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한희철 › 어떤 출판기념회

한희철 | 2022.10.21 08:59:39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어떤 출판기념회
지난 토요일 원주를 다녀왔습니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는 송진규 선생님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에 쏟아지는 책들은 얼마나 많은 것일까요? 아무리 많은 책이 만들어져도 세상의 모든 책은 고유할 것입니다. 표절만 아니라면 단 한 권뿐인 책일 테니까요.
세상의 모든 책이 고유하지만 선생님이 내신 책은 더욱 그랬습니다.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교장으로, 평생을 몸 담았던 교직에서 물러나신지 12년, 강산도 변했을 시간이 지났는데 선생님의 가르침을 고마워하는 제자들이 그동안 선생님이 쓰신 글과 찍은 사진을 모아 책을 내었으니, 이런 일이 어디 흔할까 싶었습니다. 주변에서 들어본 적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바람에 밀리는 구름 밟고 가는 달같이>는 두 손으로 공들여 들어야 할 만큼 무거웠습니다. 책의 두께나 지질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책 속에는 선생님이 걸어온 우직한 걸음과, 무엇 하나 허투루 여기지 않았던 선생님의 생각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책에 담긴 몇 꼭지의 글 중 가장 마음에 닿았던 글은 첫 꼭지에 실린 글이었습니다. 잡지 <디새집>에 2년간 연재했던 글은 사라져가는 우리의 옛 소리를 채록한 내용입니다. 누군가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그 소리와 함께 살아왔던 사람들이 그 땅에서 떠나는 순간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는 소리와 사연들을 담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 외진 곳에서 묵묵히 자기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귀 기울여온 선생님의 노고가 더없이 고맙게 여겨지는 글이었습니다.
책에는 선생님이 찍은 사진도 제법 담겨 있습니다. 선생님은 50mm 렌즈를 고집하여 사진을 찍어왔습니다. 50mm가 사람 눈에 가장 가까운 것이 그 이유입니다. 그런 선택 속에도 과장이나 꾸밈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지내오신 선생님의 성품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존경과 정성으로 책을 만들고 그 기쁨을 나누는 자리, 몇 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독일어로 ‘선물하다’를 뜻하는 ‘쉔켄’(schenken)이라는 말은, ‘누군가에게 마실 물을 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오랫동안 제자들에게 마실 물을 주었고, 제자들은 선생님께 오랫동안 마실 물을 드리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라는 책에 실린 한 장면도 떠올랐습니다. 지금의 국립대 총장 격인 대학자 퇴계와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청년 고봉 사이에 오간 편지를 묶은 책인데, 어느 날 고봉은 존경하는 스승에게 편지를 쓴 뒤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삼가 백 번 절하고 올립니다.’ 선생님을 향한 제자들의 마음이 고봉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시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好雪片片 不落別處’(호설편편 불낙별처), ‘고운 눈 송이송이 딴 데 떨어지지 않네’라는 구절입니다. 귀한 가르침을 전해주신 선생님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자리, 은총의 눈이 펑펑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원주까지 가는 토요일의 고속도로는 꽉 막혀있어 가다 서다를 반복했습니다. 혹시 몰라 이른 아침 길을 나섰고 밤중에 돌아왔지만, 그 자리에서 느낀 따뜻한 감동은 하루의 시간을 수고가 아닌 고마움으로 새기게 했습니다.
<교차로> ‘아름다운 사회’ 2022.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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