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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 | 2022.08.26 07:23:55 | 메뉴 건너뛰기 쓰기
무지개가 뜨려면 비와 햇살이 모두 필요하단다
 
지금도 눈에 선한 단강마을 아이들아, 지금쯤 너희들은 세상 어디로 흩어져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르겠구나. 너희들과 이야기를 나누려 하니 지난 시간들이 마치 둑 터진 물처럼 한꺼번에 밀려든단다.
향나무로 둘러싸인 운동장 한 켠에 천 년을 바라보는 느티나무가 세월을 잊은 채 서 있고, 학교 앞으로는 남한강이 유유히 흘러가던 곳, 두 학년이 한 교실에 모여 한 선생님께 수업을 받던 곳, 여학생은 물론 어린 동생들까지 모두 모여야 겨우 축구시합이 가능했던, 흑백 사진속의 학교 같았지.
아름다움으로 치자면 전국 어느 학교 못지않게 아름다운 학교였지만 단강초등학교처럼 소규모학교는 교육 당국자들에겐 골칫거리였겠지. 교육비 절감, 효율적인 교육 등 여러 가지 명분을 내세우며 교육부에서는 소규모 학교를 통폐합하려 했었단다.
가뜩이나 기울대로 기운 농촌의 현실을 두고 농촌의 학교를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농촌을 떠나갔던 젊은이들이 돌아오고, 그래야 농촌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가 마련될 터인데, 학교를 없앤다고 하는 것은 그나마 남아있는 젊은이들을 내쫓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었지.
학교 운영위원장 일을 맡아 학교를 지키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지만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갈수록 줄어드는 학생 수였어. 새로 태어나는 아이가 없다보니 해마다 신입생을 찾아보기가 어려웠지.
고민 끝에 너희들의 부모님들과 모여 회의를 하며 한 가지 제안을 했단다. 너희들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자고 했어. 참으로 엉뚱한 생각이었지만 그것이 너희들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외진 시골에 있는 너희들의 학교는 학생 수가 적어 문을 닫게 된다 하여도 세상이 얼마나 넓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보여주고 싶었어. 무모해 보이는 일이었지만, 그럴수록 절실하고 절박한 일이기도 했단다. 뜬구름을 잡는 이야기 같았지만 부모님들은 기꺼이 그러자고 했어. 나는 지금도 엉뚱하기 그지없는 생각을 신뢰로 받아주었던 그 순간을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단다.
너희들 기억나니? 마을분이 내주신 밭에 보리를 갈던 시간 말이야.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같이 땀을 흘렸지. 눈에 묻힌 보리를 함께 손잡고 밟던 시간도 생각나는구나. 동네 개울을 청소하여 폐품을 팔기도 했었어. 폐품을 팔아 얻은 것은 오만 원도 안 되는 돈이었지만 꿈을 스스로 이루려는 귀한 땀이었어.
그렇게 소중하게 마련된 정성으로 모든 선생님(그래야 교장선생님까지 네 명이었지)과 전교생 스물 두 명이 열흘 동안 다녀온 미국 나들이, 아마도 그 시간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소풍 길로 남을 것 같구나.
워싱턴에서 일주일을 보내며 자연스럽게 구호 하나가 만들어졌지. 조영진 목사님의 아이디어였는데 ‘꿈! 노력! 하나님!’이란 구호였어. 어려운 여건 속에 미국으로 건너와 성공적인 삶을 사신 분들로부터 틈틈이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가 간직해야 할 마음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었어. 꿈을 가지고 노력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면 어떤 꿈도 이룰 수 있다는 귀한 가르침을 “하나” 하면 “꿈!”, “둘”엔 “노력!”, “셋”엔 “하나님”이라 한 목소리로 외치며 마음에 담았지.
뉴욕 자유의 여신상 앞을 배를 타고 지날 때 3학년 현정이가 다가와 했던 말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단다. “정말 하나님께 내 꿈을 들어달라고 기도하면 꿈이 이루어져요?” 현정이의 꿈은 간호사였어. “그럼, 얼마든지! 분명 좋은 간호사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더 아름다운 꿈이 생각나거들랑 그 꿈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노력하렴. 그 꿈도 이룰 수 있을 거야!” 현정이에게 대답할 때 마음이 뜨거웠단다.
독일로 가기 위해 단강을 떠나던 날, 꼭 학교에 들러 학생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달라는 교장선생님의 청을 따라 너희들을 찾았을 때, 교실에서 이야기를 마치자 너희들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 쪽으로 달려갔어. 그리고는 양쪽으로 줄을 서서 박수를 쳤지. 차마 그 앞을 차로 쑥 빠져나올 수가 없어 차를 세우고 다시 너희들 앞에 섰어. 이미 두 눈이 다 젖은 나는 다른 말 대신 그 구호를 다시 한 번 외치자 했어. 내가 하나부터 셋을 셌고, 너희들은 꿈과 노력, 그리고 하나님을 외쳤고. 좋은 꿈을 이뤄 좋은 모습으로 만나자는 말을 끝으로 너희들과 헤어졌는데, 지금도 그 말이 마음속을 메아리치는 것 같단다. 그런 너희들이었으니 지금쯤 너희들이 어디에서 어떤 꿈을 키우고 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오늘 너희들 생각을 다시 하게 된 것은 책 한 권 때문이야. <신도 버린 사람들>이라는 책을 읽다가 너희들 생각이 문득 떠올랐단다. 묵직한 통증 같았어. 인도라는 나라를 잘 알 거야. 인도에는 오래 전부터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라는 4가지 계급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운명과 같은 것이어서 태어날 때부터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신분과 계급이 되었어.
그런데 그 계급에 속하지 못하는 이들이 따로 있었는데, 그들을 아웃카스트, 불가촉천민이라 불렀지. 영어로는 ‘Untouchables'이라 부르는 이들이었어. 개도 마시는 물을 함부로 마실 수 없는 이들이었어. 그들이 섬기며 따르는 고대의 힌두경전인 <마누법전>에는 자신의 비천한 신분을 망각하고 고매한 진리에 접근하려는 수드라와 불가촉천민을 처벌하는 구체적인 규칙도 들어있었지.
베다를 들으면 귀에 납물을 부을 것이요,
베다를 암송하면 그 혀를 자를 것이며,
베다를 기억하면 몸뚱이를 둘로 가를 것이다.
침이 땅을 더럽히지 않도록 오지항아리를 목에 걸고 다니고, 발자국을 즉시 지울 수 있도록 엉덩이에 비를 매달고 다녀야 하는 사람들, 신전에는 행여 그림자조처 들여놓아서는 안 되는 사람들......, 용서하렴, 설마 그런 세상이 아직도 있을까 싶겠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단강이 떠올랐단다.
너희들에겐 형이 되겠구나, 굳이 이름을 말하고 싶진 않다만 작실 마을 외진 언덕에 더없이 허름한 집 한 채가 있어. 어느 핸가 어둘 녘 그 집 아주머니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고 오토바이를 타고 올라가보니 증세가 중해 보였어. 병원으로 모시는 게 좋겠다 싶어 남편을 찾는 사이, 잠깐 아주머니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드렸단다. 그런데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떴을 때 아주머니는 아주 눈을 감고 말았어. 막 50을 넘긴 나이, 병을 얻었지만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한 어이없는 죽음이었어. 소식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달려왔고, 추위를 쫓기 위해 마당에 불을 밝혔을 때 한쪽 편에 비켜섰던 나는 시커멓게 그을린 흙벽에 웬 글씨가 쓰여 있는 걸 보게 되었지.
‘우리는 가난합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세상을 떠난 아주머니의 막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쓴 글씨였어. 5학년이면 한창 꿈을 키워야 할 나이, 그런데 그는 어떤 마음으로 유난히 작은 키를 발돋움 하여 자기 집 벽에 그런 글을 썼을까, 그 글씨는 지워지지 않을 멍처럼 마음에 남아있단다.
한 방송국에서 학교를 찾아와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너희들을 불러 꿈을 물은 적이 있었어. 과학자, 축구선수, 선생님, 간호사.... 너희들은 힘차게 자신의 꿈을 밝혔지. 그런 너희들에게 다시 물었지. 너희가 삼촌이나 고모처럼 어른이 되었을 때 무얼 하고 있을 것 같냐고. 방금 선생님을 꿈으로 말했던 아이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을 것 같다고 대답을 했고, 화가가 꿈이라 했던 한 아이는 밭에서 잎담배를 따고 있을 것 같다고 했어. 마음에 품은 꿈이 대번 마음으로부터 차단되는, 그 일도 마음이 베인 것처럼 아릿한 아픔으로 남아있단다.
아마도 그런 기억 때문이겠지, 불가촉천민에 대한 이야기가 먼 나라 남의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았단다. 그러나 이 책에는 그런 아픔에 대한 기록만 있는 것은 아니란다. 다무와 소누라는 부부가 3,500년 동안이나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고 깨뜨릴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계급과 신분의 벽을 어떻게 깨뜨리고 있는지, 그 결과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으니까.
불가촉천민 출신으로 누구보다 공부를 많이 했지만 그것을 개인의 신분 상승을 위해 쓰지 않고 같은 처지에 있는 달리트(불가촉천민의 또 다른 이름)의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바바사헤브(암베드카르)의 숭고한 삶에 영향을 받은 다무와 소누는 비로소 자의식에 눈을 뜨게 돼. 오랜 세월 동안 굳어진 관습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얼마마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 그럴수록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여러 대목에서 확인할 수가 있어. 바바사헤브의 삶을 보면 한 사람이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숙연하게 깨닫게 된단다.
자식들을 신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교육을 시킨 다무와 소누의 자식들 중 막내아들인 자다브는 마침내 세계가 주목하는 인물이 되었어. 인도의 최상위 대학인 푸네 대학의 총장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장차 인도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인물로 평가받고 있으니까.
너희들에게 이 책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한 가족의 성공담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란다. 무엇보다도 농촌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너희들에게 물려진 잘못된 관습과 인식의 굴레가 무엇인지를 너희도 알았으면 좋겠단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자다브의 가족 이야기를 통해 만날 수 있었으면 싶어.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막내아들에게 아버지 다무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단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연구를 많이 해도 길거리의 사람들을 돕지 못한다면 전부 낭비일 뿐이다.”
책읽기를 거의 마칠 무렵, 나는 또 한 번 뜨거운 눈물을 쏟고 말았지. 여러 차례 눈이 젖은 채 읽어오던 책이었단다.
자다브가 판다르푸르의 이름 높은 사원에 있는 비토바 신당을 처음 찾았을 때, 그를 맞기 위해 사원의 높은 지위를 가진 자들이 총동원 되었어. 자다브는 모두가 공인하는 VIP이었거든. 사원의 운영회장과 대사제가 자다브를 맞았고, 많은 사제들이 자다브가 제를 올리는 것을 서로 도와주고 싶어 했어.
자다브가 선 그곳은 말이야, 이 이야기를 하며 마음이 떨린단다, 불가촉천민인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버지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어머니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어머니가 대대로 얼씬 조차 하지 못했던, 그림자조차도 가까이 할 수 없었던 곳이었어. 불가촉천민들에겐 감히 허락되지 않는 금지구역이었지. 바로 그곳을 불가촉천민의 자식인 자다브가 찾았던 것이지. 마침내 자다브는 신분의 경계를 넘은 것이었어. 수천 년 이어온 제도를 눌러 이긴 것이었지.
지성소에서 눈물로 제를 올리던 자다브에게 사원 바깥에 있는 커다란 돌이 눈에 들어왔고, 자다브는 자신도 모르게 그곳으로 달려가 두 손에 멍이 들도록 그 거친 돌을 힘껏 끌어안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매달렸어. 그 돌은 불가촉천민이 접근할 수 있는 한계를 표시하는 경계석이었단다. 커다란 돌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경계가 자다브를 통해 녹아지는 순간이었지.
단강의 아이들아, 너희들 마음속에도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경계석이 있을지도 몰라. 어깨를 펴렴.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사랑으로 바라보렴. 꿈! 노력! 하나님! 우리가 함께 마음에 새긴 다짐으로 바로 너희가 너희의 꿈을 가둬두었던 경계석을 없앨 수 있기를 바래. 마음속 경계석을 없앨 사람은 바로 너희들이란다.
무지개가 뜨려면 비와 햇살이 모두 필요하다더구나. 꿈을 이루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너희가 비를 참는다면 하늘은 분명 환한 햇살을 주셔서 무지개를 뜨게 할 거야. 무지개처럼 떠오를 너희들의 꿈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내내 사랑으로 지켜보고 싶단다.
<기독교사상> ‘책에서 길어올린 풍경’
<신도 버린 사람들>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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