하게 돌아보아 다음에 들를 땐 아파트 앞 길가에서 물건을 팔던 할머니가 자랑스레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알려주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
<기독교사상> ‘책에서 길어올린 풍경’
<어리석은 자는 복이 있나니>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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