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한희철 › 1811. 봉숭아

한희철 | 2002.02.15 17:35:24 | 메뉴 건너뛰기 쓰기

1811. 봉숭아

 

새롭게 사랑을 고백하듯이 아내에게 다섯권의 시집을 헌정하겠노라는 오래전 약속을 지키게 된 문종수 시인의 시집 '당신의 가슴 한가운데서'에 보면 '육순의 문턱에서'라는 시가 있습니다.
세월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는 시였습니다.

<아주 낯선
처음 찾아온 손님같이
육순이 문지방을 넘어섭니다.

어쩐다
허나 얼른 마음 고쳐먹고
중얼거리듯 말합니다

"어서 오시게나
오신 줄 알았네.">

며칠전이었습니다. 한 모임에서 이야기를 부탁받아 시내를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남아 이따금식 들르는 찻집을 찾게 되엇는데, 찻집 안엔 손님들이 한 테이블밖엔 없었습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대여섯명의 할머니들이 둘러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일부러 들으려 했던 것이 아닌데도 몇몇마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조용하고 좁은 찻집. 소곤소곤 나누는 이야기가 정겹게 와 닿았습니다. 아마도 외국에 나가 살던 분이 오랫만에 고국을 찾은 듯 했고, 보고 싶었던 친구들이 모여 밀린 이야기를 나누는 듯 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우리 오늘 저녁 다같이 손에 봉숭아물을 들이자."
한족 구석에서 책을 읽고 있던 내게도 그 말은 얼마나 또렷하게 들리던지요. 누군가가 이 날을 위해 냉장고에 봉숭아를 보관해왔다 했습니다. 할머니들은 더이상 할머니들이 아닌듯 싶었습니다. 설레는 목소리와 상기된 얼굴, 꿈 많은 소녀들이었습니다.
"첫눈 올 때까지 봉숭아 물이 안 빠지면 첫사랑을 만나게 된대"
"매니큐어 지우고 봉숭아 물을 들이면, 내 손에 꽃이 필 것 같애!"
세월을 그윽하게 맞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배우는 순간이었습니다. (얘기마을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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