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한희철 › 2356.눈을 뜬다는 것은

한희철 | 2007.12.09 19:26:13 | 메뉴 건너뛰기 쓰기
딸아이가 하룻밤 내내 끙끙거리며 풀려고 애쓴 문제가 있었습니다. 낮에 어떤 모임에 참석했을 때 누군가가 문제를 냈는데, 정답이 궁금하여 자꾸만 마음이 그리로 갔던 모양입니다.
문제는 엉뚱했습니다. 어떤 소경이 기차를 타고 가다 캄캄한 터널 속에서 자살을 했는데, 왜 자살을 했겠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소경이라면 캄캄한 터널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텐데 왜 자살을 했던 것일까, 이야기를 듣고서 잠깐 생각을 해보았지만 아무 것도 짚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정답을 다음날 들을 수 있었는데 정답 또한 엉뚱했습니다. 소경은 개안수술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답니다. 개안수술을 통해 빛을 되찾은 소경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에 주체할 수 없는 감격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지요.  
기차를 타고 집으로 가던 중 그는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하필이면 터널을 지날 때에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는데 눈을 뜨고 보니 캄캄한 세상, 그는 자기가 도로 시력을 잃은 줄로 생각하고 너무나도 절망스러워서 자살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엉뚱하게 설정된 가정에서 그럴듯한 상황을 유추해내는 것이 재미있게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언뜻 연암 박지원이 쓴 이야기 하나가 생각이 났습니다. 서화담 선생이 출타 했다가 집을 잃어버리고 길가에서 울고 있는 사람을 만났더랍니다. 왜 우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뜻밖이었습니다.
"저는 다섯 살 때 눈이 멀어서 지금 20년이나 되었답니다. 오늘 아침 나절에 밖으로 나왔다가 홀연 천지 만물이 맑고 밝게 보이기에 기쁜 나머지 집으로 돌아 가려하니 길은 여러 갈래요, 대문들이 서로 엇비슷하여 저희 집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래 지금 울고 있습지요."
이야기를 들은 선생은,
"네게 집에 돌아가는 방법을 깨우쳐 주겠다. 도로 눈을 감아라. 그러면 곧 너의 집이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소경은 다시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리며 익숙한 걸음걸이로 걸어서 곧장 집에 돌아갈 수 있었더랍니다.
눈을 뜨고 나니 오히려 세상이 번잡하여 길을 찾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는 묘한 역설로 다가옵니다. 어설프게 눈을 뜨고 산다는 것은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것보다도 불행한 일, 우리가 가장 경계할 일은 어설프게 눈을 뜨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2007.10.15  ⓒ한희철(독일 프랑크푸르트감리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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